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행사

임인진연, 황제의 시선으로 보다

대개 공연을 관람할 때 작품성과 완성도, 출연자의 기량, 전반적인 발란스 등을 중심으로 본다. 임인진연은 그런 기준에다 좀 더 새로운 관점을 더 해 본 작품이다. 공연에 깃든 역사의 가상체험과 상상이 그것이다. 픽션이라는 극적 장치가 아니라 무대위에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음으로써 비현실적인 현장감이 주는 감동이 신선했고, 파란만장했던 당시의 시대적 긴장감이 외려 극적인 감성을 돋우었다. 짧았던 대한제국 시대의 절정기였으며, 일제의 집요한 국권침탈과 이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시기에 이루어졌던 처절한 몸부림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인 까닭이다.

애초 황제의 분부로 규모를 축소하여 잔치를 기획했고, 또 당시보다 1/6 정도로 복원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 진연의 압도적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여간의 사정을 감안할 때 그것을 가능케 했던 당시의 생산력과 사회적 분위기가 새롭고 놀랍게 다가왔다. 청소년기 식민사관 교육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인식된 대한제국은 남루하고 쓰러져가는 난파선의 이미지로 각인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제행사로 기획되었던 잔치였음을 생각해보면, 당시 대한제국의 국가시스템이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대화와 국위의 앙양을 위한 절절한 노력과 시도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분야를 가리지 않은 잔혹한 문화 말살정책으로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와 줄기가 훼손되고, 뒤 이은 미국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그 자리에 이식된 일본과 서양문화의 DNA가 지난 110여년 동안 어느덧 우리의 문화세포에 깊숙이 자리잡아 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공연이 자칫 낯선 문화적 체험이 되어버린 듯한 안타까움이 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문화의 나무는 품이 넓되 깊고 단단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넓은 품속에서는 잎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하여 벌나비가 노닐고 새들이 쉬어 가며, 그리고 그 그늘 아래에선 달콤한 휴식을 누리는 굳건한 나무 말이다. 우리 문화의 옛모습과 뿌리를 찾아 복원하고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고욤나무는 접을 붙여 감나무가 되면 큼직하고 먹기 좋은 감을 열매로 맺지만, 그 감의 씨앗을 심으면 감나무가 아니라 고염나무로 큰다. DNA란 그런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임인진연에 대한 한경 송태형기자의 글은 일반인들이 흔히 느껴 봄 직한 생각이겠으나, ‘공연’이란 틀에 얽매어 전통문화의 의미와 가치를 간과한 관점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더욱이 공연의 취지를 이해하고 공연이 관객의 취향과의 타협의 산물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놓고 클래식한 구상의 미가 부족하다고 트집잡는 것 같은 다소 억지스런 느낌이 든다.

공연을 복기해보면, 우선 정형화된 예식이나 절차가 주는 건조함과 무거움 사이사이에 음악과 춤과 노래가 다리를 놓아 균형을 잡았고, 화려함과 기품이 교차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120년전 우리 예술의 최고봉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선인들이 행한 최고의 의례와 예우는 어떠하였는지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값진 시간이 아닌가 한다.

유물로 남아있는 의궤 속 그림이 무대로 튀어나온 듯한 착시는 의궤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 때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는 ‘반차도’를 통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는데, 그 반차도를 보고 그대로 행사를 준비하였으며 행사가 끝난 후 반차도를 포함하여 행사 전반의 진행과정과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의궤이다. 임인진연을 끝으로 의궤제작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마지막 의궤인 것이다. 이 평면적 기록을 삼차원 공간에서 복원하고 재현한 ‘엄청난’ 작업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단순한 복원과 재현을 넘어서는 육중한 감흥에 휩싸여 공연이 끝나고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의궤로 표현되지 못한 생생한 현장성의 무게 때문이다. 황제의 좌석은 비어 있으나, 마치 황제의 영혼이 내 눈앞에 앉아있는 듯한 착시가 공연 내내 이어졌다. 공연의 시작과 끝, 막에 비추어지는 푸른 용 그림이 그것이다. 광무제 고종을 상징하여 LED로 조사된 용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며 메시지를 내뿜는 듯 강렬했다. 공연을 열고 닫을 때 꿈틀거리던 용의 모습이 공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아른거린다. 연출의 상상력과 힘이다.

공연의 앞부분 황태자의 예소와 황제의 메시지가 화면과 나레이션 부분 또한 이 공연의 컨셉과 분위기를 잘 표현한 연출로 생각된다. 도입부에서부터 이 작품의 기품을 잘 드러내 보이는 장면이었다. 따라서 임인진연은 단순한 복원과 재현을 넘어서는 ‘공연’으로서의 정체성을 충분히 확보하였다고 본다. 복원과 재현 또한 상상력과 창조의 영역에서 품격이 좌우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공연과 예술작품을 대하며 관객들은 저마다의 ‘창(窓)’으로 보고 즐긴다. 120년 만에 두번째 회갑을 맞아 열린 임인진연처럼, 임인년에 회갑을 맞은 사람들은 회갑잔치로서의 의미로 뿌듯함을 더 할 수 있어 더 뜻깊은 공연이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에 좋은 옷을 더 입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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