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귀, 매구굿, 매귀희
섣달그믐이나 정월에 나쁜 액을 쫓아내기 위해 치는 농악.
매구는 고대 한반도의 음악을 지칭하는 매(韎)‧매(眛)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적 관련성은 조선시대의 매귀(埋鬼)에서부터 확인된다. 조선전기에는 한 해를 보내는 섣달그믐에 가정집을 방문하여 액막이하는 것을 매귀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에는 기금을 모으는 걸궁농악이 발달하면서 정월의 마당밟이까지 매귀로 인식한다. 이에 더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농악을 매구라 하고, 농악 연행자들을 매구꾼이나 매구쟁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까지 전라도 일부 마을에서는 섣달그믐의 액막이 농악을 매굿이라 하며 정월의 연행과 구별하여 전승하였다.
나쁜 액을 몰아내는 벽사의식으로서 연희와 음악은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전통이다. 고대 중국황실에서 제례나 연향 때 사이(四夷)의 악(樂)을 함께 연주케 하였는데, 이때 동이(東夷)의 악(樂)인 매(眛)를 함께 연주했다고 전한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 동이의 악을 지칭할 때 표기한 『주례(周禮)』의 매(韎)나 『예기(禮記)』의 매(眛)는 우리말 ‘매’의 음차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나례가 들어오면서 매귀굿을 민간의 나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고대시대부터 한국의 음악이나 연희를 ‘매’라고 하였고, 민간에서 매구ㆍ매귀ㆍ매굿ㆍ매구굿이라는 용어를 줄곧 사용해 온 점을 고려하면 매굿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연행 시기와 지역별 유형 매구의 연행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형태가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에는 방울과 북을 울리고, 대나무‧가시나무‧익모초 줄기 등을 엮은 빗자루로 대문을 긁으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시늉을 한다. 이러한 연희 형태는 악기 연주보다 액막이로서 주술적 행위가 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후기에는 일반적인 마당밟이(지신밟기)와 동일한 형태로 가정을 방문하여 액막이 노래와 함께 농악을 연행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경상도에서는 탈춤의 가면을 착용한 연희자들도 매구패의 일원이 되어 재주와 연극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20세기 후반의 자료에서 파악되는 매굿은 일반적인 마당밟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마을신으로 좌정해 있는 당산에서 제사와 더불어 당산굿을 치고, 우물과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마당밟이처럼 농악을 연행하였다. 다만, 매구는 액막이에 초점이 있어서 마당밟이와 달리 적극적으로 돈과 쌀을 걷지 않았다. 한 해를 보내는 섣달그믐 하루에 마을의 모든 가정집을 돌며 매구를 쳐야 했기 때문에 가정을 방문하더라도 간단히 액막이 가락만을 연주하고 이동했다. 즉, 농악의 절차보다 마을의 모든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 절차와 구성 사례 《임실 필봉농악》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마을의 사악한 것을 쫓고 경사스런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매굿을 쳤다. 섣달그믐날 오후 여섯 시 무렵 동청 마당에서 나발수가 소리로 신호하면, 쇠꾼들이 모여 당산과 가정집을 돌며 쇳가락을 몰아치며 매굿을 쳤다. 가정에서는 정월 당산제 기간에 제물로 사용할 쌀이나 돈을 내놓는다. 매굿은 정해진 절차 없이 한바탕 치고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김제농악》에서는 섣달그믐날 밤 당산제를 지내고 가가호호를 돌며 매굿을 쳤다. 밤 12시를 기해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로 내려와 《샘굿》을 치고, 이장집을 시작으로 마을의 모든 가정을 돌며 매굿을 쳤다. 마당밟이는 정월 초사흗날부터 다시 가가호호를 돌며 연행했다. 군산시 옥구읍 복교리에서는 섣달그믐날 밤에 치는 농악을 매굿이라고 한다. 매굿은 마을에 잡귀를 몰아내고 새해에 복을 불러들이며 평안을 기원하는 농악이다. 밤 8시쯤 모여서 〈당산굿〉을 시작으로 공동우물과 가가호호를 돌며 매굿을 쳤다. 밤새도록 집집마다 들려서 매굿을 모두 치고 나면 마을 한가운데 모여서 굿가락을 얼르고 쇠가락을 마친 다음 일체 쇳소리를 내지 않고 해산한다.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서는 섣달그믐에 매굿을 치고 정초에 마당밟이를 하였다. 