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악(中國俗樂)
중국 전래의 속악과 그 체제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을 포괄한 궁정 음악의 한 갈래.
당악은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궁중에서 연주된 중국 전래의 속악(俗樂)이다. 처음엔 당나라 음악(664년 기록)을 뜻했으나, 고려시대에 송의 대성신악 등이 대거 유입되며 '중국 속악' 전반으로 개념이 확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교방과 대악서의 좌방에서 향악과 구분되어 연주되었다. 조선 세종 대에 〈금척〉 등 새로운 정재가 창작되기도 했으나, 양란 이후 향악과 융합(향당교주)되며 급격히 쇠퇴하였다. 조선 말기 대부분 소멸하여 현재는 〈보허자〉, 〈낙양춘〉 등 당피리 중심의 소수 곡만 남았다. 특히 『고려사』 악지에 남은 당악 기록은 중국 본토에서도 실전된 송대 사악(詞樂)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당악의 유래는 신라가 당(唐)나라의 문물을 선진 문화로 여겨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시기로 소급된다. '당악'이라는 명칭이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664년(문무왕 4)이다. 이는 신라가 백제 멸망 직후, 웅진부성에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보내어 그곳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로부터 군악의 일종인 고취(鼓吹)를 배우게 한 사건을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664년의 기록은 한국음악사에서 당악의 유입을 명시한 최초의 기록이자, '당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확인되는 사례이다. 그러나 664년의 기록이 당나라 음악이 신라에 처음 유입된 시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라는 이미 648년(진덕여왕 2)에 중국식 의관 제도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650년(진덕여왕 4)부터는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664년의 기록 이전부터 당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당 문화 수용 과정에서 당의 음악이 공식적인 '당악' 학습 기록 이전에 이미 다양한 경로로 전래되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이처럼 중국에서 유입된 '당악'이 점차 정착하고 하나의 음악 갈래로 인식되면서, 이와 구별되는 기존 신라 고유의 음악을 '향악'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보이는 '향악'이라는 명칭이나, '향비파(鄕琵琶)'의 경우처럼 악기 이름 앞에 붙은 '향(鄕)'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외래 음악인 '당악'의 유입과 정착을 전제로 하여 자국의 전통 음악을 상대적으로 지칭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불교 의례 음악에서도 당나라에서 유입된 범패를 '당풍(唐風)'이라 하고, 신라 고유의 범패를 '향풍(鄕風)'으로 구분한 사례 역시 당악의 유입이 한국 음악 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 당악의 범주 당악의 범주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하였다. 좁은 의미의 당악은 618년부터 907년까지 존속했던 당나라의 속악이고, 넓은 의미로는 고려시대 이후 수용된 중국의 송(宋), 원(元), 명(明)의 음악을 아우르며, '중국 속악' 전반을 가리킨다. 당악의 범주는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향악과 대비되는 음악갈래로 전승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향악과 당악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의 본래 유래 뿐 만 아니라 황종(黃鍾)의 음고를 'c'로 잡고 당피리(唐觱篥)가 중심이 되어 연주되는 일부 음악도 당악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본래 향악곡이었던 〈유황곡〉이나 조선에서 창작된 〈해령〉 등이 이 예에 속한다. 반면, 〈보허자〉와 같이 원곡은 당악('c'음고)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로부터 파생된 〈밑도드리〉, 〈웃도드리〉 등은 향악('e♭'음고, 향피리 연주)으로 분류되어 당악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 당악의 구성과 연행 요소 당악은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 악곡, 춤(정재) 및 이를 관장하는 음악 기관과 독자적인 편성 방식을 통해 구성되고 연행되었다. 당악 범주의 악무에 사용된 악기의 종류는 『고려사』 「악지」 당악편과 『악학궤범』 권7의 ‘당부악기’ 목록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방향, 퉁소, 적, 피리, 비파, 아쟁, 대쟁, 장구, 교방고, 박이, 조선전기에는 방향 박 교방고 월금 장고 당비파 해금 대쟁 아쟁 당적 당피리 퉁소 태평소가 당악기 범주에 속했는데, 이 중 비파, 피리, 적은 향악기와 구분하기 위해 당비파, 당피리, 당적이라고 불렀다. 현재, 당악곡 연주는 기본적으로 당피리, 당적, 대금, 해금, 장구, 방향 및 편종과 편경의 구성되며 당피리가 주선율을 담당한다. . 당악기의 악대 편성은 관현악 연주 및 노래, 중국 전래의 춤 반주에 수반되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춤과 노래가 결합된 모음곡인 대곡(大曲) 7종(〈헌선도〉, 〈포구락〉 등)과 단독 가창곡인 산사(散詞)가 수록되어 있고, 조선시대 『악학궤범』에는 고려 전승 정재 5종(〈헌선도〉, 〈포구락〉 등)과 조선 창작 정재 9종(〈금척〉, 〈수보록〉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노래의 경우, 사악(詞樂)의 선율을 이용하여 《시경(詩經)》의 〈녹명〉, 〈황황자화〉와 같은 시를 얹어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 음계 당악의 음계는 기본적으로 7음음계이며, 조선 전기에는 중국 속악의 영향을 받은 *속악조(俗樂調)*와 *신음계(新音階, 하치조 下徵調)*의 두 가지 유형이 존재했다. 