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농악인으로만 구성된 농악 연행 단체. 또는 이들의 연예 활동과 공연 양식.
최초의 여성농악단은 1959년 남원에 위치한 국악원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지방의 국악원은 일제 강점기의 권번과 유사한 기능을 띠며 전문적인 국악 공연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 역할을 했다. 당시 남원국악원에서 실기를 가르치는 교수자는 김영운, 강도근 같은 판소리 예인들이었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여성 학습자들의 교육을 맡아 전문적인 공연자를 육성하였다. 남원국악원에서 여성 농악 공연을 계획하게 된 계기는 당시 국악원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본격적인 공연 단체로 조직되었다고 볼 수 없는 한시적 기획 속에서 추진되었다. 남원여성농악단 출현 이후로, 1961년에는 같은 남원 지역에서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이 공식 출범하게 된다. 이 단체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최초로 공식화된 여성 농악 단체라는 점에서이다.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은 앞의 남원여성농악단을 능가하는 대중적 인기와 활동력을 보였고, 국극계의 여성 간판스타처럼 스타 농악인이 생겨났으며, 다른 공연예술계를 아울러서도 단연 돋보이는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뛰어난 예능을 보유한 농악 사범들을 유입하여 함께 합숙 유랑을 하며 교육과 공연을 병행했기 때문에 연행 실력은 보증되었고, 스타성이 뛰어난 오갑순 같은 인물이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굴지의 입지를 세우게 된다. 이에 자극을 받아 전국적으로 여성농악단 창단이 유행처럼 번지고, 전라도 지역의 전주여성농악단ㆍ아리랑여성농악단ㆍ정읍여성농악단ㆍ백구여성농악단ㆍ대한여성농악단ㆍ부안여성농악단ㆍ전북여성농악단ㆍ한미여성농악단ㆍ호남여성농악단 등이 성패를 거듭하며 농악 현대사에 자취를 남기게 된다.
해방 이후부터 여성농악이 출현하기 직전과 직후의 연예 동향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여성농악의 존재론적 이해를 돕는 길이다. 농악사에서 이 시간대를 대변하는 상징적 사건은 농악경연대회의 출현 및 전국화 현상이다. 이것이 가져온 국면은 ‘대회굿’과 ‘포장걸립’ 형태의 새로운 공연 현상이 이전 문화 관습에 기반한 농악 공연을 압도하였다는 점이다. 대회굿과 포장 걸립형 농악 공연은 전통 사회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던 생태적 문화예술 양식과는 패러다임과 성격에서 사뭇 달랐다. 공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나 공간 등의 환경적 요소에서도 그렇지만, 공연의 가치 기준이 달라진 것이 더 중요한 대목이다. 즉, ‘인기’와 ‘경쟁’, 그리고 대회 입상 후 기대되는 경제적 ‘수입’이 공연 텍스트 구조화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영향 요인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경연식 농악 공연 문화는 이후 우도 지역을 비롯한 연예 농악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포장 걸립패’라는 전문적인 이동 연예 집단의 활동을 더욱더 활성화시켰으며, 전문성을 요구받는 강도가 나날이 강화되는 농악으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한편, 농악 경연대회 이후로 활동한 남성 포장걸립은 1950년대 이후로 서서히 침잠하게 되는데 여성농악의 인기몰이 세태가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1960년~1970년대의 시대 상황이 주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근대 산업화 기치에 사회 전체가 총력을 기울이도록 내몰리게 되면서 농악이 더 이상 남성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던 당시 환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일련의 선상에서 전통적인 문화 양식으로서의 농악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고, 지방과 농경 중심 사회에서는 주류였던 농악의 자리를 대중매체와 다른 예능들로 대체해 간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초의 여성농악단이 1959년 남원에 위치한 국악원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지방의 국악원은 조선시대의 교방 혹은 일제 강점기의 권번과 유사한 기능을 띠며 전통음악과 무용 등 전문적인 국악 공연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 역할을 했다. 당시 남원국악원에서 실기를 가르치는 교수자는 김영운, 강도근 같은 판소리 예인들이었고, 이들이 직접적으로 여성 학습자들의 교육을 맡아 전문적인 공연자를 육성하였다. 애초 남원국악원에서 여성 농악 공연을 계획하게 된 계기는 당시 국악원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본격적인 공연 단체로 조직되었다고 볼 수 없는 한시적 기획 속에서 추진되었다. 남원여성농악단 출현 이후로, 1961년에는 같은 남원 지역에서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이 공식 출범하게 된다. 이 단체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최초로 공식화된 여성 농악 단체라는 점에서다.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은 앞의 남원여성농악단을 능가하는 대중적 인기와 활동력을 보였고, 국극계의 여성 간판스타처럼 스타 농악인이 생겨났으며, 다른 공연 예술계를 아울러서도 단연 돋보이는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뛰어난 예능을 보유한 농악 사범들을 유입하여 함께 합숙 유랑을 하며 교육과 공연을 병행했기 때문에 연행 실력은 보증되었고, 스타성이 뛰어난 오갑순 같은 인물이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굴지의 입지를 세우게 된다. 이에 자극을 받아 전국적으로 여성농악단 창단이 유행처럼 번지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주여성농악단ㆍ아리랑여성농악단ㆍ정읍여성농악단ㆍ백구여성농악단ㆍ대한여성농악단ㆍ부안여성농악단ㆍ전북여성농악단ㆍ한미여성농악단ㆍ호남여성농악단 등이 흔적을 남긴 단체들이다. 현재 전라북도 무형유산인 정읍농악 상쇠 유지화와 부안농악 전 상쇠 나금추, 그리고 2022년 전라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호남여성농악의 상쇠 유순자 등이 1960~70년대 여성농악 단체 경험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다.