섣달그믐이 되면 당산에 영기와 농기를 꽂아놓고 〈당산제〉를 지낸 다음 마을 우물에서 〈우물굿〉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걸립굿을 쳤다. 고창군 해리면 구동호마을에서는 섣달그믐에 가가호호를 돌며 치는 농악을 매굿이라고 하고, 정월 보름의 마당밟이를 〈걸립〉이라고 한다. 섣달그믐이 되면 초저녁부터 마을의 모든 가정을 돌아다니며 매굿을 쳤다. 신안군 가거도에서는 섣달그믐에 농악대와 공기총을 든 사람이 가정과 공공기관을 돌면서 허공에 총을 쏘며 매굿을 연행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매굿의 연행은 중단되거나 소멸한 상태다. 다만, 완도 노화도나 제주 추자도 섬지역에서는 매굿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지만, 섣달그믐과 정월보름의 농악을 구분하여 연행하고 있다. ○ 역사적 변천과 전승 조선시대의 매귀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액막이를 하는 세말의례(歲末儀禮)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6세기에 기록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궁중에서 섣달그믐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모아 붉은 옷으로 치장하고 방상시와 함께 악귀를 쫓아내던 나례를 민간에서 모방하여 연희를 하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고 하였다. 매귀를 연행할 때 녹색 죽엽(竹葉)ㆍ붉은 가시나무 줄기(荊枝)ㆍ익모초(益母草) 줄기ㆍ도동지(桃東枝)를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서 대문을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18세기에 기록된 해남 대흥사의 『설나규식(設儺規式)』에서는 “『논어(論語)』의 향인나례(鄕人儺禮)는 방상시가 맡아 축귀하는데, 동속(東俗)에서는 혹 매귀(埋鬼)라고 말하고”라고 하여 〈매구굿〉을 〈나례〉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한국의 민간 전통으로 설명하였다. 1889년 기록된 『경상도함안군총쇄록(慶尙道咸安郡叢瑣錄)』에는 아동과 장정 수십 명이 관아에 들어와 악기를 연주하고, 거한(巨漢)이 얼굴에 탈을 쓰고 각종 재주를 벌였는데, 이를 세속의 매귀희(魅鬼戲)라고 하였다. 섣달그믐에 축귀의식으로 행하던 매귀는 조선후기부터 섣달그믐에 국한되지 않고 정월에도 연행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17세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매년 정월 보름에 각 리의 사람들이 기를 세우고 북을 치는데, 이를 매귀(埋鬼)라 한다. 나례의 유풍으로 액막이의 의미다.”라고 하여 연행 시기를 정월로 인식한다. 19세기에 기록된 『봉성문여(鳳城文餘)』에는 섣달그믐부터 정초까지 봉성문 밖에서 탈과 귀면(鬼面)을 쓴 사람과 농악대가 매귀희(魅鬼戲)를 했다고 한다. 매귀의 연행이 섣달그믐에서 정월까지 확장되면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농악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매구‧매귀가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정월의 농악을 흔히 ‘매구 친다’라고 하고, 농악대를 ‘매구꾼’이라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쇠잽이를 ‘매구쟁이’라고도 한다. 섣달그믐의 매굿은 호남지역에서 근래에까지 지속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중단되거나 소멸한 상태다. 완도나 추자도 등의 섬지역에서 일부 전승되고 있다.
매구(매굿)의 전통은 나례와 정월보름 민속이 결합되면서 근래에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시대부터 제의적 연희를 ‘매’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 나례가 들어오면서 섣달그믐이라는 시간성이 부각되고 액막이굿으로서 성격이 공고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정월 대보름의 마을굿과 결합하여 〈마당밟이(지신밟기)〉 형태로 지속된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후 섣달그믐의 액막이굿을 매귀희로 인식하는 전통이 있는가 하면, 농악으로 마을굿을 행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는 제의적 농악을 매구ㆍ매굿으로 통칭하는 전통이 동시에 존재한다. 현재 섣달그믐에 행하는 매굿의 전통은 대부분 중단되거나 소멸하였고, 마지막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곳은 호남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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