속악조는 〈보허자〉와 〈여민락〉 등의 악곡에서 확인되며, ‘황-태-고-중-임-남-무’로 구성된 7음음계이다. 이에 반해 신음계는 〈풍안지악〉과 〈낙양춘〉에서 나타나며, ‘황-태-고-중-임-남-응’의 구조를 지닌다. 이후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일부 악곡에서는 7음음계가 아닌 5음음계로 축소·변형되는 사례도 확인된다. ○ 당악의 용도 당악은 주로 궁중의 연향(잔치)과 각종 의례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이전의 용도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 오례 중 주악이 동반되는 국왕의 행차 및 연향, 일부 제례 일부에서 의주에 근거하여 악가무가 연주된 사실이 확인된다. 노래와 춤, 연주로 구성된 당악정재의 연행이 당악 전승의 주요 계기였으며, 당악기와 향악기가 혼합 편성된 악대는 아악이 사용되지 않는 문소전 제례 및 연향에서 당악곡 및 향악곡을 연주했다. ○ 담당부서 및 운용 궁중음악의 한 갈래로 전승되어 온 당악은 향악과 함께 국가의 음악기관에 의해 관장되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기록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좌방과 우방 제도를 두어, 당악은 좌방악(左坊樂)이라 하고, 향악을 우방악(右坊樂)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져 좌방(당악)과 우방(향악)의 구분이 유지되었고, 연향에서의 주악 위치는 당악은 서쪽에, 향악은 동쪽에 배치하는 전통이 있었다. 악원의 교육 및 연행은 고려시대에는 대악서와 관현방에서, 조선전기에는 전악서에서 담당하다가 장악기구의 변천에 따라 장악원에 통합되었다. 『경국대전』의 악공 취재조에 당악 전공자의 취재 악곡이 별도로 명시되어 있었다. ○ 역사적 전개 고려시대에는 당악의 개념이 '당나라 속악'에서 '중국 속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광종(光宗) 대에 처음 송(宋)의 속악기와 악공을 수입하고 교방(敎坊)을 설치하였으며, 성종 대에는 유교 의례 정비와 함께 대악서를 두었다. 문종대에는 송의 속악을 적극 수용하여 1073년 〈포구락〉, 1077년 〈왕모대가무〉 등 새로운 정재가 교방에서 공연되었다. 특히 1114년(예종 9) 북송 휘종이 보낸 대성신악(大晟新樂)과 악보, 악기 등을 대거 수용하였는데,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당악은 문종 대 유입된 곡들보다 이 시기 예종 대에 유입된 송의 사악(詞樂)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원 간섭기 이후로는 교방이 쇠퇴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는 건국 초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전악서(속악)와 아악서(제례악)를 답습하였으나, 세종 대에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세종 대에 박연 등이 아악을 바로잡으면서 아악서는 진정한 제례악을, 전악서는 속악(좌방-당악, 우방-향악)을 전담하게 되었다. 또한 〈금척〉, 〈근천정〉 등 새로운 당악 정재 9종이 창제되었고, 〈여민락〉, 〈풍안지악〉 같은 당악 음계 기반의 신곡도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향악기와 당악기를 혼합 편성(향당융합)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궁중 음악이 치명타를 입으며 당악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조 대 연향(1795) 기록에서는 당악 〈여민락〉이 향악 정재에 쓰이는 등 향·당의 구분이 모호해졌으며, 특히 〈향당교주(鄕唐交奏)〉가 (훗날 〈관악영산회상〉의 〈상령산〉)라는 악곡이 기존 당악 반주곡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속악원보』에는 〈보허자〉, 〈낙양춘〉 등 극소수의 당악곡만 수록되었으며, 조선 전래의 당악은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에 전승되는 당악은 고려 전래의 〈보허자〉, 〈낙양춘〉과 조선 창작곡 〈여민락만〉, 〈여민락령(본령)〉, 〈정동방곡〉 등 소수이다. 이 곡들은 제례악(진찬악 〈풍안지악〉 등)을 제외하고는 본래의 의례나 연향에서의 주악 기능과 거리가 멀어졌고, 당피리가 중심이 되고 황종을 'c'음고로 하는 무대용 관악 합주곡으로 주로 연주되고 있다.
한국음악사에서 당악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로 소급되지만, 이 시기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당악은 『고려사』 「악지」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전하고 있어, 이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당악은 주로 송대의 사악에 편중되었다는 특징이 있지만,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여기에는 중국 본토에서는 이미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귀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현전하는 작품과 제목은 동일하면서도 가사나 형식 등 내용이 다른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의 당악 자료는 한국음악사 연구의 중요한 자산일 뿐만 아니라, 원형이 사라진 중국 속악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 실체를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로서 중국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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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