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농악, 경상남북도 농악, 골매기, 매구, 매귀, 매귀굿, 지신밟기, 걸립, 천왕메기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영남지방에서 전승되는 농악
영남농악은 경북농악과 경남농악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분류해보면, 대구ㆍ달성ㆍ군위ㆍ안동ㆍ영덕ㆍ영천ㆍ청도ㆍ경산ㆍ예천ㆍ김천 등지의 경북 일대와 마산ㆍ진주ㆍ사천ㆍ밀양ㆍ창녕ㆍ부산ㆍ김해ㆍ통영ㆍ고성 등지의 경남 일대에 전승되는 농악이다.
농악의 기원은 그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농사를 주된 생업으로 영위해 온 삼한지방(三韓地方)의 한민족(韓民族)은 풍년을 하늘에 축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할 때 가무연희(歌舞演戱)의 의례형태가 따랐고, 여기에서 농악의 시원(始原)을 찾아볼 수 있다.
○ 역사 변천 과정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마한(馬韓)에서는 항상 5월(月)로서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을 제사하는데 무리 지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날을 이어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높게 낮게 굴리고, 손발이 상응한다. … 10월에 농사를 마쳤을 때도 또한 이것을 반복한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농경신(農耕神)에 대한 축원(祝願)의 의식에서 농악의 기원을 찾아 봄직하다. 그러나 당시의 축원 가무 의식 형태가 오늘날처럼 악기가 갖추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춤을 위주로 장단을 맞추고 가장 원초적 악기로 보이는 북을 울리면서 사위를 지어 춤추는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의 쓰임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상대(上代)시대의 악기는 주로 종교적(宗敎的)인 의식(儀式)에 이용된 것이라는 설(說)이 있어 농악은 이런 시원적인 축원의식(祝願儀式)의 가무에서 비롯하여 점차 악기를 더하여 갖추게 되고, 오늘날의 농악과 같은 편성을 이루었을 것이다.
농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축원기원설, 군악기원설, 불교기원설 등의 학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는 것 같다. 그 형태의 유래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축원형태설, 노작형태설, 걸립형태설, 연예형태설 등이 있으나, 그 전개과정이나 발전과정을 구명할 길은 없다. 현존하는 농악을 개관해 보면, 위의 여러 기원설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형태가 농악에 남아서 분포하고 있다. ○ 연행시기 및 장소/용도 경상도에서는 농악을 ‘매구’, ‘매구친다’고도 하는데, 이것을 ‘매귀(埋鬼)’, ‘매귀(魅鬼)굿’이라고도 쓴다. 그런데 경상북도의 동해안과 소백산맥 기슭을 따라 마을들의 수호신, 개척신을 ‘골매기’라고 하고, 동제 때 농악을 울리는 일을 “골매기 친다”고도 한다. 대구시에서도 비산농악은 마을의 상당ㆍ중당ㆍ하당의 3당으로 된 동제당에 올리는 농악에 의한 동제를 ‘천왕메기굿’이라 한다. 이 역시 천왕신이 골매기인 셈이니 골매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제가 동신(洞神)인 ‘골매기’에 대한 진혼(鎭魂)의 기능을 한다하여 매귀(埋鬼) 한자로 표기되기도 하나, ‘매구’는 골매기와 관련지어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오늘날 농악이 마을의 오솔길이나 논바닥을 떠나서 광장이나, 미리 마련된 무대적 연희장(演戲場)에서 연행되는 경향은 판굿의 연예형태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 ‘질굿’을 치고, 마을의 큰집 마당에서 놀고, 타작마당에서 온 마을이 즐기는 판굿으로 진행되던 농악은 거두절미되어, 판굿만을 과장하여 놀게 되는 연희농악으로 변천하고 있다. ○ 음악적 특징 영남농악은 같은 영남권이면서도 경상북도 농악과 경상남도의 농악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농악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에 의해 지역적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가진다. 영남농악은 동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영동농악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며, 서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호남좌도농악과 유사해진다. 따라서 경북농악은 비교적 영동농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경북농악에서도 안동과 영주와 같은 동북지방의 농악은 영동농악의 특색이 짙고, 대구나 청도 《차산농악》과 같은 것은 비교적 경남농악에 가까우며, 김천ㆍ선산지방의 농악은 경기ㆍ충청농악과 비슷한 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경남농악은 함양ㆍ진주ㆍ삼천포ㆍ마산ㆍ통영ㆍ고성 등지의 서남지방의 농악과 밀양ㆍ울산 등지의 동북지방 농악으로 가를 수가 있다. 또한 부산ㆍ양산ㆍ진해 등지의 농악은 중간 형태로 보인다. 경상도 농악의 쇠가락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흔히 길군악(질굿), 덧배기, 덩덕궁이(정적궁), 다드래기 등이 많이 쓰인다. 길군악은 혼합박자로 되어 있으며, 덧배기, 덩덕궁이는 3소박 4박의 자진모리형 장단이다. 덧배기는 지역에 따라 굿거리형의 느린 덧배기와 자진모리형의 빠른 덧배기가 구분되어 쓰이기도 한다. 다드래기는 2소박 4박 혹은 3소박 4박의 휘모리형 장단으로 매우 빠르게 몰아치는 특징이 있다. 영남농악 가락은 한 가락만 내면 이것을 매우 빠르게 몰아나가는 경우가 많고 잔가락으로 변주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섬세하지 못하나 박진감이 넘친다. 따라서 농악가락 또한 꿋꿋하고 힘찬 특징을 보인다. 품앗이 가락과 굿거리 가락을 많이 쓰지 않고, 덧배기와 다드래기를 많이 쓰는 것과 호호딱딱을 쓰는 것도 특징이다.
