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비장전(裵裨將傳)
배비장(裵裨將)이 제주 목사, 방자(房子) 등과 공모한 기생 애랑(愛娘)의 미색에 빠져 망신당한 일을 노래한 실창(失唱) 판소리 작품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은 발치설화와 미궤설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작품으로, 18세기 중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판소리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후반 이후 점차 창을 잃고 전승이 단절되었으나, 1900년대 초부터 창극의 주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해 여러 차례 무대화되었으며 유성기 음반 녹음도 이루어졌다. 1972년에는 박동진 명창에 의해 『배비장전』 소설본에 기반한 복원이 시도되었으며, 그의 복원 판소리 《배비장타령》은 1976년에 동아방송에서 방송된 판소리 드라마 〈배비장전〉의 바탕이 되었다.
《배비장타령》의 형성에는 기생의 미색과 꼬임에 현혹되어 이별 시 정표로 자신의 이를 뽑아준 사람의 이야기인 발치설화(拔齒說話), 그리고 기생을 멀리하려다가 오히려 기생의 계교에 빠져 알몸으로 뒤주에 갇힌 채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한 사람의 이야기인 미궤설화(米櫃說話)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각편으로 지목된 이야기는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의 「계림기 이야기(鷄林妓---)」, 『동야휘집(東野彙輯)』의 「경차관이 발가벗은 채로 궤 속에서 나오다(差官出櫃羞裸裎)」 등이다. 다만 창의 전승이 단절된 관계로, 음악적인 측면에서의 형성 과정이나 유래를 파악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 역사적 변천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존재가 확인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은, 1754년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이 남긴 〈가사 춘향가 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 일명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이다. 몽룡이 임기가 다하여 한양으로 돌아가게 된 부친을 따라 떠나게 되면서, 춘향과 몽룡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는다. 이 부분을 다룬 “붉은 동이 좋은 술도 즐겁지 아니하고(紅樽綠酒不成歡), 한 곡조 슬픈 노래 솟아오를 뿐이네(一曲悲歌騰羽微). 장성의 갈희 눈을 차마 어찌 잊으리오(長城忍忘葛姬眼). 제주에서 배비장이 이빨을 남겼듯이(濟州將留裵將齒). 도령은 이별 한에 애끊는다 말을 하고(郎言別恨割肝腸), 춘향은 깊은 은혜 골수에 새긴다네(女道深思銘骨髓).”의 82구에 배비장이 이를 뽑아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현전 《배비장타령》 즉 판소리 사설 정착본에는 배비장이 아닌 정비장이 애랑과 이별하며 앞니를 빼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다음,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1843) 중 “욕망에 빠져 버려 체면도 상관 않고(慾浪沈淪不顧身), 기꺼이 상투 자르고 또 이를 뽑아서(肯辭剃髮復挑齦). 술자리에서 기생을 업은 배비장은(中筵負妓裵裨將) 스스로 가소롭게 멍청이 되었네自是控侗可笑人).”라는 시에는, 〈가사 춘향가 이백구〉의 발치 사건 외에 훼절 사건이 추가되어 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에 연행되었던 《배비장타령》은 이처럼 두 개의 주요 사건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으며, 현전하는 《배비장타령》 사설 정착본의 서사도 이와 같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남긴 「관극팔령(觀劇八令)」 중 “제주도 아녀자가 밝은 대낮에(耽羅兒女白天下) 버들 드리운 정자에 멋진 말 매어 놓고(垂柳長亭綠褭馬), 우는 듯하나 울지 않으며 진심인 듯하나 그렇지 않아(哭不哭眞笑不眞) 기린 풍채 대하되 꼭두각시로 여기네(麒麟楦對儡人假).”의 시구를 통해서도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다만 여기서는 이별 장면을 주요하게 포착하였다. 