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과 소금의 중간 크기 대나무 관대에, 취구와 여섯 개의 지공을 가진 가로로 부는 관악기
요약
중금은 대금과 소금의 중간 크기 대나무 관대에 취구와 여섯 개의 지공을 가진 가로로 부는 관악기이다. 대금과 재료 및 형태, 제작 방법등이 같다. 『삼국사기』(1145)에 신라 삼죽(三竹) 중 하나로 처음 등장하며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삼죽의 체계를 유지하는 주요 악기로 전승되었다. 현재는 연주 편성에서 제외된 실전 상태이다.
유래
중금은 『삼국사기』(1145) 권32 「잡지」 중 '신라악' 항목에 대금·소금과 함께 ‘향삼죽(鄕三竹)’, 또는 ‘삼죽적(三竹笛)’의 하나로 등장한다. 대금·소금과 공유된 악조명과 중금 곡이 245곡이었다는 기록을 통해, 중금이 대금·소금과 함께 대나무로 만든 횡적류 악기의 대·중·소 체계를 유지하는 악기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역사적 변천
중금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고려사』 권80 「식화지」에 따르면 1076년(문종 30)에는 대악관현방 소속 교방악사 중에 중금업사(中笒業師) 1명이 있었고, 고려의 문학작품 <한림별곡>과 익재 이제현의 시에 중금 연주 정황이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중금이 궁중과 민간에서 두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의 속악조에 중금은 ‘열 세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전기의 『악학궤범』에 중금은 ‘제도 및 악보가 대금과 같다(中笒小笒制及譜同)’는 설명이 부기되어 있고, 구멍이 13개인 점은 『고려사』 「악지」의 기록과 일치하여, 악기의 전승이 변화없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중금 용도는 주로 궁중의 제례 및 연례악에 대금·소금과 함께 편성된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국조오례의』 에 종묘제례의 헌가 및 전정헌가에 악현(악기배치) 모두에 중금이 포함되었으나, 『악학궤범』(1493)에서는 전정헌가에서 제외되어 그 용도가 축소된 경향을 보인다. 종묘제례에서의 용도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대한제국기의 『대한예전』 기록에 중금이 종묘 헌가 뿐만 아니라 다른 속악의 진설에서 편성된 예가 보이며, 1898년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신 경효전 악기를 제작할 때도 중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르면, 궁중악기 목록 및 사진집 자료에 중금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이 시기의 제례악 악현에서는 중금이 생락되고 있어, 그 용도가 점차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왕직아악부에 펴낸 『악리ㆍ악제』(1930년대)에 중금이 전공 악기가 아닌 보통 악기로 분류된 점은 그 중요도가 약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중금은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을 뿐 실제 연주 편성에는 들지 않고 있다.
중금은 현재 연주에서 사용되고 있지는 않으나 대금, 소금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연주되었던 신라 삼죽(三竹) 중 하나로 한국 전통음악을 대표하는 가로로 부는 관악기였으며,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되어 그 명맥을 유지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악기였다. 특히 세종류의 현악기 ‘삼현’과 짝을 이루도록 대·중·소의 체계를 갖춰 악기 편성에서 ‘3’의 상징을 완성하고자 했던 음악적 사고를 드러내는 악기로서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