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용향악보』에 전하는 처용무를 묘사하고 전좌를 청하는 조선 초 노래.
『시용향악보』에 수록되어 있으며, 풍두무(처용무)를 묘사한 노래이다. 중문에 위치해 있다가 외문까지 달려 나가는 행위를 하는 쌍처용을 묘사하고, 나례의 기틀을 잡은 선대왕 태종의 영혼말을 빌어 처용아비에게 전좌를 청하는 노래이다. 당시 궁정 안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시용향악보』에만 유일하게 가사와 악보가 전한다.
○ 역사적 변천 및 현황
『시용향악보』에만 유일하게 가사와 악보가 전한다. 최근에는 오선보로 역보된 악보가 출간된 바 있다.
○ 작품 개요
〈잡처용〉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궁정의 중문부터 외문까지 달려 나가며 축역하는 쌍처용을 묘사하고 태종대왕의 영혼말을 빌어 현재의 군왕에게 전좌를 청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잡처용〉은 평조이며, 16정간 6대강의 48행의 길이의 긴 노래이다.
제3대강 시작음악이다. 〈잡처용〉의 장단은 4행 단위로 반복되는데, 요를 사용하지 않는 고(鼓), 편(鞭), 쌍(雙)으로 구성되며, 4행단위로 ‘고(16정간)/-(16정간)/편(16정간)/쌍(16정간)’이 반복된다. 이와 같은 장고형은 동보의 〈횡살문〉, 〈성황반〉, 〈내당〉과 동일하다.
○ 줄거리
〈잡처용〉은 두명의 처용이 중문부터 외문까지 달려나가면서 맡은바 역할을 하고, 이들에게 태종대왕의 영혼말을 빌어 전좌를 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당시 전좌할 곳은 각종 보물로 장식해두었음을 알려주고 마무리는 흥겨운 구음의 입타령이다.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잡처용〉의 원문과 해석을 제시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시용향악보』 〈잡처용〉의 원문과 해석
원문 |
해석 |
|---|---|
중문(中門) 안해 셔겨신 쌍처용(雙處容) 아바 |
중문(中門) 안에 서계신 쌍처용(雙處容) 아버지 |
외문(外門) 바ᄭᅴ 둥덩 다리로러마. |
외문(外門) 밖에 둥덩 다리로러마 |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전좌(殿座)를 ᄒᆞ시란ᄃᆡ. |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전좌(殿座)를 하시란다. |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전좌(殿座)를 ᄒᆞ시란ᄃᆡ. |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전좌(殿座)를 하시란다. |
아으 보전칠보(寶錢七寶) 지여 살언간만, |
아으 보전칠보(寶錢七寶)로 만들어 세웠건만, |
다롱다로리 대링디러리, |
다롱다로리 대링디러리, |
아으 디렁디러리 다로리. |
아으 디렁디러리 다로리. |
○ 형식과 구성
기존에 〈잡처용〉은 현재 문헌상에 전하는 나례의 의식 범주에 들 수 있는 노래로, 나희행사가 왕을 위한 행사임을 드러내고 왕이 좌정하기 전에 처용이 그 자리를 정화하여 달라고 부른 나례가로 추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처용류 노래의 성격은 무가가 아닌 송축, 내지는 유희요로서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되었고, 문신으로서의 처용이 〈잡처용〉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을 다룬 내용도 소개되었다. <잡처용>의 해석과 관련하여 연산군대의 사실을 바탕을 만든 노래로 보기도 한다. 연산군이 재위 11년에는 유독 풍두무, 즉 처용무를 애호하여 스스로 광대 여산과 함께 쌍처용희를 추었다. 세말 연산군이 애호한 이 풍두무는 『악학궤범』에 전하는 궁중 정재 ‘오방처용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묘사한 노래가 <잡처용>이라는 견해이다. 제1연과 제2연의 내용은 중문 안에 서있던 쌍처용 아비가 외문 밖으로 둥덩 달려가는 모습과 제3연과 제4연은 태종대왕이 불러서 전좌하라고 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여기서 ‘쌍처용 아버지’는 연산군과 광희악에 속한 재인 여산(余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산군 11년(1505) 11월 3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사관은 연산군이 매양 술이 취하여 발광할 때마다 스스로 풍두를 얼굴에 걸고 경복궁으로 가서, 흥청 수백 명에게 풍악을 치며 따르게 하여 대비 앞에서 희롱하고 춤도 추었으며, 또 광희악 여산(余山)을 불러 내정에서 짝을 지어 춤추었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중문에서 외문 밖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연산군이 경복궁에서 풍두무를 경복궁에서 했다는 기록에 의해 경복궁의 내전 밖 중문에서 외문 밖으로 달려나가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제3연과 제4연의 태종대왕이 전좌, 즉 왕좌에 앉으라고 한 대상은 연산군을 두고 한 말로 연결되는데, 여기서 주체가 되는 태종은 14년(1414) 12월 30일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제야에 구나(驅儺)를 시작했는데, “제야 전날 구나는 본조의 오랜 습속으로 옛 문헌에 의거하여, 이후로는 초혼(初昏)부터 시작해서 야반(夜半)에 그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명했다는 내용에 의해 태종을 시조로 삼아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잡처용>에서 태종을 시조로 삼아 당시 쌍처용 잡희를 추던 연산군과 여산에게 명령한다고 하면 이것은 앞의 구나의식과는 또다른 축역의식의 시작을 재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제5연의 ‘보전칠보 지여 살언간만’은 후에 중종 1년(1506) 9월 2일, 연산군의 죄상에 관해 사신이 논한 내용에 의하면 연산군은 민간의 배를 빼앗아 경회루에 끌어들여서 못 위에 연결하여 놓고, 그 위에 채색 무대를 만들어, 첫째 ‘만세(萬歲)’, 둘째는 ‘영충(迎忠)’, 셋째는 ‘진사(鎭邪)’산이라고 하였는데, 세 산이 높직이 치솟아 사치와 화려함이 극치에 달하였다고 전한다. 즉,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보전칠보로 지여 살언간만’은 ‘보전칠보로 만들어 세웠건만’으로 당시 조성된 화려한 장식의 산대와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연산군은 특히 재위 11년에는 풍두무, 즉 처용무를 애호하였다. 대비가 잔치에서 베풀어 줄 때에도 특별히 풍두무를 운평여기와 광희재인으로 하여금 경복궁에서 수백명을 동원해 벌리게 하였고, 평시뿐 아니라 세말에는 이 풍두무를 30인으로 하여금 연출하도록 했다. 이처럼 연산군이 애호한 풍두무는 『악학궤범』에 전하는 궁중 정재 ‘오방처용무’와는 다르기 때문에 <잡처용>으로 구별하여 부른 것이며, 이를 묘사한 노래가 바로 이 곡이다.

〈잡처용〉의 가사 중 등장하는 “태종 대왕이 전좌를 하시란대”를 통해 『시용향악보』의 연대가 조선 태종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음을 나타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잡처용〉은 당시 화려하게 장식된 궁중 안의 풍경과 쌍처용희로 축역하던 상황을 묘사하여 연산군 말년의 일을 이야기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잡처용〉은 연말 나례의식 중 처용잡희와 관련된 노래가 관찬 악보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