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지 | 편액 | 속칭 | 동제일시 | 신격 | 참여지역 | 비고 |
| 자인면(慈仁面) 서부동(西部洞) 재정지 |
진충사 (盡忠祠) |
한당 (韓堂) |
단오일 사시 (端午日 巳時) |
증판서한장군신위 (贈判書韓將軍神位) |
구자인군(舊慈仁郡) 칠면의 전동민 |
한장군묘로 면면이 신앙하던 옛무덤을 1970년에 이장하였다. |
| 자인면 북사동 (慈仁面 北射洞) |
없음 | 없음 | 없음 | 한장군 누이 | 구자인군(舊慈仁郡) 칠면의 전동민 |
일제말 왜경에 의해 철거되다. 장군의 갑주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
| 진량면 마곡동 (珍良面 麻谷洞) |
한묘 (韓廟) |
한묘 (韓廟)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병조판서한장군 한씨 낭자 신위 (贈判書韓將軍韓氏娘子神位) |
현내(현내), 광석(廣石), 마곡(麻谷) 삼개동 | 한장군의 자씨(姉氏) 혹은 매씨(妹氏) 사당이라고 한다 |
| 자인면 원당동 (慈仁面 元堂洞) |
없음 | 한당 (韓堂)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판서한장군신위 (한장군 누이) |
원당동 | 매씨 배향 (妹氏 配享) |
| 용성면 대종동 (龍城面 大宗洞) |
진충사 (盡忠祠) |
한당 (韓堂)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증판서한장군종유신위 (贈判書韓將軍宗愈神位) |
대종(大宗), 괘일(掛日), 용전(龍田), 용천(龍川), 가척(加尺) 육동 | 매씨 배향 (妹氏 配享) |
| 용성면 송림동 (龍城面 松林洞) |
없음 | 한장군 매씨사당 |
단오일 자시 (端午日 子時) |
한장군 한장군 누님 |
인근 일대 (隣近 一帶) |
일제말기에 기독교인들을 시켜 철거하여 지금은 ‘돌다무레기’(돌무덤)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
| 진량면 자문동 (珍良面 紫門洞) |
없음 | ? |
? |
한장군 |
인근 일대 |
일제 말기에 훼철되었다. |
이상의 분사된 지역적 개황을 통해서 경산자인단오제는 고을굿의 특징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자인면과 진량면이 모두 동참하여 한 장군이나 한 장군 누이를 섬기는 당을 설립하고 이들을 위한 유가식 제의와 무속식 제의를 벌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재래의 민요적인 율조로 하는 특정한 신을 맞이하는 특정한 노래가 한문으로 된 것이 있으므로 이를 주목해야만 한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사(迎神詞) 또는 강신사(降神詞)의 내용 가운데 구전으로 전하는 것과 새롭게 창조된 것의 노랫말이 한자로 전하는데 김매는 소리조로 하였다고 한다. ‘어진 산이여 옛날부터 묘사가 있었네 한 장군의 영험함이여 영결종천하여 쉬시라(예전의 전승 자료임, 仁之山兮 古有廟 將軍靈兮 永訣休)’와 ‘적군 병사를 섬멸함이여 나라를 지킴이여 칼을 날려서 돌에 피묻힘이여 혈흔이 돌에 남았도다(1968년에 창조된 것임, 殲敵兵兮 護國兮 宛刀石兮 血痕留)’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축문과 다르다고 하고, 〈논매는소리〉조로 하는 신맞이 노래라고 하는 점에서 주목해야만 한다.
《단오굿》이 막바지에 도달하는 대목에서 특징적인 일이 벌어진다. 《단오굿》의 경우에는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전한다. 특히 3년두리로 3년마다 한번씩 무당을 불러 큰굿을 했는데 1920년부터 그마저 전승이 단절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먼저 ‘장군덤’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여기에 인사를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장군덤을 아이들은 ‘따깽이’라고 이르는데 이것은 뚜껑이라고 하는 뜻이다. 장군덤은 개울가의 절벽 위에 흡사 뚜껑 모양으로 된 거대한 암석이 놓여 있고, 이것은 한 장군이 가져다 덮었다고 전승 경위를 가지고 있다. 옆에 있는 한 장군 누님이 계시는 곳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데 현재는 아무것도 없고 잡목이 무성한 암석만이 전한다. 여기에 가서 인사를 하고 쇠를 치고 난 다음에 버드나무 숲의 한장군 사당으로 와서 《단오굿》을 연행하였다고 말한다.
〈여원무〉는 여원화를 중심으로 춤을 추는 것이 요점이다. 〈여원무〉를 추게 되면 그 안에 화랭이 출신으로 남성이 여장을 하고 꽃을 두고 이를 차지하는 놀이가 벌어지게 된다. 여원화는 신성하게 간주하여 이에 대한 금기가 행해진다. 단오제를 지내기 전에는 사람들은 못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나, 《단오굿》이 끝나는 무렵에는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꽃송이를 따가기에 혈안이 될 정도이다. 이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 제액, 치병 등의 효험이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주술적인 행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무리하는 대목에서는 도리깨로 타작하여 여원화는 그 모습마저도 없어지게 된다.
김헌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