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맹(管絃盲), 맹악(盲樂), 향당악맹인(鄕唐樂盲人), 고악(瞽樂), 고사(瞽師), 고자(瞽者)
궁중 의례에서 악기를 연주한 맹인 남성.
관현맹인은 처음에 내연(內宴)에서 여악의 부족한 악기연주를 메꾸기 위한 것으로 출발하였으므로, 여악의 기량이 충분할 것으로 판단된 1447년(세종 29)에 폐지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여악이 역부족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복구되었다. 서울의 장악기관 소속으로 서울에 상주하며 활동한 여기(女妓)가 존재한 조선 전기에는 관현맹인이 여악의 악기연주를 보조하는 정도였지만, 장악원 여기를 폐지한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관현맹인이 내연에서의 악기연주를 주도하였다. 1795년(정조 19) 내연에서 악공이 휘장 밖에서 연주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은 이래 이것이 정례화됨에 따라 관현맹인의 활동이 축소되었으나, 조선조 말까지 여전히 존속하였다.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기치로 내건 조선시대에 왕비와 명부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 공간에 남자 악공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여악이 춤과 노래 뿐 아니라 악기연주까지 모두 맡았다. 처음에 여악의 악기연주가 충분치 못하여, 임시방편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관현맹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충하도록 하였다. 1447년(세종 29) 4월에 여악이 내연의 음악을 감당할만하다 하여, 관현맹인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악의 악기연주가 충분치 못하여 늦어도 성종대(1469~1494)부터 관현맹인이 다시 내연에서 여악과 함께 연주하게 되었다.
〇 설치 배경 및 역할 관현맹인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왕비와 명부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 공간에 남자 악공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도입되었다. 여악(女樂)이 악기 연주, 노래, 춤을 모두 맡아야 했으나, 여악의 악기 연주 기량이 부족했기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세종 12년(1430년경)에 설치되었다. 〇 신분과 처우 이들은 장악기관 소속의 실무 인력으로서, 초기 18명에서 인조반정 이후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약 13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악공이나 악생의 경우 1200일의 근무일수를 채우면 체아직 녹관의 자격이 주어진 데 비해 관현맹인은 400일을 그 자격이 주어졌으며, 앞이 보이지 않아 이동 시에는 견맹차비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관현맹인의 활동 영역이 대부분 여악과 맞물려 있지만, 장악원에서 구식(救食)할 때 북을 두드리는 것은 이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이었다. 〇 역사적 변천 관현맹인의 활동은 여악과 여성 의례의 변화에 따라 크게 변동했다. 이들은 주로 내연, 내정전(內正殿) 하례(賀禮), 친잠례(親蠶禮) 등 여성이 참여하는 의례에서 여악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록 1447년(세종 29년)에 폐지되었다가 성종대에 다시 복구되는 등 일시적 존재로 출발했으나, 조선 전기에는 여악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 여악이 폐지되자 내연 악기 연주를 주도하는 역할로 격상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내연을 베풀 즈음에 외방여기(外方女妓)를 서울로 불러들여 악가무를 하게 하고 마친 후 다시 각 지방으로 내려보냈는데, 각 지역에서 임시로 모인 여악보다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활동하는 관현맹인이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연에서의 춤과 노래는 대체할 수 없는 여악의 고유 영역이었다. 1795년(정조 19년) 내연 때 남자 악공이 휘장 밖에서 연주하는 제도가 정례화되면서 관현맹인의 활동이 축소된 이후에도, 이들은 여성 의례 음악의 한 축으로서 조선조 말까지 존속했다.
주나라 관직의 고몽(瞽矇)과 춘추시대의 뛰어난 맹인 악사 사광(師曠)에서 보듯이 맹인 악사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조선시대 관현맹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이 발달해 음(音)을 잘 살필 수 있는 장점' 뿐 아니라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라는 인도적 인식과 ‘남녀유별이 엄격한 성리학적 사고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경국대전』 『악학궤범』 『풍정도감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순조순원왕후상호도감의궤(純祖純元王后上號都監儀軌)』(규13344) 김종수, 『의궤로 본 조선시대 궁중연향문화』, 민속원, 2022.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