그 외에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1855)에서는 《배비장타령》을 《강릉매화타령》과 유사한 작품으로 보았던 당대의 인식을 기록해 두었으며,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단가 〈오섬가(烏蟾歌)〉에서는 “또 웃을 일 있는 것이 제주 기생 애랑이가 정비장을 후리랴고 강두(江頭)에 이별할 제 거짓 사랑 거짓 울음 두 발을 쭉 버티고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슴 쾅쾅 두다리며 엎어지락 자빠지락 하도 통곡 우는 말이, ‘나아리 떠나신 후 천수만한(千愁萬恨) 첩의 설움 어찌 할꼬 어찌 할꼬.’ 애랑이 하직(下直)하고 돌아서며 웃더구나. 배비장 또 둘러서 궤(櫃) 속에 잡아넣고 무수한 조롱작난(嘲弄作亂) 어찌 아니 허망하며”라고 하여 현전하는 판소리 《배비장타령》 사설 정착본 즉 『배비장전』과 유사한 사건 구도를, “세상의 음양정욕(陰陽情慾) 여천지무궁(如天地無窮)이라, 금할 수는 없거니와 이 사랑 이 설움을 억제하자 할 양이면 부동심(不動心)이 제일이라. 이 사설 지은 것이 비유한 말이로다.”라는 교훈적 주제를 서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는 《배비장타령》을 판소리 열두 마당에 포함시켰으며, 명칭도 ‘배비장타령’이라고 하였다. 다만, 이 작품을 장기(長技)로 하였던 명창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한편, 창의 전승이 끊긴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사설 정착본으로는 1916년 신구서림에서 간행된 일명 ‘신구서림본’ 『신뎡슈샹 ᄇᆡ비쟝젼』과 1950년 국제문화관에서 간행된 일명 ‘김삼불 교주본’ 『배비장전』이 보고되었다. ‘김삼불 교주본’의 경우 저본이 된 전체 75장 분량 필사본의 59장까지만 수록하면서, 「일러두기」를 통해 그 이유를 다음과 밝혔다. 경직된 윤리 의식의 소유자인 배비장이 제주 목사와 기생 애랑의 공모에 의한 꾐에 빠져 알몸으로 헤엄치다가 망신당하는 대목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며, 60장 이후는 문장이나 어법 면에서 이전 부분과 차이가 있어 후인(後人)에 의해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전체 내용을 수록한 ‘신구서림본’ 『배비장전』은 배비장이 동헌에서 크게 망신당한 후 제주 목사의 주선으로 애랑을 맞아들이고, 정의현감으로 부임해 고을을 잘 다스리는 한편 애랑과도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후일담으로 마무리된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서는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명창을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20세기 초부터 공연된 창극 〈배비장전〉은 기존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창이 아닌 새로운 작창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909년 연흥사에서 공연된 〈배비장전〉도 판소리가 아닌 창극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구극 〈배비장가(裴裨將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형태는 토막소리를 분창 혹은 입체창 형식으로 연행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후 1930년대에는 창극 〈배비장전〉이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의 주요한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같은 시기 김홍규(金弘圭, ?~?), 김초향(金楚香, 1900~1983), 김소희(金素姬, 1917~1995) 등, 정남희(丁南希, 1905~1984), 조앵무(曺鸚鵡, ?~?) 등이 이별 장면을 유성기음반에 녹음한 것도 창극 공연의 인기와 무관하지 않다. 1962년 창립한 국립국극단은 3막 11장으로 구성된 〈배비장전〉을 제3회 공연으로 무대화했고 당시 40여 명의 배우를 출연시켰다. 1968년에는 국극정립위원회를 발족해 전승 5가의 정립을 위해 전승 판소리에 기반한 창극이 주로 공연되었는데, 창극 소재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로서 1973년, 2막 9장으로 구성된 창극 〈배비장전〉을 무대에 올렸다. 1988년에는 ‘해학 창극’을 표방하며 나온 〈배비장전〉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 특히 작품 배경인 제주의 풍광을 주요하게 구현하며 다채로운 볼거리를 확대한 것이 특징이다. 