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 진감선사탑비문(眞鑑禪師塔碑文),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
887년 신라 학자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신라 고승 혜소의 일대기를 엮은 글.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에 세워진 신라 승려 혜소의 탑비에 새겨진 글이다. 헌강왕 12년(886)에 탑비의 건립을 명하였고, 정강왕 2년(887)에 학자 최치원이 비문을 집필, 승려 환영이 글을 새겨 완성하였다. 한반도 불교음악의 전승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국내 사료로,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을 거쳐 ‘범패(梵唄)’ 형태의 불교음악이 도입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고승 혜소(慧昭, 774~850)가 열반에 든 지 36년이 지난 886년(헌강왕 12), 헌강왕은 관료 양진방(楊晉方)과 정순일(鄭詢一)의 건의로 승려 혜소를 진감선사(眞鑑禪師)라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 세우기를 허락하였다. 헌강왕 사후 887년(정강왕 2년), 왕위를 이어받은 정강왕이 진감선사가 묻힌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雙溪寺)로 개칭하고, 당(唐)에서 돌아온 최치원(崔致遠, 857~?)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여 탑비를 건조하였다.
① 구조와 형태
거북 모양의 받침돌 귀부(龜趺)와 비문이 새겨진 몸체 비신(碑身), 용과 연꽃으로 장식된 머릿돌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363cm이다. 귀부와 이수는 화감암으로,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귀부는 다시 거북 모양의 등갑, 다리와 머리, 비신을 세우기 위한 비좌(碑座)로 구분하는데, 등갑에는 귀갑문(龜甲文)을 세기고, 얼굴은 용의 형상으로 묘사하였으며, 비좌는 구름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비신에는 2,423자의 비문을 해서체(楷書體)로 새겼는데, 높이는 213m이고, 너비는 약 1m, 두께는 22.5cm이다. 이수의 중앙에는 “당해동고진감선사비(唐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전자체(篆字體)로 비석의 명칭을 밝히고, 주변을 용과 구름, 연꽃 등으로 장식하였다. 탑신의 가장 위쪽에는 연꽃 받침 위에 보주(寶珠)를 장식하여 마무리하였다.
② 소재지
현재 진감선사탑비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총림 쌍계사(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에 위치하고 있다.
③ 제작 연대 및 제작자
진감선사탑비는 통일신라시대인 887년에 하동 쌍계사 대웅전 계단 아래 세워졌다. 비명(碑銘)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썼으며, 글씨는 승려 환영(奐榮, ?~?)이 새겼다고 전한다. 조각가는 알 수 없다.
탑비의 제작이 처음 거론된 것은 886년(헌강왕 12)으로, 신라 궐내직 내공봉(內供奉)을 역임하던 제7관등 일길간(一吉干)의 양진방(?~?)과 관청 숭문대(崇文臺)의 관원 정순일(?~?)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비문의 주인공인 신라 고승 혜소는 774년(혜공왕 10)에 태어나 850(문성왕 12)에 입적하였는데, 문성왕 당시 탑비를 만들지 않은 것은 그의 유언 때문이다. “탑을 세워 유해를 보관하지 말고, 명을 지어 나의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고 전하였는데, 이 유언을 따라 사후(死後) 당시 옥천사 동쪽 봉우리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886년, 후세에 승려 혜소의 행적을 전하는 것의 중요함을 피력한 두 관료의 건의에 의해 탑비 제작이 시작되었다. 헌강왕은 시호를 ‘진감선사’로 정하고, 탑명을 ‘대공령탑’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탑비가 완성되기도 전에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다. 정강왕은 당시 ‘옥천사’였던 사찰명을 ‘쌍계사’로 개칭하고,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당시 29세의 최치원에게 비명(碑銘)을 짓도록 명하였다.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은 승려 환영(奐榮, ?~?)이 맡았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탑비의 제작 연월을 기록하였는데,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를 빌려 “광계(光啟) 3년 7월(月) ○일(日)”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정강왕이 재위 2년 만에 병사하고, 그의 누이동생인 진성왕이 왕위에 오른 시기 역시 같은 해 7월이다. 그러나 비문의 일부가 훼손되어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탑비가 세워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현재 『두산백과』에는 정강왕 2년으로,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는 진성여왕 원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④ 구성 및 내용
내용은 크게 서(序)와 명(銘)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39행에 걸쳐 새겨 놓았다. 1행에는 탑비의 명칭을 제시하였고, 2행에는 찬ㆍ저자와 그의 이력을 밝혔다. 3행부터 7행 44자까지는 『논어』ㆍ『맹자』ㆍ『유마경』ㆍ『대범천왕문불결의경』 등 유교와 불교의 경전 속 사례를 비교하며, 두 종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7행 45자부터 29행 51자까지는 선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인데,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구분 | 내용 |
---|---|
7행 45자~11행 23자 | 선사의 가족력과 출생, 성장기의 일화 |
11행 24자~15행 | 당(唐) 유학기(출가, 수계, 수행), 외모 묘사 |
16행~25행 68자 | 귀국 후 일화(흥덕왕, 민애왕, 장백사, 옥천사), 입적 |
25행 69자~29행 51자 | 선사 성품과 범패 연행 |
7행부터 시작된 선사의 일대기를 19행에 걸쳐 상세히 기술하고, 그에 더하여 성품과 특이 사항을 4행에 걸쳐 서술하였는데, 그중 제28행 57자부터 29행 51자까지 총 65자가 범패와 관련한 내용이다. 29행 52자부터 35행까지는 탑비의 제작 유래와 과정을 담았고, 이로써 3행부터 35행까지의 서문(序文)을 마친다.
(원문)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
(번역)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것 같았다. 구슬픈 곡조[側調]와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워 여러 천신들을 기쁘게 하고 먼 곳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배우려는 사람이 학당에 가득하였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어산의 오묘함을 익히는 사람들이 다투어 코를 쥐고-중국 사안(謝安)의 일화- 옥천의 남은 소리를 본받으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
36행부터 38행은 앞서 서문의 내용을 명(銘)으로 정리하였다. 명은 8언(言) 1구(句)의 형태이며, 총 20구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39행에는 건립 시기와 문장을 비석에 새긴 각자(刻者)를 밝히고 있다.
진감선사탑비는 한반도 불교음악의 전승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국내 사료라는 점에서 음악학적 의의를 가진다. 이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을 거쳐 ‘범패(梵唄)’ 형태의 불교음악이 도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및 일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8~9세기 한반도의 불교음악 전승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이 외에도 문장가로 유명한 최치원이 비문을 찬술하고 직접 글씨를 쓴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ㆍ예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특히 최지원의 대표적인 네 가지 비명,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것으로, 대부분의 사찰에서 교재로 쓰일 만큼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1962.12.20. 국보 지정
곽승훈,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 한국사학, 2005. 윤소희, 『한ㆍ중 불교의례와 범패』, 민속원, 2023. 이우성, 『신라사산비명 교역』, 창비, 2010.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최준옥 편, 『(국역)고운선생문집下』, 학예사, 1973. 국사편찬위원회(https://db.history.go.kr/)
양영진(梁映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