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사전

봉산탈춤

  • 작성일2014-11-16

【정의】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황해도 봉산과 사리원에 전승되던 탈놀이.

【유래 및 역사】봉산탈춤은 5월 단오에 연희되는 세시 풍속의 하나로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관아의 경사스러운 행사나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에도 특별히 탈놀음을 했다고 한다. 1915년 이후에는 군청이 사리원으로 이전됨에 따라 주된 무대가 봉산에서 사리원으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향토 문화 부흥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내용】황해도 봉산은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중요한 교역지 탈놀음하기에 좋은 지역적, 경제적 여건을 갖추었다. 특히나 이 지역 관아의 말단 관리직인 이속(吏屬)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성행할 수 있었다.

봉산탈춤은 크게 앞놀이, 본놀이, 뒷놀이의 세 부분으로 구성할 수 있다. 실제 탈놀음은 본놀이만을 말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본놀이를 벌이기 전에 앞놀이로서 길놀이를 놀았다. 탈을 쓴 놀이꾼들이 삼현육각(三絃六角)에 맞추어 길놀이를 벌였는데 그때 원숭이춤이 인기가 있었다. 길놀이 다음에는 봉산탈춤의 중흥자로 불리는 안초목의 영혼을 위로하는 고사가 있었다고도 한다. 본놀이는 제1마당[科場] 상좌(上佐)춤, 제2마당 팔먹중춤, 제3마당 사당(社堂)춤, 제4마당 노장춤, 제5마당 사자춤, 제6마당 양반춤, 제7마당 미얄춤으로 구성되었다. 뒷놀이는 본놀이를 놀고 이후 관중과 연희자들이 어울려 한바탕 노는 것을 말한다.

 제1마당은 상좌(上佐)춤으로 상좌란 중을 말한다. 네 명의 상좌가 등장하여 사방에 있는 신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가지는 의식무를 춘다. 제2마당은 팔먹중춤으로 먹중이란 묵승(墨僧), 목승(目僧) 등으로 불리는데 ‘검은 색깔의 승려’라는 뜻으로 절에서 군불을 때는 젊은 중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나와서 사설과 춤으로 자신의 소개를 하고 제각기 춤을 추고 나간다. 제3마당은 사당(社堂)춤으로 사당이란 떠돌며 자신들의 기예로 연명하는 여자들을 말하며 이들이 패거리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당패라고 한다. 또한 사당패에 속해 있는 남자들은 거사라고 부른다. 사당춤에서는 7명의 거사들이 화려하게 꾸민 사당을 업고 등장하는데, 홀아비 거사가 사당을 희롱하다 쫓겨나는 장면이 묘사된다. 제4마당은 노장춤으로 노장은 노승을 말한다. 제4마당은 모두 3경으로 구성되고, 제1경 ‘노장춤’에서는 젊은 유녀(遊女)로 볼 수 있는 소무(小巫)가 등장하여,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에 넘어가 파계하는 대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 정신을 드러낸다. 제2경 ‘신 장수춤’에서는 신발 장수에게 노장이 소무에게 줄 신발을 외상으로 사는데, 신발 장수가 그에게 신발값을 받기 위해 원숭이를 보냈지만 장작을 파는 장작전으로 오라는 편지를 받고 장작으로 맞을까봐 도망가는 모습을 그렸다. 제3경 ‘취발이춤’에서는 취발이가 술에 취한 듯 등장하여 노장에게 얻어맞고 정신을 차린 후 노장과 노는 소무를 빼앗을 요량으로 내기를 하지만 결국 지게 된다. 하지만 힘으로 노장을 내쫓고 돈으로 소무의 환심을 사 사랑의 춤을 추고 아이를 낳은 후 천자문과 한글을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제5마당은 사자춤으로 부처님이 보낸 사자가 파계승들을 벌하러 내려와 먹중들이 회개하자 이를 용서하고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렸다. 이 사자춤은 봉산탈춤에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100여 년 전에 들어간 것이라 한다. 제6마당은 양반춤으로 말뚝이가 채찍을 들고 양반 3형제와 함께 나와서 재담을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말뚝이가 여지없이 양반을 조롱하고, 잡아온 취발이를 돈을 받고 풀어주는 대목에서는 부패가 폭로된다. 마지막 제7마당 미얄춤은 난리통에 헤어진 영감을 만나지만 영감이 돌머리집이라는 소첩을 얻은 일에 싸움을 벌이다가 죽는다. 이에 남강노인이 무당을 불러 넋을 불러 극락으로 보내는 굿을 해준다.

 봉산탈춤은 벽사에 대한 의식과 굿,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과 조롱, 남녀의 대립과 갈등, 서민 생활을 실상을 보여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탈은 바가지와 종이로 만드는데 약 200여 년 전 봉산의 이속(吏屬: 관아)인 안초목이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어 개혁을 단행한 이후 계속된 것이라고 한다. 봉산탈춤 음악 반주는 피리 둘, 대금, 북, 장고, 해금 각기 하나의 삼현육각 편성에 꽹과리와 징이 함께 한다.

【필자】이진원

【참고문헌】李杜鉉. [韓國假面劇]. 서울: 문화재관리국, 1969.

박전열, 정수미, 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서울: 화산문화 , 2001.

[重要無形文化財解說 演劇篇]. 서울: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86.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