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와 형태
중금은 재료와 형태, 구조가 대금과 거의 같다. 다만, 대금은 취구와 청공, 지공, 칠성공으로 구성되었으나, 중금의 경우, 청공의 유무에 변화가 있었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하는 중금은 취구 한 개, 지공 여섯 개이고, 칠성공은 한 개부터 다섯 개까지 편차가 있으며 청공은 없다. 악기의 규격은 현재 국립국악원 소장 중금의 경우, 길이 67.7cm, 지름 2.7cm(보유 424)와 길이 71.7cm, 지름 3.3cm(보유 253)이확인되며,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에서 펴낸 『이왕가 악기』 소재 중금의 경우, 대금의 길이는 2척 5푼 4촌(약 76.98cm)에서 대금의 취구 있는 부분만큼 짧은 약 70cm정도로 추정된다. 한편, 현재 남아있는 중금에 청공이 없지만, 『악학궤범』 ‘퉁소’ 항목을 참고하면 중금의 청공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퉁소의 청공을 설명하면서 ‘상단에서 4치쯤 되는 곳에 1공을 뚫고, 갈대의 속 청을 붙이고 부는데, 갈대 속청이 진동하여 소리가 ’청‘하므로, 청공이라고 한다. 대금, 중금, 소금에도 이같이 청공이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조선시대 의궤류의 도설에서는 중금의 도상이 확인되지 않아 그간의 변화를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의 사진 자료 중에는 『조선아악기사진첩』과 같이 청공이 있는 것과 『이왕가악기』와 같이 청공이 없는 것 두가지가 있다. 따라서 현재 유물로 전하는 중금에 청공이 언제 생략되었는지, 『조선아악기사진첩』에 중금이라고 표기된 것을 중금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관찰이 필요하다.

○ 역사적 변천
중금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고려사』 권80 「식화지」에 따르면 1076년(문종 30)에는 대악관현방 소속 교방악사 중에 중금업사(中笒業師) 1명이 있었고, 고려의 문학작품 <한림별곡>과 익재 이제현의 시에 중금 연주 정황이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중금이 궁중과 민간에서 두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의 속악조에 중금은 ‘열 세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전기의 『악학궤범』에 중금은 ‘제도 및 악보가 대금과 같다(中笒小笒制及譜同)’는 설명이 부기되어 있고, 구멍이 13개인 점은 『고려사』 「악지」의 기록과 일치하여, 악기의 전승이 변화없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중금 용도는 주로 궁중의 제례 및 연례악에 대금·소금과 함께 편성된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국조오례의』 에 종묘제례의 헌가 및 전정헌가에 악현(악기배치) 모두에 중금이 포함되었으나, 『악학궤범』(1493)에서는 전정헌가에서 제외되어 그 용도가 축소된 경향을 보인다. 종묘제례에서의 용도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대한제국기의 『대한예전』 기록에 중금이 종묘 헌가 뿐만 아니라 다른 속악의 진설에서 편성된 예가 보이며, 1898년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신 경효전 악기를 제작할 때도 중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르면, 궁중악기 목록 및 사진집 자료에 중금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이 시기의 제례악 악현에서는 중금이 생락되고 있어, 그 용도가 점차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왕직아악부에 펴낸 『악리ㆍ악제』(1930년대)에 중금이 전공 악기가 아닌 보통 악기로 분류된 점은 그 중요도가 약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중금은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을 뿐 실제 연주 편성에는 들지 않고 있다.





홍순욱(洪淳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