영남지방은 농악에 있어서도 지리적 요인 만큼이나 다양한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같은 영남권이면서도 경상북도 농악과 경상남도의 농악은 민요에서처럼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지역은 순수한 《경상도 농악》의 느낌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경상남도 서남쪽의 농악은 전라도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경남은 전라도와 인접해 있고 또, 남쪽은 해안을 통해 전라도와의 교류가 잦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상도의 서남쪽으로 갈수록 전라 좌도굿 가락의 특징이 보이며, 경북의 동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영동농악》의 특징을 가지며, 남부의 대구, 청도지역이 《경북농악》의 특징을 지닌 곳이라 할 만하다. 《경상도 농악》의 쇠가락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흔히 길군악(질굿), 덧배기, 덩덕궁이(정적궁), 다드래기 등이 많이 쓰인다. 길군악은 혼합박자로 되어 있으며, 덧배기, 덩덕궁이는 3소박 4박의 자진모리형 장단이다. 덧배기는 지역에 따라 굿거리형의 느린 덧배기와 자진모리형의 빠른 덧배기가 구분되어 쓰이기도 한다. 다드래기는 2소박 4박 혹은 3소박 4박의 휘모리형 장단으로 매우 빠르게 몰아친다. 영남농악 가락은 한 가락만 내면 이것을 매우 빠르게 몰아나가는 경우가 많고 잔가락을 변주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섬세하지 못하나 박진감이 넘친다. 따라서 농악가락 또한 꿋꿋한 특징이 보인다. 품앗이 가락과 굿거리 가락을 많이 쓰지 않고, 덧배기와 다드래기를 많이 쓰는 것과 호호딱딱을 쓰는 것도 특징이다. 경북 금릉군의 《빗내농악》은 완전한 군대의 진법을 모의(模擬)한 군사굿이라 할만하고, 청도군의 《차산농악》은 순수한 모의 농사굿이라 볼 수 있다. 대구지역의 《비산농악》이나 《고산농악》은 축원굿에다 농사굿이 《판굿》이 되어 있으면서 지신밟기의 기능도 한다. 《욱수농악》은 축원굿에 농사굿의 요소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외따먹기〉’와 ‘〈오방진〉’과 같은 모의진법이 곁들여 있어 모의 군사굿의 요소가 두드러지고, 아울러 특이한 ‘《질굿》’은 군악의 행진곡에 방불하며, 지신밟기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아미농악》은 의례적인 축원의 형태로서 농사굿과 《지신밟기》가 복합되어 있고, 경남의 《진주ㆍ삼천포농악》은 군사굿의 진법 색채가 강하다. 이와 같이 영남의 농악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융화되어 나타난다. 정병호(1986~)는 그의 저서인 『농악』에서 영남농악은 대구, 달성, 군위, 안동, 영덕, 영천, 청도, 예천, 김천 등지의 경북 일대와 마산, 진주, 밀양, 창녕, 부산, 김해, 양산, 통영과 고성 등지의 경남 일대에 전승되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김택규 외(1997)의 『한국의 농악: 영남편』에서는 영남지역에 전승되는 농악의 양상을 다음과 같은 지역을 들어 설명하였다. 영남농악이 전승되는 지역으로 경북지역은 대구지역의 《비산농악》, 천왕매기굿, 〈날뫼북춤〉, 《고산농악》, 《욱수농악》, 《다사농악》과 《청도 차산농악》, 《금릉 빗내농악》, 《영천 명주농악》, 《문경 호계별신농악》, 《예천 통명농악》, 《선산 무을농악》 등이 있으며, 경남지역은 《부산 아미농악》, 《진주ㆍ삼천포농악》, 《함안 화천농악》, 《마산 《두레농악》》, 《창녕 이화농악》 등이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의 농악은 어느 곳이나 마을 단위로 민속관행에 밀착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었으나, 도시화, 산업화 서구화의 기운에 밀려 농악이 점차 농민의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 가는 형편이다. 그에 따라 여기에서는 영남의 모든 지역 농악을 소개하지는 못하고, 영남지역의 농악을 국가 및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에 한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 및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영남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 《진주삼천포농악》, 제11-7호 《김천금릉빗내농악》이 있고, 지방 무형문화재로는 대구 무형문화재 제1호 《고산농악》, 제2호 〈날뫼북춤〉, 제3호 《욱수농악》, 제4호 《천왕메기》, 경북 무형문화재 제4호 《청도차산농악》, 제40호 《구미무을농악》, 제41호 《경산보인농악》, 부산 무형문화재 제4호 《동래지신밟기》, 제6호 《부산농악》, 제18호 《부산고분도리걸립》, 제22호 《수영지신밟기》, 경남 무형문화재 제13호 《함안화천농악》이 있다.
