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창자(唱者)
명창은 판소리를 연행하는 예술적 기량이 탁월하고, 그 소리가 정통성과 역사성을 갖추었으며, 내세울 만한 개성적인 더늠이 있고, 감상층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판소리 발전에 뚜렷하게 기여한 업적이 있는 창자(唱者)에 부여되는 칭호이다. ‘전기 팔명창’, ‘후기 팔명창’, ‘근대 오명창’ 등의 범주와 의의를 통해 판소리 명창의 역사가 판소리 형성 및 발전의 역사와 맥을 함께해 왔음이 확인된다.
유만공(柳晩恭, 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1843)는 ‘명창(名唱)’의 용례가 나타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문헌에 해당한다. 그는 한 판소리 창자가 문희연(聞喜宴)에서 단가와 판소리 《춘향가》를 부르는 장면을 “춘방(春榜)이 나자마자 광대를 선발하며, 명창도 데려다가 좋은 밤을 고르네. 영산을 부르고 나면 연희가 벌어지니, 한바탕 기이하고 빼어난 춘향가(纔過春榜萃優倡 名唱携來卜夜良 歌罷靈山呈演戱 一場奇絶現春香)”라는 한시로 묘사하면서, ‘명창’의 의미를 “소리 잘하는 것을 명창이라고 한다(善歌曰名唱).”라고 풀이하였다. 이로부터 적어도 19세기 중반에 ‘소리를 잘하는 것’ 즉 음악적 요건으로서의 득음(得音)이 판소리 창자의 연행 수준을 가늠하거나 명창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기준으로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명창’이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기도 한 만큼,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곡ㆍ시조ㆍ민요ㆍ잡가 등 전통 성악 분야에서도 두루 사용되나 ‘전기 팔명창’, ‘후기 팔명창’, ‘근대 오명창’, ‘일고수 이명창’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판소리 분야에 그 쓰임이 집중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 판소리 명창의 역사는 판소리 형성 및 발전의 역사와 맥을 함께한다. 판소리가 형성되어 예술적인 성취를 이룩함에 따라 ‘명창’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고, 이들 ‘명창’을 중심으로 판소리의 양식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기 팔명창(前期八名唱)’, ‘후기 팔명창(後期八名唱)’, ‘근대 오명창(近代五名唱)’ 등은 전부터 있어온 ‘팔명창’, ‘오명창’ 등을 시기적으로 세분화한 개념인데, 이때 5나 8과 같은 수는 정확하게 다섯 명, 여덟 명을 지칭한다기보다 관습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문헌이나 평자에 따라 이들 다섯 명, 여덟 명의 범주를 설정하는 데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전기 팔명창은 19세기 ‘전반(前半)’에 활약했던 ‘여덟 명(八)’의 판소리 명창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권삼득(權三得, 1771~1841)ㆍ송흥록(宋興祿, 1870?~1883?)ㆍ염계달(廉季達, ?~?)ㆍ모흥갑(牟興甲, ?~?)ㆍ고수관(高壽寬, 1764~1843?)ㆍ신만엽(申萬葉. ?~?)ㆍ김제철(金齊哲, ?~?)의 7명에 송광록(宋光祿, ?~?)ㆍ주덕기(朱德基, ?~?)ㆍ황해천(黃海天, ?~?) 중 1명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광대가(廣大歌)〉에서 전기 팔명창에 해당하는 명창들을 중국의 역대 문장가에 비유했다. 그는 여기서 판소리 창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으로 ‘인물 치레’, ‘사설 치레’, ‘득음’, ‘너름새’를 거론하며, 나름의 ‘명창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인물 치레’란 판소리 창자도 배우인 만큼 우선 외모가 반듯해야 한다는 의미로, 단순한 외모를 넘어 인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설 치레’는 판소리의 내용을 이루는 사설의 중요성을, ‘득음’은 판소리의 음악 구현을 위해 필요한 음색ㆍ발성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건이다. ‘너름새’는 춤이나 몸짓ㆍ동작ㆍ표정 등을 이용해 사설이 그려내는 장면을 보조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신위(申緯, 1769~1845)의 〈관극절구십이수(觀劇絶句十二首)〉 제5수 중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은 호남의 소문난 광대(高宋廉牟噪海秋)”, 이삼현(李參鉉, 1807~1872)의 『이관잡지(二官雜誌)』 중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는 자는 권삼득, 모흥갑, 송흥록으로 오늘날 최고로 친다. 