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고, 금고, 군기, 걸군
서남해 지역에서 농악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 조선시대 군대(軍隊)와 농악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 명칭
서남해지역에서는 농악을 임진왜란이나 군대훈련과 관련된 유래로 인식하여 ‘군고’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군고 이외에도 군사적 관련성을 강조한 금고, 궁고, 군기, 걸군 등의 명칭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농악 권역을 군고문화권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서남해안 군고문화권에서는 농악의 절차를 군대훈련처럼 작성한 문서들이 전하고, 농악의 절차 속에도 명령을 외치는 청령이 발달해 있다.
서남해 지역에서는 농악을 군고ㆍ금고ㆍ군기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임진왜란 때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쳤다거나 군인들이 농악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전쟁 훈련을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농악을 군고라고 부르는 지역은 해남, 진도, 완도, 신안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해남지역에서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가 승병들을 훈련시키면서 진법을 익히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활용했다고 하고, 진도지역에서는 민간의 의병들이 농악으로 적진을 탐색하고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인근 완도나 신안을 비롯한 서남해에서도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과 임진왜란을 군고의 유래로 설명하는 곳이 많다. 그리고 해남 대흥사의 〈절걸립〉 관련 문서로 1800년대에 작성된 『설나규식』이 전하는데, 본문에 “금고(金鼓)의 출입이 오로지 우스게짓이라 승려가 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중략) 진법(陣法)을 본받아 읍(揖)ㆍ양(讓)ㆍ진(進)ㆍ퇴(退)하니, 사람들이 보아 본받을 만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농악이 군대의 영향을 받아 격식을 갖추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서남해지역에서 군고와 함께 금고, 군기라는 명칭도 함께 사용된다. ‘군고’는 해남과 진도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금고’는 서남해안지역에 넓게 분포하며, ‘군기’는 완도 일부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용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지역에 따라 세 가지 명칭을 병용하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서남해안 일대에서 농악이나 풍물과 변별되는 명칭으로 이들 용어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중심지에서 군고(軍鼓)라는 용어가 강하게 전승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권역화하여 ‘군고문화권’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군고, 금고, 군기 등의 명칭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면에서 각각의 용례는 차이가 있다. 문헌 기록에서 군대의 악기 연주로서 군고(軍鼓)라는 용어는 찾기 어렵고, 금고(金鼓)는 용례가 다양하여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금고(金鼓)는 궁궐과 군영, 관아 등에서 취타대의 타악기 연주를 지칭하고,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반자(飯子), 금구(金口) 등과 동의어이면서 〈절매구〉나 〈절걸립〉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기의 경우 군대의 군기(軍器)와 관련시킬 수 있지만 군영의 군기는 금고를 포함한 병장기 전체를 총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악기나 악대 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인 면이나 분포권을 고려하면 서남해안지역의 농악은 취타대의 ‘금고’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의 공식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군사적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군(軍)’자를 끌어들인 점에서 군고(軍鼓) 명칭은 상징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연행 시기와 장소 군고는 주로 정월 마을굿과 기금을 모금하는 걸립굿으로 연행된다. 서남해안지역은 설날이나 정초, 정월 대보름에 마을굿과 걸립굿을 연행한다. 마을 내에서 연행할 때는 마을신이 거처한 당ㆍ우물ㆍ선창 등에서 먼저 군고를 치고, 여러 날에 걸쳐 가가호호를 돌며 〈마당밟이〉를 한 후 마지막 날에 의례를 마치는 의미로 〈판굿〉을 친다. 이때 〈판굿〉은 지역에 따라 〈밤굿〉ㆍ〈파제굿〉ㆍ〈파방굿〉 등으로 부른다.