《진주삼천포농악》 [晋州三千浦農樂]
[전승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와 사천시 일원]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 《진주삼천포농악》은 진주와 사천지역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우리나라 농악 분야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로 지정된 농악이다. 진주와 《삼천포농악》의 근간은 진주의 황일백 굿과 삼천포의 문백윤 굿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재 지정 이전 두 지역의 농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차수(次數)가 일관되게 12차의 차순으로 구성되었으며, 판제의 짜임 및 진풀이 대형 등이 비슷하고 덧배기와 다드래기가락 위주로 짜여져 있는 점이다. 두 지역이 가까이 있고 교류가 잦았던 점 등이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있는 요인이다. 반면 황일백의 《진주농악》과 문백윤의 《삼천포농악》 차이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진주농악》은 놀이판 형식의 짜임새를 갖춰 자유로운데 비하여, 《삼천포농악》은 일정한 형식으로 정형화되어 있어서 규칙적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승기반을 바탕으로 1966년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 ‘《농악12차》’로 진주와 《삼천포농악》이 하나로 묶여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문화재 지정명칭은 1985년 다른 지역의 농악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진주농악12차》’로, 1986년에는 ‘《진주농악》’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지역의식이 개입되면서 1993년 다시 《진주ㆍ삼천포농악》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삼천포농악》은 치배 전원이 전립을 쓰고 상모를 돌린다. 여기에는 체구가 큰 악기를 메고 매우 섬세한 가락을 연주하는 장구잽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상모놀이의 멋에 대한 애착은 열두발 길이의 상모를 낳고 최고의 기교를 열두발 상모놀이에 모아 담았다. 길다란 상모를 천천히 돌리며 꼬리 뛰어넘기, 땅짚지 않고 재주넘기, 누웠다 엎드렸다 자반뒤집기, 하늘과 땅을 이어볼까 세워 돌리기 등등, 상모 끝의 부드러운 생피지가 끝없이 돌리면서 보여주는 치배의 힘찬 동작에 따라 서슬이 시퍼런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아지랑이나 나비의 날개짓처럼 살며시 날아갈 듯 아른아른 가벼워지기도 한다. 상모를 제대로 돌리려면 각 치배들의 동작이 일사불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생피지끼리 서로 꼬여들고 남 보기에도 더욱더 혼란스럽다. 그래서 《진주삼천포농악》의 상쇠는 더욱 카리스마적인 존재가 된다. 상쇠의 쇠가락, 부포놀음, 몸놀림 하나하나에 모든 치배들이 일제히 따른다. 쇠가락은 상모돌리기에 원활하도록 빠르고 힘차고 절도있게 짜여 있다. 이러한 점들은 《진주삼천포농악》을 가장 군악적인 요소가 많고 남성적인 농악이라고 말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진주삼천포농악》은 가장 볼거리가 많은 농악이다. 단순히 씩씩하고 남성적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쇠와 장구를 위주로 아기자기하게 가락을 엮어나가는 섬세함과 여유로움은 이 농악이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서 배태되었음을 암시한다. 《진주삼천포농악》에서 비롯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벅구잽이들의 자반뒤집기와 열두발 상모놀이의 화려한 곡예는 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예농악의 최고조의 발화이다. 그것은 자신의 기예로 먹고사는 직업적인 농악수들 즉 뜬쇠들의 치열한 생존전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최고의 상모꾼들, 최고의 벅구잽이들의 집단으로 관중들의 환호를 받아내어 온 것이 바로 오늘의 《진주삼천포농악》인 것이다.
《김천금릉빗내농악》 [金泉金陵─農樂]
[전승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일원]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김천금릉빗내농악》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1984년 경상북도 시도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경상북도 시도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6대 상쇠 김홍만(1922~1988, 1984년 지정)이 초대 예능보유자에 지정되었고, 7대 상쇠 한기식(1931~2010, 1990년 지정)이 2대 예능보유자에 8대 상쇠인 손영만(1964~?)이 3대 예능보유자(2012)로 지정되었으나, 국가무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현재는 예능보유자 지정 없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단체로 지정이 변경되었다. 《빗내농악》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 중앙에 위치하는 중심부 농악으로 경상도 내륙지방의 전형적인 농악이며, 《빗내농악》의 구성방식을 본다면 군사훈련을 형상화한 진법과 진풀이가 다수 편성되어 군악(軍樂)적인 요소가 강하다. 큰북은 북채 두 개를 양 손에 들고 치는데, 이처럼 왼손 또드락채14의 사용은 절에서 법고를 칠 때 채를 두 개씩 쓰면서 테두리를 두드리는 연주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전라남도 진도의 북춤과 채를 두 개 쓰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북의 크기와 그 연행에 있어 방식과 기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빗내농악보존회에서는 《빗내농악》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김천시 개령면 빗내길 118(개령면 광천리 519)에 전수회관(2003년 11월 개관)을 마련해 두고 있다.
14) 북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드락’하고 소리가 나기 때문에 주로 북통을 두드리는 왼손의 채를 ‘또드락채’라고 부른다.
《청도차산농악》 [清道車山農樂]
[전승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일원] 1980년 12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청도차산농악》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이다. 초대 예능보유자인 김오동(1918~2002) 상쇠가 2002년 작고한 이후 오래도록 예능보유자 자리가 공석으로 있으면서 김태훈(1968~?) 상쇠가 《청도차산농악》의 전승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2017년 비로소 김태훈 상쇠가 두 번째 예능보유자에 지정되었다. 지리적으로 경북과 경남의 경계에 위치한 청도군 차산리는 예부터 정초가 되면 풍각면 내의 여러 마을은 물론 고개 넘어 창녕군의 여러 마을과도 화려한 천왕기 싸움을 펼쳐왔다고 전한다. 천왕기 싸움은 길이 6~8m에 달하는 크기의 여러 가지 색으로 단장된 천왕기를 앞세우고 정월초 풍각 장날 장터에서 마을의 농악대가 서로 마을의 위세를 자랑하며 즐겼던 놀이인데, 《차산농악》은 바로 이 천왕기 싸움에서 발전한 농악이다. 《청도차산농악》은 농악놀이에 춤과 민요가 삽입되어 있는데, 경상도 악무의 특징인 빠르고 흥겨운 굿거리장단에 덧뵈기춤이 일품이다. 가락은 12가지의 변화를 가지는 놀이에 36종류의 장단이 있다하여 ‘12가락 36마치’라고 칭하며, 《판굿》의 각거리는 쇠가락에 따라 여러 진법이 연차적으로 전개된다. 또한 농사굿을 노래와 함께 펼치고 있다는 점도 한 가지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은 꿋꿋하고 향토적인 예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며, 《경북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미무을농악》 [龜尾舞乙農樂]
[전승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일원] 201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구미무을농악》은 구미시 무을면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이다. 대부분의 민속학자들은 《무을농악》을 구미(선산), 금릉(김천) 일대에서 전승된 농악들의 조상격으로 평가한다. 《무을농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정재진으로 삼송리 수다사 승려인데, 농악가락을 인근 부락으로 전파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쇠가락 전승만으로 오늘날의 《무을농악》이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2대 상쇠로 알려진 이군선(1867~?)과의 사이에 수많은 상쇠가 있었다는 구술자료로 보아, 현재 전승되는 《무을농악》은 마을의 여러 가지 다면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구미 을농악은 무을 지역에 상면농악단과 하면농악단 등 2개의 풍물단이 있을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가, 1994년 무을 지역에서 농악을 하는 사람들이 재조직한 것이 현재의 《구미무을농악》이다. 《구미무을농악》은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문화부장관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무을풍물보존회를 조직하고 매년 정기적인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을농악》은 현재 예능보유자 없는 문화재 단체로 지정되어 2016년부터 10대 상쇠 박희선(1966~)이 농악단을 이끌고 있다.
