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사전

무동

  • 작성일2014-11-16

【정의】1.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하던 나이 어린 악공.

2. 남사당패에서 춤추는 어린 아이.

3. 농악패에서 춤추는 어린 아이.

이칭남사당패에서는 ‘새미’라고 함.

유래 및 역사무동은 1432년(세종 14)에 궁중의 잔치인 외연(外宴)에서 여성 무용수 대신에 춤과 노래를 담당하기 위한 사내아이를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8살에서 10살 사이의 나이 어린 관가의 노비, 즉 관노(官奴) 60명을 뽑은 것이 무동의 시초이다. 이듬해인 1433년(세종 15)에 궁중잔치인 회례연(會禮宴)에서 처음으로 무동이 몽금척(夢金尺)?오양선(五羊仙)?아박(牙拍)?무고(舞鼓) 정재를 공연했다. 무동은 회례연, 나이 많은 신하를 위한 잔치인 양로연(養老宴), 이웃 나라에서 온 사신을 위한 잔치인 인국사객연(隣國使客宴) 등에서 공연했다. 또한 세종은 궁중에서 잡귀 잡신을 물리기 위해 벌이는 정조 나례(正朝儺禮)에도 무동을 쓰도록 했다.

 그러나 무동 제도가 시행된 지 4년 만인 1447년(세종 29)에 무동은 재주가 익숙해질 만하면 곧 어른이 되어버리므로 계속 키우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동 제도를 없애 악공(樂工)에 부속시키고, 무동이 필요한 잔치에 악공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외연에 남악(男樂)을 쓰는 제도를 완전히 정착시켜 조선 시대 말까지 유지했다.

동 제도는 국권을 상실하면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22년에 왕실의 음악과 무용을 전승하는 이왕직아악부양성소 학생 중에서 11명을 무동으로 선발하였다. 이들은 5개월의 연습을 거친 뒤에 1923년 3월 25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순종황제 오순 탄신경축에서 궁중무용인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무고(舞鼓), 포구락(抛毬樂), 보상무(寶相舞), 수연장(壽延長), 춘앵전(春鶯?) 등을 공연했다.

조선 말엽에는 줄타기, 땅재주, 인형극 등을 연행하는 남사당패의 춤추는 어린 아이를 무동이라고 했다. 남사당패에서는 무동을 ‘새미’라고도 하는데, 이는 굿판의 용어인 ‘소무(小巫)’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사당패의 놀이를 흉내 낸 농악패의 춤추는 어린 아이도 무동이라고 한다.

내용무동의 공연 내용은 조선 후기에 궁중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의궤(儀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무동은 여악보다는 출연진이나 공연 종목의 수가 적었으나,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사순(四旬)을 경축한 1828년(순조 28) 진작(進爵)에서는 무동이 무용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이 당시에 처음 창작된 19종목의 궁중무용인 정재(呈才)가 초연된 1828년 6월 1일의 연경당 진작에서는 6명의 무동이 23종목의 공연을 담당하였을 정도로 다양한 정재를 섭렵했다.

대한제국(1897~1910) 시기에는 조선 시대보다 무동의 규모가 확대된 경향을 보인다. 1902년(광무 6) 11월에 열린 고종의 51세 경축 진연(進宴)에서는 34명의 무동이 25종목의 정재에 출연했다. 무동이 공연한 정재 종목과 춤사위에 관해서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현재 장서각에 1901년(광무 5) 외진연의 한문본과 국문본 홀기를 비롯해 연대 미상의 무동 홀기 1건 등 총 3건의 무동 홀기가 전한다.

 조선 말엽에는 남사당패의 춤추는 어린 아이를 무동이라고 했다. 특히 어린 아이를 어른의 어깨 위에 올리고 노는 ‘무동놀이’를 하면서 무동은 남사당패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남사당패에서는 3명이 차례로 어깨 위에 올라가서 노는 ‘삼무동놀이’와 5명으로 노는 ‘오무동놀이’와 같은 곡예적인 놀이가 인기를 얻게 된다. 이런 ‘무동놀이’는 농악패에서도 받아들여져서, 요즘 농악패의 놀이에는 ‘무동놀림’이 인기 있는 놀이로 연행된다.

【필자】이용식

【참고문헌】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서울: 민속원, 2003.

김천흥. [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서울: 민속원, 2005.

심우성. [사당패연구] 서울: 동문선, 1989.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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