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소재지
현재 진감선사탑비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총림 쌍계사(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에 위치하고 있다.
③ 제작 연대 및 제작자
진감선사탑비는 통일신라시대인 887년에 하동 쌍계사 대웅전 계단 아래 세워졌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비명을 짓고 이수의 ‘당해동고진감선사비(易矢海東故眞鑑禪師碑)’ 아홉 글자를 썼다. 글씨는 승려 형영(敻榮, ?~?)이 새겼다고 전한다. 조각가는 알 수 없다.
탑비의 제작이 처음 거론된 것은 886년(헌강왕 12)으로, 신라 궐내직 내공봉(內供奉)을 역임하던 제7관등 일길간(一吉干)의 양진방(?~?)과 관청 숭문대(崇文臺)의 관원 정순일(?~?)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비문의 주인공인 신라 고승 혜소는 774년(혜공왕 10)에 태어나 850년(문성왕 12)에 입적하였는데, 문성왕 당시 탑비를 만들지 않은 것은 그의 유언 때문이다. “탑을 세워 유해를 보관하지 말고, 명을 지어 나의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고 전하였는데, 이 유언을 따라 사후(死後) 당시 옥천사 동쪽 봉우리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886년, 후세에 승려 혜소의 행적을 전하는 것의 중요함을 피력한 두 관료의 건의에 의해 탑비 제작이 시작되었다. 헌강왕은 시호를 ‘진감선사’로 정하고, 탑명을 ‘대공령탑’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탑비가 완성되기도 전에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다. 정강왕은 당시 ‘옥천사’였던 사찰명을 ‘쌍계사’로 개칭하고,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당시 29세의 최치원에게 비명(碑銘)을 짓도록 명하였다.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은 승려 형영(敻榮, ?~?)이 맡았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탑비의 제작 연월을 기록하였는데,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를 빌려 “광계(光啟) 3년 7월(月) ○일(日)”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정강왕이 재위 2년 만에 병사하고, 그의 누이동생인 진성왕이 왕위에 오른 시기 역시 같은 해 7월이다. 그러나 비문 중 날짜 부분이 훼손되어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탑비가 세워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 『두산백과』에는 정강왕 2년으로,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는 진성여왕 원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④ 구성 및 내용
내용은 크게 서(序)와 명(銘)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39행에 걸쳐 새겨 놓았다. 1행에는 탑비의 명칭을 제시하였고, 2행에는 찬ㆍ저자와 그의 이력을 밝혔다. 3행부터 7행 44자까지는 『논어』ㆍ『맹자』ㆍ『유마경』ㆍ『대범천왕문불결의경』 등 유교와 불교의 경전 속 사례를 비교하며, 두 종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7행 45자부터 29행 51자까지는 선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인데,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구분 | 내용 |
|---|---|
| 7행 45자~11행 23자 | 선사의 가족력과 출생, 성장기의 일화 |
| 11행 24자~15행 | 당(唐) 유학기(출가, 수계, 수행), 외모 묘사 |
| 16행~25행 68자 | 귀국 후 일화(흥덕왕, 민애왕, 장백사, 옥천사), 입적 |
| 25행 69자~29행 51자 | 선사 성품과 범패 연행 |
7행부터 시작된 선사의 일대기를 19행에 걸쳐 상세히 기술하고, 그에 더하여 성품과 특이 사항을 4행에 걸쳐 서술하였는데, 그중 제28행 57자부터 29행 51자까지 총 65자가 범패와 관련한 내용이다. 29행 52자부터 35행까지는 탑비의 제작 유래와 과정을 담았고, 이로써 3행부터 35행까지의 서문(序文)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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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
(번역)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것 같았다. 구슬픈 곡조[側調]와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워 여러 천신들을 기쁘게 하고 먼 곳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배우려는 사람이 학당에 가득하였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어산의 오묘함을 익히는 사람들이 다투어 코를 쥐고-중국 사안(謝安)의 일화- 옥천의 남은 소리를 본받으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
36행부터 38행은 앞서 서문의 내용을 명(銘)으로 정리하였다. 명은 8언(言) 1구(句)의 형태이며, 총 20구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39행에는 건립 시기와 문장을 비석에 새긴 각자(刻者)를 밝히고 있다.
⑤ 역사적 변천 1725년(영조 1년) 돌이 파손되고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판각본을 만들었다. 현재 전승되는 진감선사비명은 이 판각본을 통해 전승되는 것이다. 목판본의 발문(跋文)은 단숙(端肅)이 짓고, 붕택(鵬澤)이 비문의 글을 목판에 맞게 배열하였으며, 대심(大諶)이 일을 맡고 광선(光先)이 글자를 세겼다. 이 내용은 ‘진감선사비명탁본’에 남아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많은 탁본 중 고양시 원각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탁본첩이 글자의 누락 없어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목판은 총 8판으로, 탁본첩은 1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영진(梁映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