《경산보인농악》 [慶山甫仁農樂]
[전승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일원] 201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경산보인농악》(이하 《보인농악》)은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보인 1리에서 전승되는 농악이다. 이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 보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1914년 부ㆍ군 통폐합으로 경산군 진량면 보인동이 되었다. 《보인농악》의 형성 배경요인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는데, 첫째,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낼 때 〈대내림〉을 하고 동제를 지낸 다음 보름날 지신밟기를 하던 전통과 둘째, 7월 백중 무렵 논매기 후 농군들이 모여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풋구’15행사 및 세 벌 논매기 후의 ‘호미걸이’ 등의 놀이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보인농악》은 경상북도 남부지방에 보이는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덩덕궁 가락의 섬세함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 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보인농악》은 농사와 관련된 흙, 물, 밭, 고무래 등을 글자새기기를 통해 잘 풀어냈다. 《보인농악》은 현행하는 농악판에서 농사풀이를 잘 표현하고 《《두레농악》》의 전형을 유지하며 전승되어온 전형적인 농사굿이다. 《보인농악》은 새마을운동과 산업화 등으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명맥만 이어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경산보인농악》보존회를 결성해 단절될 위기에 놓인 《보인농악》을 복원할 수 있었다. 《경산보인농악》는 예능보유자 없는 문화재 단체 지정으로 현재는 5대 상쇠인 김대근(1963~)이 《보인농악》의 전승을 책임지고 있다.
15) ‘풋구’는 안동 인근 지역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문경에서는 ‘호미씻이’라 부르고, 구미 선산 지역에서는 이를 ‘꼼비기’라 부른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이러한 풍속은 밀양, 구미, 선산을 비롯한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고산농악》 [孤山農樂]
[전승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 일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고산농악》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구, 내환동)에 전승되는 농악으로, 이 지역은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에 속하였으나 도시확산으로 1981년 대구시에 편입된 곳이다. 《고산농악》은 1984년 대구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 지정 당시 《고산농악》의 상쇠이던 장이만(1920~1983)이 작고하여 예능보유자가 공석으로 있다가, 1995년 5월 정창화(1924~2015)가 《고산농악》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상쇠 정창화가 작고함으로 현재 《고산농악》의 예능보유자는 공석으로, 정창화 상쇠를 이어받아 류잠발(1960~)이 전수교육조교 및 상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황선우(1962~) 《고산농악》보존회 단장이 전수교육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고산농악》은 마을 개척시기부터 해마다 정월 대보름 마을제사를 지내는 한 과정으로 행해져온 것이라 전해진다. 농악의 과정은 농기를 앞세우고 상쇠를 선두로 징ㆍ북ㆍ장구ㆍ상모ㆍ잡색이 농악이 행해질 곳으로 향하는 길매구, 상쇠의 지휘에 따라 가볍게 뛰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다가 태극무늬를 만들며 시계방향으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상쇠의 지휘에 따라 뒤돌아가기와 두 개의 동심원을 그리는 둘석, 상쇠의 가락에 따라 원을 돌며 각자 춤을 추는 춤굿, 상모를 쓴 사람들이 원 가운데에서 서로 손을 잡고 작은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농기를 중간에 두고 원을 돌면서 좁혀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 나오는 멍석말이, 원이 풀어지면서 징ㆍ북ㆍ장구가 한 줄로 서고 상모 1명이 중앙에 마주보고 서서 쇠를 치는 모내기굿, 상모ㆍ장구ㆍ북ㆍ징의 순서로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원 가운데에 나와 놀이를 하는 법고놀이로 진행된다. 《고산농악》은 《걸립농악》보다 《두레농악》에 가까우며 개개인의 기량보다 전체 농악패들이 무리 지어 연행하는 군무의 성격을 띤다. 특히 커다란 흰색 고깔의 사용과 관악기 중에는 향토악기인 ‘띵각’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연행과정의 ‘이열 놀이’와 ‘닭쫓기 놀이’는 이 마을만의 특징적인 놀이마당이라 할 수 있다.
