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변천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김순남(金順男, 1917~1986)과 강장일(姜長一, ?~?)의 발의로 음악가 대회가 소집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음악건설본부가 결성되었다. 이는 광복 직후 최초로 조직된 음악 단체로, 뒤이어 창립된 조선문학건설본부·조선미술건설본부·조선연극건설본부·조선영화건설본부와 함께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의 발족을 주도하였다.
조선음악건설본부 산하에는 작곡부·기악부·성악부·국악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특히 국악위원회에는 아악계의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와 민속악계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였다. 위원장 함화진(咸和鎭, 1884~1949)을 위시해 김석구(金錫九, ?~?), 김윤덕(金允德, 1918~1978), 박헌봉(朴憲鳳, 1906~1977),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주환(李珠煥, 1909~1972), 장인식(張寅湜, 1908~1980), 최경식(崔景植, 1876~1949) 등이 조직 구성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8월 18일 국악위원회는 일제 강점기에 결성된 조선음악협회 산하의 조선음악부에서 이사를 역임했던 현철(玄哲, 1891~1965)과 이왕직아악부에서 임시 촉탁으로 근무한 이종태(李鍾泰, 1905~?) 등 10여 명의 발기로 이왕직아악부에서 국악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체명을 국악건설본부로 개칭하고 재결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음악건설본부는 광복 직후 서둘러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념적 좌우 대립이 노골화되면서 1945년 10월경 해체되고 말았다. 이에 국악계는 자주적 노선을 택하여 국악건설본부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뒤이어 국악회의 창립을 거쳐 1945년 11월 무렵 마침내 아악계와 민속악계가 통합된 국악원을 출범시켰다. 국악건설본부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국악회의 성립과 국악원의 창립을 가능케 한, 광복 직후 국악단체 통합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단체로 평가할 수 있다.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