이들 바로 앞의 명창으로는 우춘대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라고 하여, 당대 명창의 이름을 밝혔다. 이들 문헌이 명창의 이름만 거론한 데 반해, 경상대학교 소장 『별춘향전』 75장본에서는 권삼득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ㆍ송흥록의 〈범 내려오는 대목〉ㆍ신만엽의 〈새타령〉ㆍ황경순의 〈조자룡 활 쏘는 대목〉 등 일부 전기 팔명창이 남긴 더늠 사설을 수록하기도 했다. “명창 가객들도 차례로 들어와서, 각기 소장대로 노래 한마디씩 하는디, 낫낫마다 명창이다. 〈사명창변사도 잔치〉 삼보 권 선달이 〈놀보타령〉 제비 몰러 나가는 한 대문을 아주 연비연천제로 띄워 나가던 것이었다. [중모리] 제비 호리러 나간다. 제비 호리러 나간다. 막막 평교 너른 들의 엉그벙심 벌여서서, “제비야, 제비야. 나지를 말고 이내 그물로 들오너라. 강남 만리를 머다 말고 이내 그물로 들오너라. 종천이강하여 종지이출할가. 제비야, 제비야. 나지를 말고 이내 그물로 들오너라.” (경상대학교 소장 『별춘향전』 75장본) 전기 팔명창의 경우, 후기 팔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호남 지역에 분포하는 것과 달리 염계달ㆍ모흥갑ㆍ고수관ㆍ김제철 등 경기나 충청 지역 출신을 상당수 포함한다는 특징이 있다. 전기 팔명창은 19세기 전반, 《춘향가》ㆍ《심청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변강쇠타령》ㆍ《옹고집타령》ㆍ《장끼타령》ㆍ《배비장타령》ㆍ《강릉매화타령》ㆍ《무숙이타령》ㆍ《가짜신선타령》 등 판소리 열두 바탕의 완성에 기여했으며, 기존의 향토적인 선율이나 성음에 기반한 덜렁제ㆍ경드름ㆍ추천목 등의 개성적인 창법을 개발했다. 판소리의 예술적 표현력을 확장하는 데 영향을 준 진양조장단 역시 전기 팔명창의 한 명인 송흥록이 충청 출신의 김성옥(金成玉, 1801~1834)과 함께 완성한 것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제시된 바와 같이, 송흥록의 《춘향가》 중 〈귀곡성〉ㆍ모흥갑의 《춘향가》 중 〈이별가〉ㆍ주덕기의 《적벽가》 중 〈조자룡 활쏘는 대목〉 등 다수의 더늠이 이 시기에 생성되었다. 이들의 노력에 따라 판소리 향유층의 폭은 기존의 평민층에서 중인층, 양반층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다음으로 후기 팔명창은 19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활약했던 ‘여덟 명’의 판소리 명창을 지칭하는 용어로, 박유전(朴裕全, 1835~1906)ㆍ박만순(朴萬順, 1830?~1898?)ㆍ이날치(李捺致, 1820~1892)ㆍ송우룡(宋雨龍, 1835~1897)ㆍ김세종(金世宗, 1830?~?)ㆍ장재백(張在伯, 1852?~1907)ㆍ정창업(丁昌業, 1847~1889)ㆍ정춘풍(鄭春風, ?~?)의 여덟 명을 거론하나, 여기에 김정근(金定根, 1830년대 전후?~?)ㆍ김찬업(金瓚業, ?~?)ㆍ한송학(韓松鶴, ?~?)ㆍ김창록(金昌祿, ?~?) 등을 추가로 포함하기도 한다. 후기 팔명창의 경우, 전라도 남부 지역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전기 팔명창과 차이가 있다. 이들은 고도의 기교와 시김새로 판소리의 예술성을 심화하는 한편, 전기 팔명창이 남긴 선율에 기반하여 풍부한 더늠을 개발하였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박유전의 《춘향가》 중 〈이별가〉와 〈사랑가〉ㆍ박만순의 《수궁가》 중 〈토끼화상〉ㆍ정춘풍의 《심청가》 중 〈화초타령〉 등이 이 시기의 주요 더늠에 해당한다. 판소리 유파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도 후기 팔명창 시대의 일로, 동편제ㆍ서편제ㆍ중고제의 분화에 따라 판소리 음악은 예술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 한편, 어전(御殿)에서 뛰어난 판소리를 선보임으로써 명예직이나마 관직을 제수받은 이른바 ‘어전 광대’도 이 시기에 이르러 다수 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근대 오명창은 근대 즉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활약했던 ‘다섯 명’의 판소리 명창을 포괄하는 칭호이다. 