〈날뫼북춤〉 [飛山─]
[전승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일원] 대구지역의 《비산농악》에서 특화되어 1984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날뫼북춤〉은 대구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는 북춤으로, 연행과정이 총 12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산동 지명의 정확한 유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산 모양의 구름이 날아오다 어느 여인의 비명 소리에 놀라 땅에 떨어져서 동산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飛山)’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춤의 기원은 옛날 지방관리가 순직했을 때 백성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봄ㆍ가을에 북을 치며 춤을 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날뫼북춤〉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민속춤으로 북만 가지고 추는 북춤이다. 일반적으로 〈날뫼북춤〉의 구성 인원은 열다섯 명이며, 모두 흰 바지저고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옛날 전투복인 감색 쾌자(快子)를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다. 연행과정은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가락에 맞추어 춤을 춘다. 〈날뫼북춤〉은 초대 예능보유자 김수배(1926~2006, 1984년 지정)의 작고 이후, 현재는 윤종곤(1962~)이 2010년 2대 예능보유자에 지정되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욱수농악》 [旭水農樂
[전승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일원] 《욱수농악》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1988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욱수동은 《고산농악》의 발생지 ‘대흥동’과 마찬가지로 1981년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 소속에서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욱수동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의 동제 때에 마을의 제당에서 신내림을 축원하는 《천왕받이굿》을 벌였고, 이 내림굿의 일환으로 《판굿》을 쳤다고 한다. 또한 정월 보름에는 걸립을 위한 지신밟기와 달불놀이 때의 마당놀이에서 농악을 쳤다. 1970년대 도시화 되는 과정에서 동제는 중단되었고 달불놀이는 입산 금지 이후 없어졌으나 《판굿》과 지신밟기는 1963년에 조직된 친목계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판굿》의 주요한 연행과정은 살풀이, 둥글레미, 외따기놀이, 호호굿 등이 있으며 이중 특히 ‘외따기놀이’는 《욱수농악》에서만 볼 수 있는 놀이이다. 외따기는 참외따기의 줄임말로 참외를 서리하던 농촌 정경을 농악놀이화 한 독특한 연행이 특징이다. 《욱수농악》은 경상북도와 대구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지역 농악의 특징이 같이 엿보이며, 단순하면서도 박력 있는 경상도 특유의 특성과 정교한 쇠가락이 같이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욱수농악》의 초대 예능보유자인 김호성(1929~2006, 1989년 지정)은 상쇠로서의 실력이 뛰어나 1987년 민속예술경연대회 때 《욱수농악》의 상쇠로 참가하여 입상하였다. 《욱수농악》의 현 상쇠 손석철(1968~?)은 2002년에 《욱수농악》에 입단하여 2003년부터 현재까지 《욱수농악》의 단장 및 상쇠로서 활동하였으며, 2019년 《욱수농악》의 2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경북대학교 동아리 농악반 시절 농악을 접하면서 《욱수농악》, 《고산농악》에 참여하였으며 김호성(《욱수농악》 전 상쇠), 장이만(《고산농악》 전 상쇠) 등에게 쇠가락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욱수농악》과 《고산농악》은 그 소재지가 인접할 뿐만 아니라, 두 농악 상호간에 주요 활동 상쇠의 교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왕메기》 [天王─]
[전승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일원] 1989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천왕메기》는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일대 주민들이 천왕당에서 매년 정월대보름 날에 해 오는 ‘〈지신풀이〉’에서 유래하였다. 《천왕메기》의 대표적인 전승자로는 상쇠 임문구(1916~1990)와 설북16 김수배(1926~2006)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천왕메기굿》이 파생한 것으로 보이는 ‘《비산농악》’과 ‘〈날뫼북춤〉’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날뫼북춤〉과 제4호 《천왕메기》는 그 연원의 뿌리를 ‘《비산농악》’에 두고 있다. 《비산농악》의 상쇠 임문구는 비산동 토박이로 이 마을의 최봉수(1905~1976)를 따라 다니며 종쇠17를 쳤고, 그에게 쇠가락을 전수받았다고 하며, 쇠가락은 모두 12채인데 임문구는 이 가락을 모두 쳤으며, 특히 잔가락을 많이 구사했다고 한다. 그가 작고한 뒤 《비산농악》의 쇠가락은 김수기(1940~?)에게 전수되고 있다. 김수기는 49세가 되던 1989년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비산 《천왕메기》의 초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대구 비산농악단 제3대 상쇠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날뫼북춤〉과 제4호 《천왕메기》는 그 연원의 뿌리를 ‘《비산농악》’에 두고 있다. 《비산농악》의 상쇠 임문구는 비산동 토박이로 이 마을의 최봉수(1905~1976)를 따라 다니며 종쇠 ‘종쇠’는 보통 ‘끝쇠’를 말한다. 임문구의 활동 당시 쇠 치배 구성은 2인이 보통인지라, 당시 ‘종쇠’는 ‘끝쇠’인 동시에, ‘부쇠’(2번째 쇠 치배)이고 곧 다음 상쇠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뜻하였다. 를 쳤고, 그에게 쇠가락을 전수받았다고 하며, 쇠가락은 모두 12채인데 임문구는 이 가락을 모두 쳤으며, 특히 잔가락을 많이 구사했다고 한다. 그가 작고한 뒤 《비산농악》의 쇠가락은 김수기(1940~)에게 전수되고 있다. 김수기는 49세가 되던 1989년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비산 《천왕메기》의 초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대구 비산농악단 제3대 상쇠로 활동하고 있다. 비산동 일대에는 기천왕, 중천왕, 말천왕 등 세 개의 동제당이 있었다. 원래 정초에 〈대내림〉으로 제관과 독축관을 정하고 정월 보름에 천왕제를 지냈다. 이때 사당 앞에까지 가면서 《질굿》을 치고, 사당문 앞에서 《문굿》을 치며, 사당에 들어가서는 유교식으로 헌작(獻爵)을 하며 축문을 읽고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천왕메기》로 들어가 〈지신풀이〉를 계속하였다. 보통의 지신밟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이루어지는데 비산동 《천왕메기》는 사당의 앞 마당에서 흥겨운 가무로 《판굿》을 벌이고 난 다음에 끝을 맺는 마을굿의 특징을 띠고 있다. 《천왕메기굿》은 현재 《질굿》, 《문굿》, 〈대내림〉(천왕제)〉, 〈고사독축〉, 《천왕메기》(〈지신풀이〉), 《천왕굿》, 〈천왕놀이〉, 〈질굿(마을굿)〉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질굿》ㆍ〈대내림〉ㆍ《천왕굿》, 〈천왕놀이〉는 농악, 《문굿》ㆍ《천왕메기》는 〈지신풀이〉, 〈고사 독축〉은 유교식 제의이다. 현재 《천왕메기굿》의 연행자는 약 50명으로 축관, 징, 북, 장구, 기수, 소고, 대감, 각시, 포수, 대잡이, 태평소 등을 담당하고 있다. 《질굿》은 마을의 모든 패랭이패가 당제를 모시는 천왕당 문 앞에까지 이동하면서 치는 굿이다. 《질굿》은 당제를 드린다는 것을 온 마을에 알리는 기능도 한다. 《문굿》은 패랭이패가 천왕당 앞문에 도착하여 짧게 흥을 돋운 후 《문굿》 사설로써 모든 부정한 액과 살을 물리치고 한 해의 만복을 기원하는 과정이다. 〈대내림〉은 천왕당 문 앞에서 신을 내리는 과정이며, 신이 내린 대가 제관과 축관을 선택하면, 제관과 축관이 제를 지내는 〈고사 독축〉을 한다. 《천왕메기굿》은 천왕에 대한 〈지신풀이〉로서, 마을의 액을 쫓고 복을 비는 굿이다. 《천왕굿》은 〈지신풀이〉 후에 천왕당 앞에서 벌어지는 굿판이다. 〈천왕놀이〉는 천왕당 둘레를 돌면서 노는 《판굿》이다. 기천왕에서는 다드래기로 끝나고, 중천왕에서는 2채에서 12채까지의 다양한 가락으로 덧배기 들놀이를 비롯한 굿판이 벌어진다. 말천왕에서는 모든 패랭이패가 한판 굿을 한다. 《질굿》은 삼천왕에 대한 굿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노는 마을굿이다. 이때는 정적궁이, 엎어빼기, 다드레기 등 《천왕메기굿》의 모든 가락이 동원된다.
