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극(國劇), 국악극(國樂劇), 국악(國樂)뮤지컬, 판소리 뮤지컬, 판소리 음악극(音樂劇), 판소리극, 신연극(新演劇), 구극(舊劇), 구연극(舊演劇), 구파극(舊派劇), 가극(歌劇)
여러 명의 배우가 창(唱), 대사, 연기 등으로 구현해 내는 판소리 기반의 음악극
창극은 1900년대 초, 기존의 전통 판소리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음악극이자 근대극 양식으로 정의된다. 형성기(1900~1929), 발전기(1930~1949), 전환기(1950~1969), 실험기(1970~1999), 확장기(2000~현재)를 거쳐온 창극은 ‘민족극’과 ‘보편적 음악극’의 장르적 정체성을 겸비하며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창극은 ‘창(唱)’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연‘극(劇)’을 포괄하는 음악극을 일컫는 용어이다. ‘창(唱)’은 ‘가(歌)’와 더불어 한자문화권에서 노래를 범칭해 온 개념으로,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여러 가지 노랫소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갈래지만, 창자가 일인 다역을 연행하는 서사 중심의 양식에 가까운 판소리와 달리, 창극은 배우들이 배역을 구분해 극중 인물 각각의 창을 부르고 연기하는 극 중심의 양식에 가깝다. 현전하는 근대적 음악극 양식으로서의 창극이 출현한 시기는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새로운 공연 양식이 비로소 ‘창극’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00년대에는 이전까지 연행해 온 전통 판소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신연극(新演劇)’이라고 불렀지만, 191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신파극이 인기를 끌자 그 상대적인 차이를 보이기 위해 ‘구연극(舊演劇)’ㆍ‘구파극(舊派劇)’ㆍ‘구극(舊劇)’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1920년대에 ‘창극’이라는 명칭이 언론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춘향가(春香歌)와 흥부전(興夫傳)과 심청가(沈淸歌)를 창(唱)하는 창부(唱夫)들이 극(劇)의 의미(意味)를 해석(解釋)지 못한 결과(結果) 무대(舞臺)의 색조(色調)를 무시(無視)하고 기교(技巧)를 전연(全然)히 몰각(沒却)하야 가극(歌劇)도 아니오, 보통극(普通劇)도 안인 일종(一種)의 변태창극(變態唱劇)?을 아희적(兒戲的) 정신(精神)으로 무대(舞臺)에 올니는 그네들의 소위(所爲) 구파(舊派)”(『동아일보』 1920.5.13.)라고 하면서 ‘변태창극(變態唱劇)’ 끝에 ‘?’를 붙였고, 이로부터 이것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쓰임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창극’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통연희의 중요성과 우수성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이다. 대체로 기존의 판소리와는 다른 ‘새로운’ 음악과 형태라는 점을 강조하는 용례가 다수 발견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 ‘우리나라 고유한 형식의 연극’이라는 뜻을 담아 ‘국극(國劇)’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점차 ‘창극’이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창극의 시초는 1900년대 초, 고종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설립된 서양식 실내극장 협률사(協律社, 또는 희대(戱臺))에서 이루어진 〈춘향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무렵의 창극은 무대장치나 소도구 없이 천장에 전등을 밝히고 흰 포장을 둘러친 다음 여러 창자가 포장 앞에 둘러서서 나누어 맡은 배역의 소리를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극장 무대가 마련됨에 따라 이에 적합한 극 형식의 공연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19세기 후반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면서 성별ㆍ연령ㆍ기량과 같은 창자 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남창(男唱)ㆍ동창(童唱)ㆍ여창(女唱) 등으로 판의 분화를 시도하고, 진채선(陳彩仙, 1847~?)ㆍ허금파(許錦波, 1866~1949) 등 여성 창자를 양성한 데서 창극 성립의 구체적 배경과 동기를 찾기도 한다. 또한, 외부적 영향과 관련하여, 20세기 초 판소리 창자들이 창극 양식을 고안할 당시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와 신파극 등 외국의 공연 양식으로부터 예술적 자극을 받거나 이를 수용하였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1900년대 전후가 한국ㆍ중국ㆍ일본 세 나라에서 자국의 전통연희를 개량의 대상으로 인식해 그 내용과 형식을 바꾸어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창극 역시 그에 따른 근대적 산물로 볼 수 있다.