여성농악의 출현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우연이나 돌출적 사건이 아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부터로 소급해 볼 수 있는 여성 연예인의 사회적 등장, 초기 연예 산업의 발아와 여성 스타의 출현 및 파격적 대우, 여성국극의 흥행, 그리고 남성 농악인들이 전개한 포장걸립으로 기반을 닦은 연예 농악 등은 여성이 농악 분야에서 주역을 점유하는 새로운 농악 문화 및 양식의 성립과 관련한 공연 문화적 전조 양상들로 볼 수 있다.
여성농악은 내용면에서 전통에서 출발하여 연예화된 이전 농악, 그것도 ‘호남 우도농악권’이라는 특정 지역의 농악을 연예의 내용으로 취하고 있다. 여성농악의 공연은 농악 외에도 토막소리, 토막창극, 무용, 줄타기 등이 막과 장 형식으로 구분하여 나열식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형식은 민간협률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초 여성농악단이라고 명명되는 남원여성농악단, 그리고 최초로 정식 인가를 받은 춘향여성농악단 단원들은 대부분 판소리나 전통 기악을 농악과 함께 병행하여 학습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포장을 치고 유랑 걸립 활동을 펼친 그 무대에는 농악과 함께 판소리, 민요, 춤, 창극 등 다양한 갈래의 예능이 공연 레퍼토리가 되어 여성농악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였다. 또, 이들의 활동에는 교육과 기타 사무, 기술적 보조를 맡는 남성 예술인들이 동행하였다. 물론 간간이 무대에 함께 올라 연행의 일부를 담당한 남성 예술인이 있기도 하였다.
여성농악은 공연 양식적인 측면에서 극장식 공연이나 민간 협률사들이 지방 순회공연을 할 때의 방식, 그리고 해방 이후 농악 경연대회를 통해 인지도를 얻은 지역 농악단들이 펼친 포장 걸립형 농악 등과 형태 및 내용에서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공연 집단이 맞이하는 환경적 조건에서 오는 불가피한 차이가 있게 되지만 ‘농악 공연’ 자체의 형식과 내용만을 놓고 봤을 때는 축약이 전개된 유사성이 더 크다.
여성농악은 오채질굿, 오방진굿, 농부가, 두마치, 호허굿을 중심으로 판굿을 구성하였으며 남도잡가, 토막극, 판소리, 줄타기, 무용 등의 예능을 단체 재량에 따라 연행 레퍼토리로 구성하였다.
여성농악의 출현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우연이나 돌출적 사건이 아니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로 소급해 볼 수 있는 여성 연예인의 사회적 등장, 초기 연예 산업의 발아와 여성 스타의 출현 및 파격적 대우, 여성국극의 흥행, 그리고 남성 농악인들이 전개한 포장 걸립으로 기반이 닦인 연예 농악 등은 여성이 농악 분야에서 주역을 점유하는 새로운 농악 문화 및 양식의 성립과 관련한 공연 문화적 전조 양상들로 볼 수 있다. 여성농악과 그 공연 양식이 가지는 농악사적 의의는 본격적인 전통 사회에서 형성되어 전승되어 온 공동체문화로서의 농악과는 사뭇 다르다. 즉, 현대 사회의 물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연예 산업형 농악의 출현이라는 점이다. 자본 투자를 한 인물 또는 그 대리인이 수장을 맡아서 단원 모집과 기획ㆍ운영 전반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점, 단원들은 모두 계약을 통해 고용된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연예 산업 성격의 조직과 운영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 예술 장르의 혼종성이 나타나는 점도 두드러지는 역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65호 호남여성농악
노영숙ㆍ권은영, 『향기조차 짙었어라: 여성농악 예인 구술집』, 민속원, 2018. 양옥경, 「농악 공연문화에서 바라본 젠더, 여성, 여성농악」, 『한국음악사학보』 66, 2021. 이경엽ㆍ김혜정ㆍ송기태, 『유순자 상쇠와 호남여성농악』, 심미안, 2012.
양옥경(梁玉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