《동래지신밟기》 [東萊地神─]
[전승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원]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마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굿으로 1977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지신밟기는 옛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주로 정초에 행하던 것으로서 그 규모와 내용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민간 신앙적 마을굿이다. 동래지역에서는 ‘걸립’ 또는 ‘지신밟기한다’, ‘덕뵈기친다’ 등으로 부르고 있음을 보면, 이른바 제의적 성격의 농악이라 할 수 있다. 마을과 가정의 벽사초복(辟邪招福)을 목적으로 하는 안택축원적 제의의 하나이다. 음력 섣달 중에 악기ㆍ의상ㆍ도구 등을 준비하여, 이듬해 정월 초 2, 3일경부터 시작하여 대보름 전에 마친다. 현재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동래지신밟기》의 특징은 그 복식에 있어서, 일반적 농악대가 착용하는 채복(彩服)이 아니라, 주로 바지와 저고리에 쾌자 또는 두루마기를 입으며, 채복 띠를 두르지 않고 머리에는 농악대의 전립 대신 고깔을 쓴다. 그것들은 한량들의 풍채를 본뜬 것이다. 더구나, 〈풍물놀이〉나 〈버꾸놀이(법고놀이)〉 보다는 춤을 위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기수ㆍ사대부ㆍ팔대부ㆍ김생원 내외ㆍ촌로ㆍ촌녀ㆍ포수ㆍ하동ㆍ각시(탈을 씀.)ㆍ큰어미ㆍ꼴머슴 등이고, 악기는 꽹과리ㆍ징ㆍ장고ㆍ북ㆍ소고ㆍ호적 등이다.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주산 지신풀이〉 : 주산신께 지신밟기함을 고하여 신력을 얻는 굿이다. ② 〈당산 지신밟기〉 : 주산에 이어 농악대들이 자진모리장단을 울리면 잡색들은 허튼춤을 추며 〈당산풀이〉를 한다. ③ 〈우물 지신풀이〉 : 마을의 공동우물에 가서 지신을 푼다. ④ 〈가정집 지신풀이〉 : 〈우물 지신풀이〉를 마치고 “×선생댁으로 갑시다.” 하며 그곳으로 향한다. 맨 먼저 마당풀이로 시작하여, 〈대청놀이〉, 〈큰방〉ㆍ《성주풀이》, 〈각방 치장풀이〉, 〈조왕ㆍ샘ㆍ장독ㆍ도장(곳간)ㆍ마구간ㆍ뒷간ㆍ삽짝 지신풀이〉를 하고 주신(酒神)풀이로 마친다.
《부산농악》 [釜山農樂]
[전승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일원]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峨嵋洞)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으로, 1980년 2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부산농악》의 발단은 해방 후부터 1950년 사이의 유삼용(柳三龍)의 ‘《곱은돌이농악》’이며, 이를 기초로 1953년 정초에 ‘아미농악단’이 창단되었다. 아미농악은 제21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를 비롯해 여러 대회에서 입상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부산농악》의 특징으로는 집돌이 《걸립농악》을 바탕으로 하는 점, 지신밟기에 앞서 당산굿을 치면서 모듬굿과 기제(旗祭)를 지내는 점, 집돌이 때의 지신밟기 문서가 다양하게 발달한 점, 《판굿》의 연극적 농사굿과 북춤이 돋보이는 점, 버꾸놀음의 기능이 뛰어난 점 등이 꼽힌다. 굿꾼은 기수 3(농기 1, 영기 2), 꽹과리 4(상쇠, 부쇠, 종쇠, 끝쇠), 징 2(수징, 부징), 대북 4(수대북, 부대북, 종대북, 끝대북), 장구 4(수장구, 부장구, 종장구, 끝장구), 버꾸 8, 소고 8, 쇄납 1, 가장 4(양반 광대, 포수, 각시, 화동)로 편성된다. 쇠가락에는 길굿ㆍ다드래기ㆍ사방굿ㆍ덧뵈기(늦은 삼채)ㆍ빠른 덧뵈기(자진 삼채)ㆍ마침굿가락ㆍ빠른 마침굿가락ㆍ마당굿가락ㆍ자진 마당굿가락이 있다. 지신밟기를 할 때는 먼저 당산굿(앞뜰에 기를 세우고 젯상을 차린 다음 굿꾼들을 모으기 위한 모듬굿을 침. 기제ㆍ길굿을 치면서 당산으로 가 2열 횡대로 서서 당을 향해 세 번 절한 다음 제자리에서 동서남북으로 절하고 지신밟기를 행함을 고함)을 치고 공동 우물에 도착해 샘굿을 친 후 집돌이에 들어간다. 지신은 《문굿》ㆍ《성주굿》ㆍ《조왕굿》ㆍ《장독굿》ㆍ《용왕굿》ㆍ《정랑굿(변소)》ㆍ《점방굿》 순서로 밟는다. 《판굿》은 《모듬굿》ㆍ《길굿》ㆍ《인사굿》ㆍ《맞춤굿》ㆍ《문굿》ㆍ〈오방진〉ㆍ《승전굿》ㆍ《마당굿》ㆍ〈영산다드래기〉ㆍ《호호굿》ㆍ《우물굿》ㆍ농사굿ㆍ‘ㄷ’자 대열의 《풍년굿》ㆍ〈소고놀음〉ㆍ개인놀이(쇠꾼의 상모놀이-버꾸놀음-장구춤-대북춤-열두발 상모 돌리기)로 구성된다.