○ 역사적 변천 창극의 역사적 변천은 형성기(1900~1929), 발전기(1930~1949), 전환기(1950~1969), 실험기(1970~1999), 확장기(2000~현재)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째, 1900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시기는 단순한 판소리 분창(分唱) 형태로 출발한 창극이 차츰 연극의 무대장치ㆍ소도구ㆍ의상ㆍ효과 등을 도입하며 극 양식을 갖추기 시작한 ‘형성기’에 해당한다. 초기 창극으로 알려진 것은 1902년 협률사 소춘대유희의 〈춘향이놀이〉ㆍ〈심청전〉 등으로, 특히 〈심청전〉에 대해서는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가 남긴 관극 기록도 있다. 창극은 전통 판소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양식이자 근대의 산물이었지만 등장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전통극 또는 전근대적인 공연 범주로 편입되며 다시금 개량의 대상이 되었다. 1908년에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 〈은세계(銀世界)〉는 이러한 개량 요구에 부응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에는 각종 기생조합과 경성구파배우조합이 창극 공연단체로 기능하였으며, 일부 명창은 ‘김창환협률사’ㆍ‘송만갑협률사’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지방순회공연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명창대회’ 형식의 공연이 유행했으며, 창극 공연을 ‘가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편 1926년에 발매된 일츅죠선소리반 〈춘향가〉는 최초의 창극 전집 음반이라는 점에서 창극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자료에 해당한다. 둘째, 1930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시기는 창극이 ‘창극’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얻고 음악극 양식으로서의 체계를 정립한 ‘발전기’라고 볼 수 있다. 김창환(金昌煥, 1855~1937), 이동백(李東伯, 1866~1949),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등을 주축으로 하여 결성된 조선성악연구회는 현전하는 창극 양식의 기틀을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는 김용승이 각색하고 정정렬이 편극한 창극 〈춘향가〉를 동양극장 무대에서 발표했다. 이 작품은 5시간에 걸쳐 전판을 공연하는 형태였으며, 신극의 영향을 수용해 기존의 판소리 창 중심에서 대사 중심으로의 연극적 변화를 도모하였다. 1936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직속의 창극 공연 조직을 정비해 보다 본격적으로 창극 공연을 주도하며, 기존의 전통 판소리 기반 창극 외에 〈배비장전〉ㆍ〈옹고집전〉과 같은 실창 판소리 기반 창극, 〈편시춘〉ㆍ〈유충렬전〉과 같은 창작 창극 레퍼토리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동양극장의 전문 연극인들과 교류하며 사실주의 양식의 연기술을 발전시키는 한편, 무대 기술을 비롯한 공연 제작 전반에 새로운 영향을 수용했고, 이에 따른 변화는 창극이 명실상부한 대중극으로 부상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전 일츅죠선소리반 〈춘향가〉의 성공에 힘입어 시에론 〈춘향전전집〉(1934), 콜럼비아 〈창극 춘향전〉(1934), 폴리돌 〈창극 심청전전집〉(1935)ㆍ〈창극 화용도전집〉(1935), 빅타 〈춘향전전편〉(1937), 오케 〈춘향전(창극)〉(1937)ㆍ〈흥보전(창극)〉(1941)ㆍ〈창극 심청전〉(1942) 등 다수의 창극 음반이 꾸준히 발매되었다. 초기의 창극 음반은 도창의 비중이 높거나 더늠 위주의 분창에 가까워 판소리적 성격이 강조된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로 갈수록 극적 구성이 치밀해지고 배역이 고정되는 한편, 대사의 비중이 증가하고 합창과 반주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현대 창극에 가깝게 변화하였다. 