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梨園)
조선 시대 대표적인 궁중 장악(掌樂) 기관.
장악원은 조선 시대 예조에 속하여 악(樂)을 맡아보던 정3품 관청이다. 왕실의 제례와 연례 등 주요 공식 행사에서 악을 담당했다. 우방(右坊) 악공(樂工)과 좌방 악생(樂生), 관현맹인(管絃盲人)과 여기(女妓), 가동(歌童)과 무동(舞童) 등 악인(樂人)들이 악을 연행하고, 악인 출신의 전악(典樂) 이하 체아직(遞兒職)이 이들의 교육 및 연주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정직(正職) 관원이 행정을 관장했다. 장악원은 국가 운영의 근본 이념으로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에서 궁중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핵심기관으로서 높은 위상을 지녔다.
○ 설립목적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 기관이다. 군자의 위치에서 예악(禮樂)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실현하고자, 국왕이 유교 이념에 따라 악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설치하였다. 성종 11년(1480)에 장악원 청사가 완공되었으며, 성현이 지은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에는 “나라에 하루라도 음악이 없을 수 없으니, 음악이 없다면 침체하고 야비하여 그 화기를 이룩할 수 없다”는 설립 취지가 명시되어 있다.
○ 조직 체계와 구성원
장악원의 악인은 향악과 당악을 담당한 우방 소속 악공, 아악을 연주한 좌방 소속 악생, 궁중 내연의 음악을 연주한 관현맹인, 연향에서 정재(呈才)와 노래를 담당한 여기, 외연과 사신연 및 임금의 거둥 시 노래와 춤을 맡은 가동과 무동 등으로 구성되었다. 일부 악인은 체아직으로 분류되어 정해진 녹봉 없이 근무 성적에 따라 보수를 받았으며, 음악 교육과 무용 지도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행정은 문관 출신의 정직 관원이 담당하였으며, 『경국대전』에 따르면 제조 2인, 정 1인, 첨정 1인, 주부 1인, 직장 1인 등 총 6명의 정직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음률에 밝아 구임법이 적용되었고, 인사이동이 제한되었다. 제조는 악공의 취재를 관리하고 조정 신하들의 악학을 권려하였으며, 정은 장악원을 총괄하고 행사 및 실록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체아직은 전악·부전악·전율·부전율·전음·부전음·전성·부전성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46인 중 20인은 악공의 체아로 당악 담당 12인, 향악 담당 8인이었다. 나머지 26인은 아악 담당 악생과 관현맹인의 체아였다. 악공은 천인의 자녀, 악생은 양인의 자녀를 대상으로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으며, 민가에 의탁하거나 공동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이들은 지방 봉족이 바친 베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여기는 관비 중 어린 자를 선발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 여기는 폐지되고 행사 시 임시로 선발하였다. 가동과 무동은 공천과 양인에서 선발되었으며, 악공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변천
장악원은 조선 초기에 여러 장악 기관을 통합하여 설립되었으며, 성종대에는 악공 572명, 악생 399명으로 총 971명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전란과 재정 악화로 인해 인원이 감소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824명, 정묘호란 이후 626명, 병자호란 이후 619명으로 줄었고, 영조대에는 641명으로 소폭 증가하였다. 특히 아악 담당 악생의 수가 크게 줄었다. 『육전조례』(1867)에 따르면, 악공은 167명, 악생은 9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사는 성종대에 한성 서부 여경방 봉상시 인근 민가를 철거하고 신축되었으며, 사무 공간, 악인 숙소, 악기 창고, 의례 연습 공간 등을 갖추었다. 이곳은 과거시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해당 청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11년(1611) 이후 남부 명례방(현 을지로 66번지)에 새 청사가 건립되었다. 이 청사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징발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장악원의 명칭은 연산군 11년(1505)에 연방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중종 즉위 후 원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1753년(영조 29)에는 중국식 명칭인 ‘이원(梨園)’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일부에서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예조가 폐지되면서 장악원은 궁내부 소속으로 이관되었고, 대한제국기에는 봉상사·협률과·교방사·장악과·장악부 등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궁내성 이왕직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왕직아악부로 불렸다.
○활동 장악원은 종묘제례, 사직제, 풍운뇌우제, 선농제, 선잠제, 문묘제례 등 국가 제사와 조회, 진연, 진찬, 양로연, 사신 연향, 왕의 거둥 등 궁중 의례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였다. 왕이 민간에 음악을 하사할 경우 사가에서도 연행되었다. 또한 악의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정책 기관으로서, 정직 관리들이 악장·의례·음률·춤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악보와 『악학궤범』 등의 악서를 제작하였다. 경륜 있는 악공은 악사로서 후배를 교육하였으며, 악기 제작 시 악기도감이나 악기조성청을 통해 제작 과정을 감독하였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는 장악원 악사가 파견되어 조선 음악을 연주하였다.
장악원은 조선 시대 유교 이념에 따라 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와 함께 중시한 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의 가(歌)・무(舞)・악(樂)은 나라의 성쇠와 함께 부침을 겪으며 장악원을 중심으로 약 5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장악원에는 국가 관리들의 악에 대한 이상과 철학, 악인의 예술혼, 이들의 생활을 위해 포(布)를 제공한 백성들의 피땀이 담겨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용재총화(慵齋叢話)』 『육전조례(六典條例)』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숙희, 「장악기관 청사연구-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학연구』 61, 2015. 이정희, 「대한제국기 장악기관의 체제」, 『공연문화연구』 17, 2008. 정연주, 「조선전기 장악원의 역할과 위상」, 『한국사학보』 88, 2022.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