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으로 연주하는 산조
해금산조는 1920~30년대 지용구(池龍九), 김덕진(金德辰) 등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이후 1950~60년대에 이르러 지영희(池暎熙), 한범수(韓範洙), 류대복(柳大福), 임선문(林仙門) 등 2세대 명인들에 의해 체계를 갖춘 산조가 정립되었다. 이 중 현재 전승되는 것은 지영희류, 한범수류, 서용석류, 김영재류 등이다. 두 줄의 찰현악기인 해금의 윽악적 가능성을 최대한 표현해낸 것이 해금 산조이다.
○ 역사적 변천 과정 <해금산조>의 초기 형태는 1920~1930년대 1세대 연주가인 김덕진(金德辰)과 지용구(池龍九)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이 경성방송 출연 및 음반 취입 요청을 받고 연주한 음악은 <봉장취(鳳莊取)>, <봉구황(鳳求凰)>, <굿거리> 등인데, 지용구의 1930년대 후반 녹음에 갈래명을 해금산조(奚琴散調)라고 제시하되 구체적인 악장명은 <봉구황>, <굿거리>로 표기하고 대금과 합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특정 장단으로 된 악장을 느린 것부터 빠른 것 순으로 일정한 논리로 연결시키는 연속체를 충분히 구성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해금산조는 1950~60년대에 이르러 류대복(柳大福), 지영희(池暎熙), 한범수(韓範洙), 임선문(林仙門) 등 2세대 명인들에 의해 '정형화된 악장'을 갖추게 되었고, 기악독주곡으로서 안착되었다. 이들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4악장 구성을 <해금산조>의 기본 틀로 확립했다. 디만, 지영희는 굿거리를, 류대복은 엇모리와 휘모리를 추가하여 5~6 악장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김영재(金泳宰)와 서용석(徐龍錫)은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 새로운 산조를 발표하고 성공적으로 전승했다. 현재 제도권 내의 교육계나 연주단체에서 활동하며 전승기반을 갖추지 못한 1세대 명인 김덕진(金德辰)의 산조와 2세대 명인 중 임선문의 산조는 현재 전승이 중단되었고, 류대복의 산조는 북한의 제도권 학교에서 학습된 바 있다. 이에 현재 한국에서는 네 가지 유파가 전승되고 있다. ○ 음악적 특징 해금산조는 1세대 연주가들의 즉흥적 시도에서 출발하여, 2세대 명인들에 의해 정형화된 독주곡으로 발전한 산조로서, 단순한 악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현과 시김새를 통해 악기 고유의 음악성을 표출한다. 1세대 연주가들이 시도한 산조는 중모리와 굿거리, 단 두 개의 악장 구성이었던 것에 비해, 1960년대에 형성된 산조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네 악장을 기본 틀로 삼게 되었다. 여기에 지영희는 굿거리를, 류대복은 엇모리와 휘모리를 추가하여 5~6악장 구성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서용석류의 '빠른 중중모리'나 김영재류의 '단모리'처럼 새로운 악장이 추가되기도 했다. 또한 1930년대 지용구의 산조는 운지 이동이 전혀 없었으나 세대를 거치며 해금의 음역 활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시김새의 표현도 유파별로 세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계면조 중심으로 되어 있던 초기 해금 산조는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조를 사용하게 되었다. 경토리나 메나리토리를 추가로 활용하여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갔다.
지용구와 김덕진은 산조 형성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후 세대 명인들은 악곡의 구조를 정연하게 다듬고, 악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키며 두 줄 악기의 음악적 표현 가능성과 연주기법을 극대화했다.
강덕원·양경숙, 『해금산조』, 현대음악 출판사, 1989. 최태현 채보, 『해금 산조 네바탕』, 세광음악 출판사, 2014. 논문 김정미, 「미전승(未傳承) 해금산조 연구 : 김덕진·지용구·류대복·임선문의 선율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윤하림, 「해금산조의 변천양상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허시라, 「지용구의 음악활동 및 초기 해금산조 창제의 음악사적 고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전문사논문, 2004.
양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