《부산고분도리걸립》 [釜山─乞粒]
[전승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일원] 《부산고분도리걸립》은 서구 서대신동 일대의 옛 지명인 ‘고분도리’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걸립(乞粒)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정초에 나쁜 일은 물리치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제액초복(除厄招福) 또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기원했던 지신밟기 형태의 농악이다. 복을 빌어 준 대가로 쌀이나 돈을 조금씩 받았기 때문에 《걸립굿》이라 부르기도 한다. 1860년 무렵에 세워진 대신동 지역의 당산인 ‘시약산 당산’에서 ‘시약산 산제당제’를 지내는 것을 감안한다면 《부산고분도리걸립》은 약 1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민속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3월 26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보존 단체는 부산구덕민속예술보존협회이며, 예능보유자로는 상쇠와 풀이에 정우수가, 악사[장구]에 강정수가 각각 지정되었다. 《부산고분도리걸립》은 주로 음력 초사흘부터 대보름까지 행하였는데, 농악대는 기수, 악사, 잡색 등 3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걸립의 순서는 먼저 당산에 가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축원하는 의미로 당산에 고하는 당산굿을 행하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샘물이 끊이지 않고 풍족하게 솟아달라는 《우물굿》을 행한다. 그 뒤 각 가정을 방문하여 〈대문굿〉, 《성주풀이》, 《조왕굿》, 《장독굿》, 《곳간굿》, 《정낭굿》, 《마굿간굿》 등의 여러 신에게 가정의 안택과 풍요를 기원하는 벽사진경의 굿놀이를 행하고, 그 다음에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린 뒤, 《판굿》에서 한바탕 춤놀이를 펼치는 것으로 전 과정을 마친다. 《부산고분도리걸립》은 「성주풀이」 사설의 세밀한 구성, 다른 지역에는 없는 용왕굿 과장의 삽입, 버꾸놀이 연희의 음악적 다양성 등 다른 지역의 걸립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대 최고의 농악꾼이었던 유삼룡, 이명철, 정상렬 등에 의하여 구성된 연희로 음악적 구성과 사설의 짜임이 대단히 뛰어나며, 지금도 부산광역시 서구 지역 일원에서 실제로 정초에 걸립을 행하고 있는 살아 있는 전통 민속문화이다.
《수영지신밟기》 [水营地神─]
[전승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일원] 부산광역시 수영 지역에서 정초에 가가호호 방문하여 지신을 밟아주던 걸립 형식의 민속놀이로, 2014년 1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은 좌수영(左水營)의 준말로, 조선 선조 때에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자리 잡고 있어서 붙여졌다. 현재는 부산 수영구의 수영동ㆍ망미동ㆍ민락동ㆍ광안동 일대를 지칭한다. 수영 지역 사람들은 풍농을 기원하는 의식과 그에 따른 놀이를 즐겨 왔다. 농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지신밟기의 풍물은 농사를 지을 때는 물론, 집터를 다질 때나 마을의 잔치 또는 세시에 마을의 안녕과 잡귀를 쫓는 의례로서의 기능도 했다. 《수영 지신밟기》는 음력 정월 초사흘에서 나흘경부터 열흘 가량 ‘야류계’가 주동이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걸립 형식으로 행해졌다. 마을 주민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빌어 주는 것과 함께 곡식과 돈을 거둬 정월 대보름에 놀았던 《수영 야류》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지신밟기는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수영 지신밟기》의 시작은 《수영 야류》의 형성 시기와 경비 조달을 위해 놀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250∼3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수영 지신밟기》는 단순한 걸립의 목적뿐만 아니라 《수영 야류》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행해졌지만, 현재는 독립적으로 연행되고 있다. 《수영 지신밟기》는 마을과 각 가정의 안녕,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적 놀이로 전해 왔다. 특히 걸립의 목적뿐만 아니라 《수영 야류》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놀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신밟기 가운데 마지막 절차인 ‘기소각제’는 기를 태우면서 액을 불사르는 의미로 이루어졌다. 또한 《수영 지신밟기》의 농악 장단은 다른 지역보다 더 느리다는 특징이 있으며, 수영 지역 특유의 덧배기춤과 어우러지는 토속적인 장단이라 할 수 있다.