김창환(金昌煥, 1855~1937)ㆍ송만갑(宋萬甲, 1865~1939)ㆍ이동백(李東伯, 1866~1949)ㆍ김창룡(金昌龍, 1872~1943)ㆍ정정렬(丁貞烈, 1876~1938)의 다섯 명이 주로 꼽히며, 박기홍(朴基洪, 1850~?)ㆍ김채만(金采萬, 1865~1911)ㆍ유공렬(柳公烈, 1859~1934 이후)ㆍ전도성(全道成, 1864~1940)ㆍ유성준(劉成俊, 1873~1944)ㆍ이선유(李善有, 1873~1949)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근대 오명창의 판소리사적 기여는 해당 시기 급격하게 이루어진 판소리 문화의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낸 데서 찾을 수 있다. 서양식 실내극장과 같은 새로운 판소리 연행 공간에서 공연을 지속하는 한편, ‘김창환협률사’ㆍ‘송만갑협률사’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포장식 이동 극장형의 지방 순회공연을 수행하였다. 판소리로부터 배태된 근대 공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창극(唱劇)의 성립도 근대 오명창을 주축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이 된 조선성악연구회는 현전하는 창극 양식의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성기음반과 라디오라는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근대 오명창은 콜럼비아레코드ㆍ빅타레코드ㆍ시에론레코드ㆍ폴리돌레코드ㆍ오케레코드 등에서 판소리 음반 및 창극 음반을 취입하는 한편, 경성방송국 국악 프로그램의 판소리나 창극 방송 및 생중계에 참여했다. 이들 명창은 자신의 더늠과 장기를 음반과 방송으로 다수 남기는 외에, 전 시대의 전기 팔명창과 후기 팔명창이 구사했던 더늠과 장기도 명창제 음반과 ‘명창조 구연(名唱調口演)’으로 전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명창제’ㆍ‘명창조’ㆍ‘명창극’ㆍ‘팔명창제’ㆍ‘팔도명창’ 등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음반은 녹음에 앞서 창자가 직접 “춘향이 염계달이 소리올시다.” 혹은 “고수관이 사랑가올시다.”ㆍ“만순씨 박선생 퇴끼화상이었다”와 같이 옛 명창의 이름과 더늠 관련 정보를 제시한 것이 특징이며, 근대 오명창으로 분류되는 김창룡과 당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李花仲仙, 1898~1943) 등이 옛 명창의 더늠과 장기를 복원해 부르는 방식이었다. 김창환의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ㆍ이동백의 《적벽가》 중 〈새타령〉ㆍ정정렬의 《춘향가》 중 〈신연맞이〉 등 근대 오명창이 남긴 더늠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도 전한다. 또한, 이 시기에도 김창환ㆍ송만갑ㆍ이동백ㆍ박기홍ㆍ정정렬ㆍ유성준ㆍ김창룡 등이 어전에 나아가 소리를 하고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이에 ‘국창(國唱)’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전통 사회에서는 이처럼 어전 명창 또는 어전 광대를 ‘국창’이라고 평가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나 시도 단위 무형유산 판소리 종목의 보유자로 인정받았거나 전국 규모의 판소리 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판소리 창자를 ‘국창’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현대 판소리에서는 다수의 여성 판소리 창자도 ‘명창’의 반열에 올라 널리 인정받고 있으나, “만일에 기생으로서 잡가나 창극조를 입 밖에 내인다면, 기생의 신분은 아주 파멸이다.”, “조선에서 창극조가 발생한 이래 수백 년간 여류계의 극창가(劇唱家)는 싹터본 일이 없었다.”(정노식, 『조선창극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판소리 음악은 상당 기간 ‘금녀(禁女)’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정노식은 「여류 명창의 유래」 장을 별도로 설정하여, 진채선(陳彩仙, 1847~?)ㆍ허금파(許錦波, 1866~1949)ㆍ강소춘(姜小春, ?~?)ㆍ김녹주(金綠珠, 1898~1927)ㆍ이화중선(李花仲仙, 1898~1943)ㆍ김초향(金楚香, 1900~1983)ㆍ박록주(朴綠珠, 1905~1979)ㆍ김여란(金如蘭, 1907~1983) 등을 여성 명창으로 거론하며 이들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였다.
