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계원들에 의해 연행되어온 오광대 계열의 탈놀이
통영오광대는 통영시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로 경상도 낙동강 일대에 전하는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은 탈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 5마당으로 구성되는데, 각 마당은 〈문둥탈〉, 〈풍자탈〉, 〈영노탈〉, 〈농창탈〉, 〈포수탈〉이라 부른다.
과거 통영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동헌에서 수군(水軍) 소속 악공(樂工)들이 매귀(埋鬼)를 치는 탈놀이가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양반탈ㆍ할미탈(큰어미)ㆍ각시탈(작은어미)ㆍ까마귀탈ㆍ주지탈(獅子)ㆍ비비탈(영노)ㆍ중광대탈(중매귀) 등의 목제가면(木製假面)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단절되었다. 현재 전승되는 통영오광대는 100여 년 전 이화선(李化善)이 마산에서 통영으로 이사한 후, 《창원오광대》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창원오광대》는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은 탈놀이로 알려져 있다.
○ 개요
통영오광대는 대개 서민층 남자 중 흥이 많고 음악과 춤에 능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의 계원들에 의해서 이어졌다. 이들은 매귀와 오광대를 함께 연행하는 조직이라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의흥계의 정기총회가 열리는 세시절기의 일환으로 정월 14일에 진행되었으며, 그 외에 봄과 가을에 3월 15일 봄놀이로 9월 15일에 단풍놀이로 오광대를 놀았다고 한다. 또한, 4월 초 봄놀이에는 ‘사또놀음’을 곁들인 오광대를 놀았고, 놀이꾼들이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 용화사 뒤 잔디밭에 가서 탈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외 기우제 행사의 하나로도 오광대를 논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통영오광대의 주축이었던 장재봉(1899∼1965)은 음력 12월 20일께 의흥계 임시총회를 열고, 계원 중에서 기부금을 받아 매귀에 필요한 기물을 마련하여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여러 집을 돌며 매귀를 쳤다고 한다. 이렇게 받은 기부금으로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놀이》를 했다고 증언하였다.
오광대는 별도의 공연무대를 마련하지 않고 넓은 평지가 펼쳐진 곳에서 행한다. 공연장소의 뒤편 한쪽에 출연자가 가면과 의상을 갈아입을 수 있는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한다. 그 앞쪽으로 적당한 위치에 악사가 앉고 마당 가운데에서 탈놀이를 한다. 연행할 때는 놀이판 서너 곳에 횃불이나 장작불을 놓아서 주위를 밝힌다.
○ 절차와 구성 통영오광대는 총 다섯 마당[科場, 과장]으로 진행한다. 통영오광대 연행본의 경우 채록자에 따라 7마당 혹은 5마당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나 1963년 이후로는 5마당으로 고정하여 연행된다. 마당 명칭도 채록자에 따라 다르나, 현재는 국가무형유산 지정 자료를 기준으로 전승되고 있다. 첫째 마당인 〈문둥탈〉은 문둥이의 비애를 통해 양반을 풍자하는 것이다. 문둥이가 소고를 들고나와 춤을 추면서 신세를 한탄한다. 문둥이는 자기 조상들은 본래 양반이었으나 저지른 죄가 컸다고 이르며 양반을 풍자한다. 둘째 마당 〈풍자탈〉은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농담하거나 봉변을 당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등장하는 양반은 원양반ㆍ둘째양반ㆍ홍백양반ㆍ먹탈(검정양반)ㆍ손님(곰보양반)ㆍ삐뚜르미(비틀양반)으로, 이름에서도 양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말뚝이는 첫째 양반의 선대는 기생이 여덟이고, 둘째 양반은 종의 자식으로 서출이고, 셋째 양반은 홍(洪)가와 백(白)가 두 아비가 만들었고, 넷째 양반은 어미가 부정을 타서 온몸이 새까맣게 되었고, 다섯째 양반은 어미가 부정하여 손님마마(天然痘疫)가 곰보 흔적을 만들었고, 여섯째 양반은 중풍기가 심하여 전신이 비틀어졌고, 일곱째 양반은 보살인 어미가 서방질하여 낳았다고 하면서 양반들의 근본을 폭로한다. 반대로 말뚝이는 대대손손 당상벼슬의 양반이라고 하며 양반들을 혼낼 것이라 호통치지만, 용서하니 들어가라고 한다.
