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수(風樂手)
조선후기 군영 소속으로 ‘세악’을 연주하던 연주자 및 집단.
세악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입된 세악제도 소속의 악원을 뜻하며, 동시에 이들이 소속된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이들의 신분은 민간인처럼 생업에 종사하지만 군사 훈련과 동원이 가능한 신분, 즉 반군반민(半軍半民)으로, 공무를 수행할 때는 일반 군인의 훈련 등에도 참여하면서 관청과 군영의 행진, 연향 등에서 주악을 맡았다. 세악수들이 합주할 때는 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구 1, 북 1의 삼현육각 편성으로 연주했고, 민간의 풍류 모임에서는 악기별 독주 및 가곡 반주나 《영산회상》 등의 연주에도 참여했다.
임진왜란(1592)을 계기로 명나라의 군영 제도가 수용되면서, '세악‘이라는 용어 및 세악수 운영 제도가 도입되었다. 구체적인 성립 시기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추정된다.
〇 개요 (신분과 소속)
세악수는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군인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조합 형태인 '도가(都家)'를 중심으로 민간에서도 활동하는 이중적 신분을 가졌다. 이들은 조선후기의 표하군(標下軍)에 속한 하위 집단으로, 삼현육각 편성을 이루는 6명이 한 '패(牌)'를 이룬 조직으로서 우두머리는 '패두(牌頭)', 어린이 세악수는 '아세악수(兒細樂手)', 정원 외의 세악수는 '별세악군(別細樂軍)', 지방에서는 '풍악수(風樂手)'라고도 불렀다. 군영 규모에 따라 큰 곳에는 네패, 작은 곳은 한패 씩 배치되어 있었다.
〇 역할 및 활동
세악수는 이중적 신분을 유지하면서 공적으로는 군인으로서 사습 조총 시험, 원기 시험 등 정규 군사훈련 및 입직(入直)을 담당하는 한편, 군영에서 필요한 연주를 담당했다. 주로 국왕의 성외 거둥, 관찰사 행차, 과거급제자 유가(遊街) 등에 동원되거나 관아 및 군영의 잔치(犒饋)에서 연주룰 담당했다. 사적으로는 민간의 '도가' 일원으로 사대부층 및 중인층 음악애호가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초대받아 연주했으며, 경우에 따라서 굿음악 연주에도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악수들은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을 기본으로 한 합주로 〈취타〉, 〈길군악〉, 〈길타령〉, 〈별우조타령〉, 〈군악〉, <여민락>, <영산회상)> 등의 기악곡과 가곡 , 춤 반주를 담당했으며, 조선후기 세악수 중에는 해금연주자 우춘대와 같이 개별적으로 명성을 얻어 활동한 인물도 있다.
〇 복식 세악수들은 공식 행사에서 계기에 따라 군복이나 청철릭, 붉은색 악사복, 평상복 등을 입었다. 〇 역사적 변천 세악수는 군영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군영의 해체와 운명을 같이했다. 1882년(고종 2)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1884년 금위영·어영청 등이 폐지되고,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조선의 모든 군영이 철폐되면서 군영 악대인 세악수 제도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들이 연주하던 음악의 전통은 전통음악의 주요 악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악수는 조선 후기 '삼현육각'이라는 독특한 악기 편성을 정립하고, 궁궐 및 민간의 다양한 연주계기에 주악을 담당하면서 음악문화 향유층을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군영의 철폐로 세악수 제도는 단절되었지만, 이들의 연주하던 전문음악의 전통은 민간의 축제 공연 및 무속, 불교 의례에 전파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춘관통고』(春官通考) 『어영청등록』(御營廳秒謄錄) 『장용영절목초』(壯勇廳節目抄) 『훈국사례』(訓局事例)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ㆍ세악수ㆍ내취-』, 태학사, 2007.
이숙희(李淑姬),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