판소리 창자가 ‘명창’이라는 칭호를 얻는 데는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공인의 맥락이 동시에 작용한다. 예술적 기량의 탁월함, 소리의 역사성과 정통성, 뛰어난 예술적 자기 계발로서의 ‘더늠’, 폭넓은 대중적 지지, 판소리 발전에 기여한 뚜렷한 업적 등이 명창의 지위를 결정하는 보편적인 요건이 되나, 명창에 대한 사회적 수용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도 했다. 판소리 형성기인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상황에 맞게 연극적 상황을 설정하고 기지와 재치를 발휘하여 청ㆍ관중을 웃기고 울리는 능력이, 18세기 중엽에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는 이야기를 독특한 성음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19세기 전반에는 장단에 딱 들어맞게 정확한 발음과 독특하고 매력적인 성음으로 특정 대목을 잘 부르는 능력이, 19세기 후반에는 사설 내용과 형식 간 유기적 관계를 추구하며 사설의 이면에 맞도록 성음과 장단고저의 변화를 추구하는 능력이 명창의 자질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명창’이 판소리 음악이 도달 가능한 예술적 경지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상황 속에서 사회문화적 변화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공인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판소리 무형유산 종목의 보유자로 인정받거나 전국 규모의 판소리 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창자에 ‘명창’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데 더해, 판소리 창자에 대한 존칭으로 일반화하여 사용하는 경향도 있어 이를 문제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인권환, 『판소리 창자와 실전 사설 연구』, 집문당, 2002.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 조세훈, 『한국 판소리의 전승과 도제관계』, 민속원, 2016. 최동현, 『판소리명창과 고수연구』, 문예연구사, 1997. 최혜진, 『판소리 유파의 전승 연구』, 민속원, 2012. 판소리학회 엮음, 『판소리 명창론』, 박이정, 2010. 김기형, 「여류 명창의 활동양상과 판소리사에 끼친 영향」, 『구비문학연구』 7, 1998. 김석배, 「판소리 명창 박록주의 예술세계」, 『구비문학연구』 10, 2000. 김석배ㆍ서종문ㆍ장석규, 「판소리 더늠의 역사적 이해」, 『경북대학교 국어교육연구』 28, 1996. 노연서, 「판소리 명창 설화의 유형과 스토리텔링 방식」, 『판소리연구』 51, 2021. 성기련, 「미의식에 따른 판소리 명창관의 시대적 변화 고찰」, 『한국음악연구』 38, 2021. 송미경, 「판소리 역대 명창 및 더늠에 대한 문화적 기억의 전승」, 『판소리연구』 44, 2017. 이기우, 「명창론」, 『판소리』, 신아출판사, 1988. 이보형, 「고음반에 제시된 판소리 명창제 더늠」, 『한국음반학』 1, 1991. 이보형, 「고음반에 제시된 판소리 명창제 더늠 Ⅱ」, 『한국음반학』 4, 1994. 이보형, 「판소리 팔명창 음악론」, 『문화재』 8, 문화재관리국, 1974. 전경욱, 「판소리 창자론」, 『한국민속학』 21, 1988. 조세훈, 「판소리 명창의 사회적 공인화 과정에 관한 일 연구」, 『민족문화논총』 50, 2012.
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