군고는 마을 단위로 전승되기 때문에 하나의 절차로 설명할 수 없다. 대부분 일반적인 마을 농악으로서 〈당굿〉과 〈우물굿〉, 〈선창굿〉, 〈마당밟이〉, 〈판굿〉 등으로 구성된다. 다만, 해남과 진도지역에 군고의 연행 절차를 기록한 문서가 남아 있어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군고청령급진법(軍鼓聽令及陣法)』 ㉮ 일반 청령(一般 聽令) : 각 치배들을 소집시켜 군기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 본리(本里)에서 타처(他處)로 출행당산령(出行堂散令) : 걸립 갈 때 먼저 당산에 무사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다. ㉰ 타리(他里)로 입시(入時) 당산령(堂散令) : 걸립을 받아들이는 마을에 문안인사를 하는 것이다. ㉱ 석반시(夕飯時) 청령(聽令) : 저녁밥을 먹을 때의 청령이다. ㉲ 석반후(夕飯後) 청령(聽令) : 식사 후 집합시키는 청령이다. ㉳ 포적시(捕賊時) 각항(各項) 진법(陣法) : 영기로 문을 세우고 도둑잽이굿 형태의 놀이를 하고 아공청령법(我功聽令法) 등을 한 후 풍노굿과 승전굿을 친다는 내용이다. ㉴ 휴식시(休息時) 청령(聽令) : 휴식 후의 집결할 때의 청령이다. ㉵ 야심후(夜深後) 각(各)귀 숙소시(宿所時) 청령(聽令) : 각기 처소에 들어가게 하는 청령이다. ㉶ 기동리(其洞里)에서 떠나갈 제 당산령(堂散令) : 마을에 감사의 인사를 하는 내용이다. ㉷ 각항잡부법(各項雜部法) : 도둑잽이, 승전고 등을 마친 후 허허굿과 다양한 잡색놀이, 풋굿, 영산굿 등등을 치고 해산한다는 내용이다. 『군고청령급진법』은 해남의 박정규(朴晶圭)가 1950년대를 전후하여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해남 황산면 옥연리에 살던 제자 김수영(호적명: 김영수)이 1964년에 내용을 풀어서 『농악대상식서』를 작성하였고, 진도에 살던 박복남이 두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 문서는 타 마을로 걸립 갈 때 연행하는 절차를 기술한 것으로, 각각의 상황마다 군대의 규율처럼 명령을 하고 관련 절차를 수행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제39호로 지정된 진도의 《소포 걸군농악》에도 걸립굿 절차와 관련된 문서가 전한다. 진도 소포리의 경우 일반적으로 농악을 ‘군고’라고 부르면서도 걸립의 전통을 강조하여 ‘걸군’이라고 한다. 《소포 걸군농악》은 〈당산굿〉, 〈들당산굿〉, 〈샘굿〉, 〈뜰볿이〉, 〈판굿〉의 순서로 연행한다. 먼저 당산에 들러 인사하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입장하는 절차로 〈들당산굿〉을 친다. 이후 우물에서 〈샘굿〉을 치고 가가호호를 돌며 〈뜰볿이〉를 하며, 마지막 절차로 〈판굿〉을 한다. 〈판굿〉은 ‘문굿-길굿-들당산-승전고-헐사굿-바탕놀음-나비놀음-북놀음-장구놀음-날당산’의 순서로 진행한다. 군고를 연행할 때 집사 역할을 맡은 사람이 문서를 들고 다니다가 들당산, 뜰볿이, 승전고 등의 절차에서 문서를 내보이며 청령을 한다. 《소포 걸군농악》도 해남처럼 절차마다 명령을 내리는 청령의 절차가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서남해지역에서 전승되는 군고는 일반적인 농악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군사적 관련성과 유래를 강조하여 군고, 금고, 군기 등의 명칭으로 전승하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리고 군고 절차와 관련된 문서가 전하고, 군대훈련처럼 명령하듯 청령을 외치며 그에 따라 절차를 진행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진도 소포 걸군농악: 전라남도 무형문화재(2006)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6. 김현숙, 「음악과 문화로서의 진도농악」, 『진도의 농악과 북놀이』, 국립남도국악원, 2009. 송기태, 「서남해안지역 걸립 문서에 나타난 지향과 문화적 권위」, 『실천민속학연구』 16, 2010. 송기태, 「풍물굿의 군사적 의미화 연구 - 전남 남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도서문화』 36, 2010. 송기태, 「풍물굿 예능의 소통과 원형 창출 - 진도 소포리 풍물굿을 대상으로」, 『남도민속연구』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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