셋째 마당 〈영노탈〉은 상상의 괴물인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는 내용이다. 영노는 양반 아흔아홉 명 잡아먹고 마지막 비비양반을 잡아먹어 득천(得天)하여 용이 되겠다고 한다. 비비양반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양반의 정체성을 버리기까지 하다가 쫓겨 퇴장한다. 넷째 마당 〈농창탈〉은 큰어미(할미)와 할미양반과 작은어미(제자각시)의 갈등을 통해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할미양반과 작은어미가 통정하여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출산 준비를 위해 할미양반이 출타한 사이에 작은어미는 동네 남자들과 바람을 피운다. 또 가출한 할미양반을 찾아 헤매던 큰어미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작은어미가 출산을 한다. 이후 아기를 어르던 큰어미를 작은어미가 쓰러뜨려 죽인다. 다섯째 마당 〈포수탈〉은 담비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사자는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한 마당의 놀이가 끝나면 등장인물은 모두 어울려 군무를 춘다. 탈놀이의 앞에 사또놀이를 행하기도 하나 필수적인 절차는 아니다.
통영오광대 놀이의 내용은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ㆍ첩간의 갈등 등을 다루고 있다. 양반에 대한 말뚝이의 조롱은 매우 신랄하지만,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약한 편이다. 춤이 주가 되며 자연스러운 동작에 대사(臺詞)와 노래[唱]를 곁들이면서 연행한다. 〈풍자탈〉 마당의 대사는 대체로 고정적인 데 비해 그 외 마당의 대사는 놀이할 때마다 상황에 맞추어 변화한다. 출연자의 흥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서 가감되어 가변적이라고 하겠다.
○ 악가무 특징 통영오광대는 〈덧배기춤〉의 장단을 주로 사용하는데, 굿거리장단과 유사하다. 덧배기는 영남 지역의 전통적인 가락으로 3소박 4박자 장단의 제3박 3소박을 강조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강세로 인해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덧배기장단에 맞춰 〈덧배기춤〉이 추어진다. 매구꾼들이 연주하는 덧배기장단 외에도 삼현육각을 사용했었던 흔적이 염불ㆍ타령ㆍ도드리 등의 장단들이 나타난다. 즉 본래 삼현육각 반주가 수반되었으나 현재는 매구꾼의 농악으로 연주되는 형태로 남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통영오광대에서 부르는 노래에는 판소리의 영향이 발견된다. 〈문둥탈〉 마당의 〈자탄가〉는 진양조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풍자탈〉 과장 마지막에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빌 때 부르는 〈비나이다〉 노래는 2소박 12박의 중모리장단을 사용한다. 통영오광대의 대표적인 춤은 〈덧배기춤〉으로 경상남도의 전통적인 춤사위이다. 또한 통영오광대에서 가장 특징적인 춤은 〈문둥이춤〉으로 문둥이의 생태와 애환을 춤으로 묘사한다. 〈말뚝이춤〉은 동작과 도약이 크고 힘찬 건무(健舞)이다. 〈양반춤〉은 유연한 동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원양반을 제외한 양반은 희극적인 인물의 성격에 따라 우아한 멋보다 익살스러운 느낌으로 표현된다. 〈작은어미(제자각시)춤〉과 〈할미춤〉은 여성 인물이지만 남성이 배역을 맡아서 춤을 춘다. 〈제자각시춤〉은 교태를 표현하고, 〈할미춤〉은 팔을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드는 등 외설적인 동작으로 구성된다. 