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 시대 궁중 제향과 연향에서 음악·무용과 함께 가창된 시가.
송나라로부터 대성신악(大晟新樂)과 유교 예악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면서 악장 또한 그에 맞게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시(詩)》[한대(漢代) 이후에는 《시경(詩經)》]에 실린 시편(詩篇)들을 자신들의 악장으로 원용했고, 고려 또한 그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한시 형태이든 우리 고유의 노래 형태이든 고려와 조선의 악장을 단순히 시문학의 규범적 장르명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음악ㆍ무용과 함께 융합무대예술의 한 축이자 유교 이념에 입각한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성과 개별 왕조들의 특수성을 복합적으로 구현하는 시가 장르들을 하나로 묶던 역사적ㆍ관습적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악장은 음악과 시가 결합된 형식으로, 그 기원은 중국의 고전 《시경》에 있다. 주나라 시대에는 《시경》의 시편들이 그대로 악장으로 쓰였고, 이후 왕조들은 이를 모범 삼아 자신들의 악장을 제작했다.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예악 제도를 받아들이며 악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려사』「악지」에는 예종의 「태묘악장」, 공민왕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당악·속악·삼국 속악에 속하는 다양한 악장들이 궁중 제례와 연향에서 사용된 사례로 함께 소개되어 있다.
〇 세계관 및 주제의식 악장은 동아시아 예악 전통 속에서 형성된 궁중 시가로서, 그 세계관은 왕조의 정치적 정당성과 문화적 보편성을 선양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 《시경》과 아악·당악 등 중국 음악과 악장의 도입은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을 세련되게 정비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당악의 기본 정신인 송도(頌禱)는 중세 왕조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한 표현 관습이었다. 당악정재에서 서왕모 등 신선의 배역을 맡은 여악들이 임금에게 장수와 복을 기원하던 행위는 이러한 송도의 실천적 양상이다. 속악정재는 당악정재와 상호 텍스트적 관계를 맺으며 송도의 표현을 모방하였고, 속악가사 〈동동〉은 당악정재의 가사에서 본뜬 송도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변형하여 표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아악과 아악악장이 사용된 문묘·사직·선농·선잠·풍운뇌우 등의 제례와 향악이 사용된 종묘제례는 국가의례의 중심에 있었으며, 왕조의 권위를 확보하고 존립의 당위성을 선양하려는 목적의식을 내포하였다. 악장의 유사성과 동질성은 동아시아 문명의 표준과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중세 왕조의 문화적 욕망을 반영한다.
〇 제작방식 악장은 궁중의례와 연향에서 음악과 함께 불리는 노랫말로, 그 제작 방식은 문헌적 기반과 형식적 규범에 따라 정교하게 구성되었다. 악장의 근원은 《시경》이며, 역대 왕조의 교사악장은 물론 일부 연향악장도 《시경》의 시편을 집구하거나 표현과 구성법을 차용하여 제작되었다. 고려의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과 「신찬태묘악장」, 조선 태종대의 악장들에서 《시경》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악장은 대개 4언8구의 정형시로 구성되며, 제사의 대상, 생전의 덕업, 제사와 기원의 순서로 내용이 전개된다. 운자 배치와 어법은 《시경》의 전통을 따르며, 궁중악무에 맞춰 제작된 점에서 일반 시문학과는 구별된다. 표기 방식은 한시체, 국문체, 국한혼용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서사송시체로 분류된다. 특히 〈용비어천가〉는 국문가사와 한문시를 병치한 구조를 갖추어 의미 전달과 음악적 형식을 동시에 고려한 복합적 구성을 보여준다. 악장은 음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아악은 제례에, 속악은 연향에 사용되었다. 세종대에는 중국계 아악을 비판하고 조선 고유의 악장 양식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 예조는 관습도감의 향악과 삼국·고려 시대의 민간 노래들을 채록하여 권계의 자료로 삼고자 하였으며, 이는 악장 제작이 민속적 소재까지 포괄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〇 주요 작품 악장은 시대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작품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궁중의례와 연향의 목적에 따라 달라졌다. 고려시대에는 〈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과 「신찬태묘악장」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시경》의 시편을 직접 인용하거나 집구하여 구성된 악장이다. 조선 초기에는 〈용비어천가〉가 중심 작품으로 자리잡았으며, 국문가사와 한문시를 병치한 구조를 통해 공·사 연향에 두루 사용되었다.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은 〈용비어천가〉의 구조를 계승한 악장으로, 각각의 악곡에 맞춰 한문시와 국문가사를 적절히 배치하였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문무의 춤곡으로 제작되어 회례악으로 쓰였으며, 이후 세조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종묘제례악과 진풍정·양로연 등에도 통용되었다. 또한 〈환환곡〉, 〈유황곡〉, 〈정동방곡〉, 〈헌천수〉, 〈정읍〉, 〈진작〉, 〈만전춘〉 등은 속악으로 정해져 그 가사가 악장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〇 역사적 변천 악장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며 문헌적 전통과 음악적 실천을 바탕으로 정비되었고, 시대적 요구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변화하였다. 고려에서는 《시경》 시 자체를 악장으로 쓰거나 시편의 구절을 조립하여 제작하는 관습이 형성되었고, 이는 조선조 악장의 일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종묘·원구·사직·선농·선잠 등의 제향 악장이 새로 지어졌으며, 음악은 중국계 아악을 사용하였다. 세종대에는 악장의 개념과 존재 의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조선 특유의 악장 양식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시경》 이래 지속되던 4언 정격 악장은 조선 건국 이후 다양한 시형과 민간가요의 수용을 통해 형식의 다양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인조대와 숙종·영조대의 종묘악장론, 순조대 효명세자의 연향악장 확충 등은 시대적 양상에 따른 악장의 변화를 보여주며, 후기에는 찬송 대상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담론으로 기능이 축소되면서 악장의 본질적 생명은 쇠퇴하였다.
악장은 동아시아 예악 전통 속에서 왕조의 정치적 정당성과 문화적 보편성을 표현하는 언어적 도구였다. 《시경》에서 비롯된 악장은 송대에 집대성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의례와 음악의 핵심 요소로 수용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악장은 중국 왕조의 악장과 제작 의도나 주제의식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으며, 유교적 예악 제도의 공통성과 정치적 연계성 속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궁중 연향에서 악장은 제왕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송도의 언어로 기능했으며, 이는 왕조의 안정과 영속을 상징하는 핵심 메시지였다. 악장은 단순한 노랫말을 넘어 이상 정치의 비전을 형상화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경세문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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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익(曺圭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