국악사전

세종대왕

  • 작성일2014-11-16

【정의】음악 분야에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조선의 4대 왕

【내용】세종(재위 1418-1450)은 조선이 건국된 지 30년도 안 된 시점에 조선의 4대 왕위에 올랐다. 재위 시절 조선이 갖추어야 할 여러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음악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 조선의 여느 왕에 비해 음악 실력이 뛰어난 왕으로서 여러 음악 업적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음의 시가를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편경의 국산화 과업 성취, 아악 정리, 악서 찬정,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과 같은 음악 제정의 업적 등이 그의 통치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업적은 세종의 음악 능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우물 정 자 사이에 음을 기록해 넣은 악보로서 싯가를 잴 수 있는 편리한 악보이다. 전체 32간(間)을 한 행으로 하여 질러 놓고 한 행에는 황(黃), 태(太), 중(仲)과 같은 율명(律名)을 기록하고 다른 행에는 장고의 장단, 박, 악기의 선율, 노래 가사 등을 함께 적어 넣어 여러 악기의 악보를 한꺼번에 볼 수 있게 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음악 업적은 박연, 맹사성과 같은 음악을 잘 아는 신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은 박연과 함께 조선의 예악을 정비했을 뿐 아니라 그 격조를 높였다. 제사와 조회, 연향 의례와 음악이 그들에 의해 정비되었으며 편경을 국산화 한 일은 주목할 만하다. 편경은 궁중의 주요 의례의 음악을 연주할 때 필수적인 악기로서 음높이가 고정되어 있어 기준 음을 제시해 준다. 세종 당시 조선에 있는 편경 대부분은 심하게 낡아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여 심지어는 소리가 잘 나지 않는 와경(瓦磬)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조선 땅에서 나는 좋은 경돌을 구하지 못했고 중국에서 악기를 수입해 오는 일도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경기도 남양 지역에서 좋은 소리를 내는 경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취하여 편경의 국산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남양의 경돌로 편경을 제작한 후 시연할 때 세종의 음악성이 발휘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데, 편경의 소리를 듣다가 이칙음(夷則音)이 잘못된 것을 알고 지적한 일은 세종이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세종은 국가 의례를 위한 음악인 <여민락>을 만들었다. 여민락이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의미로 [맹자]의 [양혜왕] 편에 나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민락의 노랫말은 조선의 개국을 찬양한 악장 <용비어천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국을 칭송하고 선조의 위업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로서 조선을 탄생시킨 선조와 그 조상 및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선의 기강을 세우고자 했던 선왕들, 그리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싶었던 세종 자신이 마음을 담아 만든 음악의 제목을 <여민락>이라 한 것은 곧 백성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세종의 마음을 음악에 담은 것이었다.

 [세종실록]의 세종 31년 12월의 기사에는 세종의 음악 실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임금은 음률에 밝았다. 신악의 절주는 모두 임금이 제정한 것으로, 지팡이를 짚고 땅을 쳐서 음절을 구분하여 하루 저녁에 제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세종이 만든 음악이 여러 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여민락> 외에도 후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정대업>과 <보태평>과 같은 음악도 세종이 회례악무로 제정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음악성이 뛰어난 인물의 하나로서 새로운 문물의 큰 과업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에 음악 관련 업적을 남겨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필자】송지원

【참고문헌】한만영,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세종조문화의 재인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송지원, [한국음악의 거장들], 태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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