이후로도 창극 〈배비장전〉은 각색, 연출, 작창을 달리하여 여러 차례 공연되었으며, 이는 〈배비장전〉이 지니는 해학성, 관능성, 낭만성, 화려한 볼거리 등 특징에 기인한다. 예그린 악단의 뮤지컬 〈살짜기 옵셔예〉(1966), 마당놀이 〈배비장전〉(1987) 등도 더불어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한편, 1972년에는 박동진(朴東鎭, 1916~2003)이 ‘김삼불 교주본’ 『배비장전』을 저본으로 하여 사설과 장단을 재구성한 약 130분 분량의 《배비장타령》을 발표했다. 결말에는 ‘신구서림본’을 참고하여 후일담을 추가하였는데, 이는 박동진 명창의 복원 판소리 또는 창작판소리 작업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축제 또는 잔치 분위기의 마무리 방식과 통한다. 그리고 동아방송이 1976년 1월 1일부터 1977년 3월 1일까지 제작하여 방송한 10편의 판소리 드라마 가운데 일곱 번째 작품이었던 〈배비장전〉 29부작은 박동진 명창이 복원한 《배비장타령》에 기초한 것이다. 박동진 창 《배비장타령》을 바탕으로 김진욱이 극본을 쓰고, 이길우가 연출했으며, 소리, 해설, 극이 결합된 판소리 드라마 특유의 형식을 취했다. ○ 구성 및 세부 내용 《배비장타령》의 서사는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김경을 따라온 배비장이 여색에 초연한 태도를 보이다가 제주 목사와 기생 애랑, 방자 등의 공모에 빠져 오히려 호색한으로서의 면모를 폭로당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실창 판소리 《배비장타령》의 사설 정착본인 『배비장전』은 기록화된 독서물로서의 소설본에 해당되나, 문체나 구성 면에서 일반의 소설보다 판소리의 성격이 상당히 농후하게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활자본 『배비장전』을, 전래된 판소리 사설의 창작 방식과 신작 구소설의 창작 방식이 결합하여 형성된 소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창과 아니리로 구연되던 판소리 사설에서 기록문학으로서의 소설로 이행되기 전, 구활자본의 형태로 출간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설의 짜임이나 표현을 살펴보면,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김경 일행이 풍랑을 만나 고난을 겪게 되자 비장들이 자탄을 늘어놓는 장면은 전승 판소리 《적벽가》의 〈군사설움타령〉과 흡사하고, 목욕 중인 애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배비장이 방자에게 질문하는 장면은 전승 판소리 《춘향가》의 〈금옥사설〉과 비슷하다. 그 외에 〈기생점고〉, 〈청도기 사설〉, 〈새타령〉 등이 일종의 삽입가요처럼 작품에 포함되며 판소리적 성격을 강화한다. 한편 1972년에 복원된 박동진의 《배비장타령》은 그 사설이 이국자의 『판소리 연구』(정음사, 1988)에 수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공연 정보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창본은 아니리와 창(唱)으로 구분되며, 장단은 ‘진양, 중몰이, 중중몰이, 엇중몰이, 잦은몰이, 엇몰이, 휘몰이, 성음’ 등으로 표기해 두었다. 전반부의 정비장과 애랑의 이별 대목 중 정비장이 애랑에게 각종 세간과 물건을 내어주는 창 부분에는 ‘중몰이 경조’라고 하여, 음악적 특징도 부기하였다.
18세기 중반의 〈가사 춘향가 이백구〉에 언급된 데서 알 수 있듯,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인 《배비장타령》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연행된 작품에 해당한다. 작품 형성의 서사적 바탕이 된 것은 발치설화와 미궤설화인데, 판소리 연행 초기에는 발치삽화에 비중이 두어졌으나 점차 미궤삽화 우위의 구성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하층이 공모와 웃음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에 대응하는 변화였다. 풍자와 해학, 골계미가 강조된 작품으로, 비록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판소리 창의 전승은 단절되었으나 소설로 읽히거나 창극으로 공연되는 것은 물론, 연극, 마당놀이, 무용극, 오페라, 뮤지컬 등의 장르로도 활발히 재창작되었다. 또한, 1970년대 박동진 명창에 의해 《배비장타령》의 복원이 이루어진 사실도 음악사적으로 의미 있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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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