남성이 여성을 나타내면서 추는 춤이라는 점에서 패러디적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통영오광대에서는 각 마당이 끝난 후에 모든 등장인물이 함께 어울려 추는 군무가 등장하여 대목과 대목 혹은 마당과 마당을 연결한다. ○복식·의물·무구 1970년대 초까지 통영오광대의 배역은 총 31명이었다. 배역은 문둥이ㆍ말뚝이ㆍ원양반ㆍ둘째양반ㆍ홍백양반ㆍ비틀양반ㆍ곰보양반(손님탈)ㆍ검정양반(흑탈)ㆍ조리중ㆍ팔선녀(8)ㆍ영노ㆍ영노양반ㆍ할미양반(영감)ㆍ할미ㆍ제자각시(작은어미)ㆍ상좌(2)ㆍ봉사ㆍ상주(2)ㆍ포수ㆍ몽돌이(끝돌이)ㆍ사자ㆍ담비 등이다. 현재는 22역으로 축소하여 연행한다. 탈은 바가지ㆍ나무ㆍ대나무 등의 재료로 만들며, 오광대놀이를 한 뒤에 소각하지 않고 보관한다. 1909년 화재로 오동나무 가면이 소실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놀이를 시작할 때마다 간단하게 가면에 고사(告祀)를 지낸다. 사용하는 악기는 꽹과리ㆍ징ㆍ북ㆍ장구ㆍ호적ㆍ젓대ㆍ피리ㆍ해금 등이나 지금은 주로 매구인 꽹과리ㆍ징ㆍ북ㆍ장구 등의 타악기와 태평소가 주로 쓰인다. 과거에 4월 초 봄놀이에서 연행할 때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물잡이를 앞세우고 길놀이를 하면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반주는 타악기를 중심으로 3소박 4박자의 덧배기(굿거리)장단을 연주하며, 장면에 따라 세마치ㆍ염불ㆍ타령ㆍ도드리 등의 장단을 연주한다. 노래는 극의 전개에 맞추어 필요할 때 부르는데, 〈문둥탈〉 마당에서는 〈자탄가〉, 〈농창탈〉 마당에서는 〈사랑가〉와 〈아리랑〉 등을 부른다.
○ 역사적 변천 과정 통영오광대는 1890년대에 이화선(양반역)ㆍ서현우(徐賢宇, 양반역)ㆍ박재규(朴在奎, 말뚝이역)ㆍ이순오(李順五, 할미역)ㆍ이마치(작은어미역)ㆍ최만기(崔萬基, 문둥이역)ㆍ박무일(朴武日, 검정양반역)ㆍ조열규(趙烈圭, 비틀양반역)ㆍ백성노(홍백양반역) 등이 계원이었던 의흥계(義興契)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전한다. 의흥계의 전승을 1910년대에는 장용기(張容基, 말뚝이역)가 주축이 되는 난사계(蘭社契)가 이어받았다. 또 1920년대에는 장재봉(張在奉, 문둥이역ㆍ말뚝이역)ㆍ오정두(吳正斗, 영노역)ㆍ채구생(蔡九生, 조리중역)ㆍ김진수(金辰守, 사자역ㆍ둘째양반역) 등이 춘흥계(春興契)를 조직해서 통영오광대의 전승을 이어갔다. 통영오광대는 《밤마리 오광대》를 수용한 《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았는데 《창원오광대》에서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마산오광대》는 《밤마리 오광대》에 〈문둥이 마당〉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다시 통영에 전해지면서 벽사의식무 계통의 마당이 탈락되었으며, 〈양반과장〉의 등장인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통영오광대는 더욱 오락적인 면모가 강조되었다고 한다.
통영오광대는 등장하는 양반의 수가 많고 다른 탈놀음에 비하여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심하게 표현된다. 〈영노탈〉마당의 영노는 다른 오광대놀이와 달리 인간(양반)을 잡아먹는 결말로 끝나 차별성을 가지며, 〈농창탈〉의 경우 다른 오광대의 〈할미 마당〉에 비하여 인물 구성이나 갈등구조가 복잡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오광대 계통이지만 통영만의 이야기로 변주되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문화재청, 2016. 『(중요무형문화재) 탈춤대사집』, 한국문화재보호협회, l981. 『통영오광대, 화산문화, 2001. 강용권, 『야류ㆍ오광대』, 형설출판사, 1977. 정상박,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집문당, 1986. 송석하, 『한국민속고』, 일신사, 1960. 문화재청(www.cha.go.kr)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통영오광대 홈페이지(www.okwangdae.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