창극 음반은 판소리에서 입체창으로, 입체창에서 창극으로의 양식적 변모 및 명창 중심에서 작품 중심으로의 질적 전환을 보여준다. 1940년대 전반기 창극은 일제의 전시(戰時) 체제기 문화통제 정책에 따라 철저한 규제 속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선전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1930년대 말까지 활발히 활동했던 조선성악연구회와 화랑창극단은 일제가 결성한 조선연극협회, 그 외 군소창극단은 조선연예협회에 소속되었으며,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요 단원은 조선음악협회에도 가입되었다. 1942년 일제는 조선 공연 문화의 통제를 더욱 강화할 목적으로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발족했고, 이에 따라 기존의 6개 창극 단체는 3개의 단체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연극협회 소속의 조선성악연구회직영 극단 창극좌와 화랑창극단은 조선창극단으로, 조선연예협회 소속의 대동가극단과 선일창극단은 반도창극단, 한양창극단과 반도연무대는 동일창극단으로 통합되어 친일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일본어극이나 시국극, 흥행을 고려한 신작 창극을 왕성하게 공연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창극은 국악원 산하의 ‘국극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광주성악연구회’ㆍ‘조선창극단’ㆍ’국극협회(국극협단)‘ㆍ‘김연수창극단’ 등 창극단도 조직되었다. 국극사의 〈아랑애화〉ㆍ〈선화공주〉ㆍ〈만리장성〉, 국극협단의 〈탄야곡〉ㆍ〈추풍감별곡〉ㆍ〈왕자사유〉ㆍ〈애도성의 삼경〉, 조선창극단의 〈논개〉ㆍ〈왕자호동〉, 김연수창극단의 〈장화홍련전〉ㆍ〈임진왜란과 계월향〉ㆍ〈단종과 사육신〉 등에서 볼 수 있듯 역사나 고전 소재의 창작 창극이 다수 발표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창극 활동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도 동반되었다. 한편, 사회 전반에 걸쳐 민족주의적 지향이 강조된 시기였던 만큼 민족예술을 국가적 예술로 부각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전통극으로서의 창극은 한동안 ‘국극’으로 명명되었다. 1948년 9월에는 박녹주(朴綠珠, 1905~1979)ㆍ김소희(金素姬, 1917~1995)ㆍ박귀희(朴貴姬, 1921~1993) 등이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10월 24일~30일 시공관에서 김무하 각색ㆍ김아부 연출의 〈옥중화〉를 올리며 여성국극의 시작을 알렸다. 바로 다음 해에 서양 음악극인 오페라 〈투란도트〉를 번안한 후속작 〈햇님달님〉이 관중의 큰 호응을 얻으면서 창극계 전반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셋째, 1950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시기는 연극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여성국극이 점차 쇠퇴하고, ‘국립국극단’ 창설 및 ‘국극정립위원회’ 발족 등에 힘입어 창극이 중심에 놓이는 ‘전환기’였다. 물론 1910년대의 기생조합 공연도 여성 배우가 남자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방식을 취하였지만, 여성국극은 기존의 판소리 창을 쉽고 대중적인 음악으로 다듬고 춤과 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무대 장치나 의상ㆍ분장ㆍ조명을 통해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는 등 소리가 중심이 되는 기존 혼성 창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특히 임춘앵(林春鶯, 1924~1975)은 이러한 여성국극 양식 정립에 기여한 인물로, 1952년 〈공주궁의 비밀〉부터 1961년 〈흑진주〉에 이르기까지 3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며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여성국극동지사’ㆍ‘햇님국극단’를 선두 주자로 하여, ‘신라여성국극단’ㆍ‘화랑여성국극단’ㆍ‘우리국악단’ㆍ‘낭자국악단’ㆍ‘새한국극단’ㆍ‘진경국극단’ㆍ‘동명여성국극단’ㆍ‘송죽여성국극단’ㆍ‘아랑여성국극단’ㆍ‘신신여성국극단’ㆍ‘새봄여성국극단’ 등 다수의 여성국극 단체가 조직되고, 내부적으로 이합집산이 거듭되는 상황은 오히려 여성국극이 쇠퇴의 길을 걷는 데 일조하였다. 