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민요
① 개항 이후에 민중이 전과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 부른 민요 ② 1930년대에 음반사가 기획하여 대중음악으로 유통시켰던 신작 가요의 한 갈래
개항 이후 신민요는 민중들에 의해 기존의 전통적 민요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면, 1930년대 이후에는 대중가요의 한 갈래로서 창작자가 만들었다. 특히 가창자와 작곡가는 전통적인 민요 양식에 전통 가요의 창법, 그리고 서양의 기능화성의 음악 논리를 합융시키는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결과물이 신민요라는 갈래였다.
개항 후 각성한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신민요는 외세와 조선 간의 사회적·정치적 긴장감을 드러냈고, 동학혁명 이후로 등장한 신민요는 구체제와 일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으로 변한 일상들을 노래했다. 그리고 애국계몽기에 신민요는 모더니스트들의 세계관을 맹아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신민요는 근대 시기에 역사의 주체로서 부상한 민중의 정체를 구체화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로 일제는 언론, 출판, 집회와 결사 등을 억압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요의 공유가 제한되면서 민중이 주체가 되어 창작하고 부르는 노래의 확산은 사실상 국내에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경복궁 중건 이후로 도시 중심부로 유입된 지역 민요는 도시인의 미적 감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또 갑오개혁 이후 구체제의 제도들이 사라지면서 예악론적 음악론 역시 주도적 음악론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에는 근대의 정신을 기존의 잡가 곡조 위에 노래하는 사례도 등장하게 되었다. 1907-8년 무렵 <육자백이>나 <수심가> 같은 잡가에 새로운 노랫말을 붙인 노래가 발표되었고, 1911년에는 박춘재가 경토리와 서도토리를 혼합하여 <이팔청춘가>를 유행시켰다. 이러한 변화가 음반 산업의 성장과 맞물리면서 1930년대부터는 조선적 가요 갈래에 대한 대중에의 요구에 부응하는 노래가 나타났다. 이러한 노래를 음반회사에서는 신민요라 구분하고 판매했다. 1920년대부터 문인들은 근대시로서 민요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민요시란 시인 개인의 세계관에 따라 민요적 표현법과 미의식(단어, 율격, 미감, 감수성 등)을 수용하여 서정성 혹은 조선의 민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1920년대 이후부터는 서양식 음악을 학습하여 작곡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창작물을 공적으로 출판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더해 전통적 음악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만들어 진 것이 1930년대에 음반회사에서 제시한 신민요라는 갈래였다. 신민요는 전통적인 민요 혹은 전통적인 가창 양식에 서양식 반주를 붙인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이후로 신민요는 1960년대까지 대중음악의 주류 갈래로 유행했으나, 이러한 노래의 미감과 이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적인 가수가 지속적으로 보충되지 않으면서 사실상 대중음악의 주변부로 사라지게 되었다.
개항 직후 민중이 만들어 부른 신민요는 그 음악적 실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지역 민요의 어법으로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갑오혁명 가요로 만들어진 신민요의 경우 <새야새야>와 거의 유사한 노랫말이 동일한 음악 형식으로된 악곡으로 널리퍼졌던 것이 확인된다. 현재 남아 있는 <새야새야>의 여러 이본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이 노래가 불리며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역 음악 어법과 결합한 악곡들임이 확인된다. 한편, 1934년에 발표된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가 유행하면서 신민요는 유행가의 하위 갈래로 독립적인 범주를 구축하게며 대중적 유행 가요를 선도하게 되었다. 신민요의 작곡은 서양음악을 학습한 음악가들이 그리고 작사는 당시 근대시인으로 불렸던 문인들이 그리고 가창은 전통적인 가창 갈래를 두루 섭렵한 평양 기생들이 주로 담당했고, 반주부에는 기능화성을 강화하는 서양 악기를 중심으로 하지만 가야금, 장구, 피리 등의 악기도 반주로 사용함으로써 조선적 음색을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작사가들은 조선적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해 고향, 지역 명승, 절기 등을 주제로 삼았고, 작곡가들은 신민요를 작곡할 때, 지역 민요의 음구조를 고루활용 했다. 경토리를 가장 많이 사용했지만 이 외에도 메나리토리, 육자백이토리, 수심가토리로 활용했다. 작곡가들은 노래의 반주를 위해 신민요에 당시 유행가와 같은 기능화성을 사용했고, 또 한국의 전통적인 장단 구조와 서양식 박자 체계가 공존할 수 있도록 노래와 노랫말의 분절 단위를 조절했다. 그러나 당시 작곡가들의 역량으로는 서양의 기능화성과 한국 민요의 음체계의 차이를 조화롭게 통제하지는 못했다. 또한 한국작곡가들만이 아니라 일본의 작곡가들이 작곡 및 편곡을 맡기도 했다. 작곡가가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음계계 간의 불협화적 현상, 즉 두 개의 음 체계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하는 음 구조적 충돌은 가수들의 탁월한 가창을 통해 충분히 은폐될 수 있었다. 당시 신민요 가수는 평양 기생들이 전담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가요를 엄격하게 학습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국 전통음악의 요성과 퇴성, 그리고 메나리조 음악에 많이 나타나는 굴곡진 선율 등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음구조적 불일치를 숨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화려하고 정교한 가창 기교로 노래부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었다. 일부 신민요는 일본의 음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장단 음계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가창부의 주도 하에 놓일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특성 때문에 신민요라는 갈래는 대중들 사이에서 조선을 나타내는 부호로 작동할 수 있었다.
신민요는 본질적으로 근대적 변화를 나타내는 노래였고, 또 1930년대 이후로 나타난 대중가요 신민요는 음악 구조적으로 조선을 부호화한 노래로 인식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조선인들을 사회적으로 호명하는데 있어서 전통 음악 어법과 새로운 음악 어법이(양악) 동시적으로 구현된 신민요가 유리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단 후 <노들강변>, <태평가(태평연)> 등의 신민요를 민족적 정체를 보여주는 일반 민요로 인식하게 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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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李昭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