《함안화천농악》 [咸安化川農樂]
[전승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일원] 《함안화천농악》은 경남 함안군 칠북면 화천리에서 전해오는 농악으로, 1991년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함안화천농악》은 지신밟기와 풍농굿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두레농악》의 성격이 강하다. 칠북면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칠제현이라 개안하고 의안군(지금의 창원시, 의창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건국 초에 칠원현이라 개명하였으며, 현종 때는 일시 김해부에 영속시켰으며, 공양왕 때 이곳에 현무를 두었다. 조선 건국 후 현무를 없애고 현감을 두어 구산진(마산시)을 영현으로 주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안군에 편입되었다. 칠원현은 칠토, 칠제, 칠원, 구성, 무릉 등으로 불리어 왔다. 함안은 아라가야의 유서 깊은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고장으로 평야가 비옥하고 광활하여 농산물이 풍부하였으며 구산현을 포함하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하였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기에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화천마을은 광려천이 가로질러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큰 고목을 서낭나무로 받들어 할배당산과 할매당산(각 수양버드나무)에 해마다 9월 그믐날 12시에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 10월 초하루에는 동민이 모여 지성으로 대제를 올리고 풍물을 울렸다. 연중 정월 초삼일은 마을의 집집마다 지신밟기 매구를 친다. 지신밟기 매구를 칠때는 흥이 많은 마을 장정남녀들이 사대부, 팔대부, 포수 등으로 가장하여 꾸미고 논다. 오월 단오에도 농악으로 하루를 즐겼으며,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쓴 농기를 앞세우고 있다. 백중이면 농군들이 제각기 형편에 맞게 술과 안주를 가져와 능수버들 숲 그늘에 촌로들을 모시고 정성껏 대접한 다음, 남녀노소 농악으로 하루를 즐겼다. 섣달 보름날 역시 서낭나무 주위에서 농악을 울리며 밤이 깊도록 한바탕 노는데 이는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지금도 음력10월 초하루 자시에 유사 1명과 집사들의 도움으로 동신제를 올리고 마을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제물로 사용한 말린 해삼을 제사가 끝나면 묻는 전통이 지속되고 있다.
경상도에서는 농악을 ‘매구’, ‘매구친다’고 하는데, 이것을 ‘매귀(埋鬼)’, ‘매귀(魅鬼)굿’이라고도 쓴다. 영남농악의 내용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지신밟기와 같은 마을굿이 성행한 흔적이 여러 지역의 농악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경북농악은 당산제굿 보다는 지신밟기만 하는 굿이 있으나, 경남농악은 당산굿이 있는 가운데 지신밟기를 한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 영남농악은 고형(故形)의 농악인 지신밟기와 같은 축원농악(祝願農樂)이 잘 계승되어 있으면서, 때로는 완전한 군대의 진법을 모의한 군사굿이라 할 만한 것도 있고, 순수한 모의 농사굿의 특징도 나타난다. 경북 금릉군의 《빗내농악》은 완전한 군대의 진법을 모의(模擬)한 군사굿이라 할만하고, 청도군의 《차산농악》은 순수한 모의 농사굿이라 볼 수 있다. 대구지역의 《비산농악》이나 《고산농악》은 축원굿에다 농사굿이 판굿이 되어 있으면서 지신밟기의 기능도 한다. 《욱수농악》은 축원굿에 농사굿의 요소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외따먹기’와 ‘오방진’과 같은 모의진법이 곁들여 있어 모의 군사굿의 요소가 두드러지고, 아울러 특이한 ‘질굿’은 군악의 행진곡에 방불하며, 지신밟기도 행하고 있다. 《부산아미농악》은 의례적인 축원의 형태로서 농사굿과 지신밟기가 복합되어 있고, 경남의 《진주삼천포농악》은 군사굿의 진법 색채가 강하다. 이와 같이 영남의 농악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융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분류 | 번호 | 종목 | 소재지 | 지정일 |
국가 무형문화재 | 제11-1호 | 《진주삼천포농악》 | 경상남도 사천시 | 1966.06.29. |
제11-7호 | 《김천금릉빗내농악》 | 경상북도 김천시 | 2019.09.02. | |
대구 무형문화재 | 제1호 | 《고산농악》 | 대구광역시 수성구 | 1984.07.25. |
제2호 | 〈날뫼북춤〉 | 대구광역시 서구 | 1984.07.25. | |
제3호 | 《욱수농악》 | 대구광역시 수성구 | 1988.05.30. | |
제4호 | 《천왕메기》 | 대구광역시 서구 | 1989.06.15. | |
경북 무형문화재 | 제4호 | 《청도차산농악》 | 경상북도 청도군 | 1980.12.30. |
제40호 | 구미 《무을농악》 | 경상북도 구미시 | 2017.01.05. | |
제41호 | 경산 《보인농악》 | 경상북도 경산시 | 2017.01.05. | |
부산 무형문화재 | 제4호 | 〈동래지신밟기〉 | 부산광역시 동래구 | 1977.12.13. |
제6호 | 《부산농악》 | 부산광역시 서구 | 1980.02.12. | |
제18호 | 《부산고분도리걸립》 | 부산광역시 서구 | 2011.03.26. | |
제22호 | 《수영지신밟기》 | 부산광역시 수영구 | 2014.01.01. | |
경남 무형문화재 | 제13호 | 함안 화천농악 | 경상남도 함안군 | 1991.12.23. |
경상남도ㆍ경남발전연구원, 『경남의 무형문화재 국가지정ㆍ경상남도지정』, 민속원, 2013. 김택규 외, 『한국의 농악: 영남편』, 수서원, 1997. 김헌선, 『금릉빗내농악: 진굿의 전통과 혁신』, 민속원, 2016. 김현숙,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 진주삼천포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대구광역시, 『대구수성지역 무형문화재의 원형보존연구』, 수성문화원, 2017. 문화재연구소,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 부산광역시, 『부산의 문화재』, 부산광역시, 1982.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경북예악지(慶北禮樂誌)』, 경상북도, 1989.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대구(大邱)의 예악(禮樂)』, 대구직할시, 1988. 정병호, 『농악(農樂)』, 열화당, 1986.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한국(韓國)의 농악(農樂): 호남편』,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4. 정모희, 「대구ㆍ경북농악의 음악적 연구」,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정모희(鄭牟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