1962년에는 전통문화의 보전과 계승이라는 목적에 따라, ‘국립국극단’이 ‘국립극단’ㆍ‘국립무용단’ㆍ‘국립오페라단’과 함께 국립극장 산하 부설 단체로 출범하였다. 김연수(金演洙, 1907~1974)가 단장, 김소희가 부단장을 맡은 데서 알 수 있듯, 그 중심은 창극이었다. 국립국극단은 같은 해 3월 창극 〈춘향전〉을 명동 국립극장에서 창단 기념으로 공연한 데 이어, 남녀 입체창 형식의 〈판소리 수궁가〉(1962)ㆍ〈판소리 춘향가〉(1963)ㆍ〈판소리 흥부가〉(1964) 그리고 창극 〈배비장전〉(1963)ㆍ〈백운랑〉(1963)ㆍ〈서라벌의 별〉(1964) 등을 무대에 올렸다. 1968년에는 서항석(徐恒錫, 1900~1985)을 위원장으로 하고, 박진(朴珍, 1905~1974)ㆍ이혜구(李惠求, 1909~2010)ㆍ이해랑(李海浪, 1916~1989)ㆍ김소희ㆍ강한영(姜漢永, 1913~2009)ㆍ김동욱(金東旭, 1922~1990)ㆍ김천흥(金千興, 1909~2007)ㆍ성경린(成慶麟, 1911~2008)ㆍ김연수ㆍ박헌봉(朴憲鳳, 1907~1977)ㆍ이진순(李眞淳, 1916~1984) 등이 참여하는 ‘국극정립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국극정립위원회’는 고수나 악사를 무대에 세워 추임새도 하고 극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 판소리의 설명 부분을 도창이라는 이름으로 무대 한편에서 판소리식으로 부르도록 하는 것, 연출 대신 도연(導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등을 판소리 창극화의 방향으로 논의하였으며, 창극 〈흥보가〉(1968)ㆍ〈심청가〉(1969)ㆍ〈춘향가〉(1970)는 당시 논의로부터 나온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넷째, 1970년에서 1999년에 이르는 시기는 이전의 ‘국극’ 용어가 ‘창극’으로 바뀌고, 국립창극단을 중심으로 창극 양식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지속되는 한편, 각 지역에 국공립단체가 창단되면서 지역적 특색에 맞는 창극이 활성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실험기’에 해당한다. ‘국극정립위원회’는 ‘창극정립위원회’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창극정립위원회’ 편극 대본을 바탕으로 1970년 박진 연출의 〈정립 춘향가〉, 1971년 이진순 연출의 〈춘향가〉가 공연되었다. 1973년에는 장충동 국립극장이 신축과 함께 〈성웅 이순신〉을 개관 기념 공연으로 올렸으며, ‘국립국극단’은 ‘국립창극단’으로 개칭했다. 1970년대 창극의 정체성이자 중심은 판소리였다. 판소리 창을 기본으로 하는 음악극인 창극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창이 지속되는 동안 극의 진행을 멈추는 연출적 시도를 했던 1976년 국립창극단의 〈춘향전〉 공연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창극의 본질을 전통 판소리에서 찾던 데서 나아가 창극 자체의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는 방향을 모색하게 된 데에는 허규(許圭, 1934~2000)의 영향이 있었다. 그는 전통 판소리를 바탕에 두면서도, 이를 현대적으로 수용하거나 재창조함으로써 판소리와 구별되는 창극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그의 주도로 국립창극단 창극에 놀이성, 현장성, 전통연희의 미학 등이 도입되었으며, 실창 판소리를 창극화한 〈강릉매화전〉(1978)ㆍ〈가로지기〉(1979), 창작 창극에 해당하는 〈광대가〉(1979)ㆍ〈최병도전〉(1980)ㆍ〈부마사랑〉(1983)ㆍ〈용마골장사〉(1986)ㆍ〈춘풍전〉(1988), 그리고 공연 시간이 4~5시간에 달하는 ‘완판 창극’ 〈흥보전〉(1982)ㆍ〈춘향전〉(1982)ㆍ〈심청가〉(1984)ㆍ〈적벽가〉(1985) 등이 대표작이다. 