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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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작성일2023.10.12

조회수204

2023 복합매체 국악사전 민속: 기악 '거문고산조 중 한갑득류 거문고산조'[2023.08.]
  • 설명

    ○ 제396회 무형문화재 무대종목공연: 이방실 거문고[2003.05.13.]의 첫 번째 프로그램 ○ 팸플릿 수록 내용 거문고산조란 거문고를 위한 독주곡으로 산조를 거문고로 탔을 때의 이름이다. 빠르기가 다른 4~5개의 장단으로 구성되며 장단의 이름이 악작의 이름을 대신한다. 초기에는 봉건사상에 젖어 있는 일부 층에 의하여 百樂之長인 거문고로 賤樂을 탄주한다는 심한 반발을 사기도 하였으나, 점차 그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독자적 장르의 음악으로 발전되었다. 거문고산조의 선율은 평화스럽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羽調와 슬프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界面調로 짜여 있는데, 어느 樂章이나 우조는 처음이나 중간에 잠깐 나오며 끝은 흔히 계면조로 맺는다. 산조는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점점 몰아가며 우조와 계면조를 섞고 느긋한 리듬과 촉급한 리듬을 교차하며 조이고 풀고 하여 喜怒哀樂의 감정을 표출하는 음악으로 옛날에는 즉흥적인 음악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고정선율로 바꾸어지고 있다고 보겠다. 한갑득 선생은 어려서부터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 어른(조부는 대금명인 한덕만, 부친은 동편계열의 강산제 명창 김채만의 맥을 잇는 명창 한성태)들의 영향으로 항상 음악을 들으며 음악 속에서 성장해왔으며, 이러한 집안 환경은 그가 음악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거문고산조로 일가를 이루는데 근원이 되었다. 선생의 음악에 대한 수학 과정을 살펴보면, 8세 때 광주에서 안기옥에게 3-4년간 가야금산조 전판(진양조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자진자진모리[휘모리])를 배웠으며, 14세쯤에는 일본의 초청공연으로 가야금산조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거문고와 인연을 맺은 것은 白樂俊이 광주에서 연기를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거문고 성음에 반하여 그에게 가르쳐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백낙준(1876년 출생으로 20세 때에 부친 白善達의 口音을 모방하여 산조를 타기 시작하여 三南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에게서 거문고산조를 배운 단양군 창평면 유곡리에 살고 있던 朴錫基(1899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이다. 일본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했으나 음악을 좋아해 백낙준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예술인들을 집에 초대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후진들에게 전수하게 하였다. 박석기 자신은 연주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한갑득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길러내 거문고 산조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다.)에게 13세때부터 7-8년간 거문고 산조 및 풍류와 가고을 배웠다. 선생은 20대에 한동안 판소리 반주로 명성을 떨쳤었는데, 1939년 가을에 박석기에 의하여 조직된 화랑 창극단의 [봉덕사의 종소리]에 박동실, 조몽실, 김막동 등과 반주로 참여하였으며, 1942년에는 장흥 출신 명창인 金錄株가 OK레코드사에서 [興補歌全集]을 취입 했는데, 김막동은 장단을, 선생은 기악을 맡았다. 1945년 10월 15일에 광주성악연구회에서 직속 창극단을 조직하여 광주극장에서 박황 각색의 [대흥보전]을 공연하였는데, 여기서도 선생은 박동실, 공대일 등과 함께 반주를 맡았다. 이러한 20대의 판소리 반주는 박석기에게서 전수 받은 거대한 산조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 인물정보

    ○ 거문고/이방실 - 국립국악원 정악단 단원 - 국립국악고등학교 강사 - 아시아琴교류회 준회원 - 사사: 황해영, 김치자, 김선한, 하주화, 정대석, 김무길 ○ 장구/김청만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후보 -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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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01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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