1990년대부터는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을 통해 창작 창극을 활성화하는 한편, 보편적 음악극으로서의 창극 정립을 지향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페라 연출가와 뮤지컬 연출가가 창극 연출가로 영입되면서 창극에 서양의 음악극 형식을 활용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창(唱)을 판소리에 제한하지 않고 민요ㆍ시조ㆍ가곡ㆍ대중가요까지 수용하는 한편, 서곡ㆍ간주곡ㆍ합창과 같은 서양 음악의 형식을 도입하여 음악적 표현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1992년 남원에 국립민속국악원이 개원하였으며, 비슷한 시기 전북도립국악원도 창극단을 산하 단체로 두고 공연을 시작했다. 전남도립국악원ㆍ남원시립국악단ㆍ광주시립창극단ㆍ정읍시립국악단 등 지역의 국공립단체가 설립되면서 지역 특색을 고려한 창작 창극을 선보이기 위한 실험과 모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의 창극은 대중화와 세계화라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확장기’에 서 있다. 국립창극단은 2002년 창극 100주년을 기념해 ‘세계화 시대의 창극’을 주장하며, 창극의 기획도 전통 판소리에 기반한 창극과 다양한 소재를 취한 번안 또는 창작 창극으로 다변화하였다. 국립창극단 국가 브랜드 공연으로 기획된 창극 〈청〉(2006)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60회 공연에 6만 관객을 동원하며 창극이 지니는 보편적 음악극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독일의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와 함께 한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2011)는 국내는 물론 독일에서도 성공적으로 공연되며 창극 세계화를 위한 도전에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로미오와 줄리엣〉(2009)ㆍ〈메디아〉(2013)ㆍ〈코카서스의 백묵원〉(2015)ㆍ〈오르페오전〉(2016)ㆍ〈트로이의 여인들〉(2016)ㆍ〈소녀가〉(2018)ㆍ〈우주소리〉(2018)ㆍ〈패왕별희〉(2019)ㆍ〈리어〉(2022)ㆍ〈베니스의 상인들〉(2023) 등 외국의 명작을 원작으로 삼아 창극화한 작품도 다수 나왔다. 어린이 창극ㆍ가족 창극ㆍ젊은 창극 등의 기획 공연과 함께 ‘레퍼토리’ 공연 시스템이 정착된 것도 이 시기의 성과이며, 이는 지역의 국악원 및 창극 단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제 창극은 소재나 내용, 음악, 무대, 어법, 연출 등의 측면에서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올리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음악적인 측면에서 보면, 판소리 외의 다른 전통음악은 물론, 서양의 화성법을 차용하거나 현대적인 악기 및 사운드를 활용하는 데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하는 흐름에 따라, ‘국악 뮤지컬’ㆍ‘판소리 뮤지컬’ㆍ‘판소리 음악극’ㆍ‘판소리극’ 등으로 불리는 창극 작품도 일군을 형성하고 있다.
창극은 전통의 계승과 새로움의 창조 사이에서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하며 변화되어 온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서사와 음악, 연극이 만나는 보편적 음악극을 지향하면서도 서구의 음악극에 비견되는 민족극적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이제 창극은 실험과 모색을 넘어, 보편적 공연 원리와 문법을 정립할 시점에 와 있다. 소통하는 판짜기 전략, 절제되고 상징적인 너름새의 활용, 비장과 골계가 교차되는 희곡 구성, 전통 예술의 다각적인 활용, 판소리의 전달력과 음악성 고도화 등이 이를 위한 유효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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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