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갑(非甲)이, 비개비, 비갭이, 양반광대(兩班廣大)
무계(巫系) 출신이 아닌 일반인 출신의 판소리 명창 또는 광대를 일컫는 용어
비가비는 무계 집단이 자신과 다른 일반인 출신의 판소리 명창 또는 광대 집단을 구분하여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로, 이와 관련되는 본격적인 사적 서술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노식은 최선달ㆍ권삼득ㆍ정춘풍ㆍ서성관ㆍ김도선ㆍ안익화 등을 비가비의 예로 거론하였으며, 그 외에 근현대 명창으로 김석구, 임진택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의 ‘비가비’가 신분의 특수성과 관련되는 용어였던 것과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국악을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의 판소리 창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비가비에 대해서는 판소리 또는 국악의 이론과 실기가 조화롭게 발전하고,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고 탐색하는 데 기여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비가비’라는 말의 어원은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첫째, 무계 출신을 ‘가비[甲]’라고 하므로, 무계 출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비가비[非甲-]’라고 부르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천민으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인 사당패에서 거사(居士)의 우두머리를 ‘모가비[某甲-]’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용례가 된다. 둘째, 기생방에서 일반인을 가리키던 말이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계로 전용(轉用) 또는 확산되었을 가능성이다. “무당변 ‘비개비’는 기생변 ‘비가비’에서 발달된 것”이라는 어원론이 그 근거가 된다. 다만 기생 가운데 무계 출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므로, 무계나 기생 집단이 ‘가비’, ‘비가비’라는 공통의 어휘를 서로 공유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무계 출신이 아님에도 판소리 광대나 국악인의 길을 걷는 비가비가 출현한 것은 판소리의 전승 환경이 변화하고 판소리 자체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으로 ‘비가비’라는 호칭 자체가 일반인이 아닌 무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주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무계 출신은 서로를 ‘동간네’라고 부르며 배타적 결속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 능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출하였다. ‘비갑(非甲)이’, ‘비개비’, ‘비갭이’ 등은, ‘비가비’와 발음이 유사한 이칭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변천 비가비에 관한 본격적인 사적 서술의 시도는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이 1940년에 발간한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판소리 창자가 대체로 무계 출신임을 언급하며, “과거 명창(名唱) 중(中)에 결성(結城) 최선달(崔先達), 권삼득(權三得), 정춘풍(鄭春風), 기타 수인(數人)의 비가비(한량(閑良)으로 극가(劇歌)에 능(能)하여 광대(廣大)로 행세(行世)하는 자(者)를 재인(才人) 계급(階級)의 광대(廣大)와 구별(區別)하기 위(爲)한 명칭(名稱)”이라고 정의하였다. 최선달(崔先達, 1726~1805)의 본명은 최예운(崔禮雲)으로, 〈결성농요〉에서 메김소리를 하는 최광순의 8대 조상이 최선달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무과 집안의 향반으로 18세에 악(樂)에 심취하여 누에산 칠성단에서 독공을 통해 판소리 명창의 경지에 올랐다. 또한 그로부터 판소리 광대가 명예직이나마 벼슬을 제수받는 사례가 열린 부분도 주목을 요한다.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안동 권씨 29세손으로 문과 집안의 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익산ㆍ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며 염계달(廉季達, ?~?)ㆍ모흥갑(牟興甲, ?~?)ㆍ송흥록(宋興祿, 1780?~1883?)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설렁제’ㆍ‘덜렁제’ㆍ‘권제’ㆍ‘권마성제’ㆍ‘드렁조’라고 불리는 특유의 창법 또는 악조를 개발하였으며, 〈제비가〉를 통해 더늠의 시초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비가비의 출현은 충청의 양반 정춘풍(鄭春風, 1834?~1901?), 전북의 양반 서성관(徐成寬, ?~?)ㆍ김도선(金道先, ?~?)ㆍ안익화(安益化, ?~?)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정춘풍에 대해서는 ‘남에 고창 신재효요, 북에 정춘풍일 것’이라고 하면서, ‘신재효는 이론으로 승하고, 정춘풍은 실제로 승하였다.’라고 그 차이를 밝혔다. “실제가(實際家)로 당시에 있어서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등과 호유장단(互有長短)이려니와, 그 학식의 우여(優餘)함과 이론의 고상함을 저네들과 불가 동일어(不可同日語)요, 재인 계급에서 출생한 저네들과 양반 계급에서 출생한 정춘풍과는 좋은 대조이다.”라는 설명을 통해, 그가 박식하면서도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에 관한 이론적 식견도 상당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도선에 대해서는 “아니리가 선수(善手)”라고 평했는데, 이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가비의 식자적(識者的) 자질에 비추어 사설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 이야기나 재담을 적재적소에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였다는 뜻이 된다. 다만 ‘아니리광대’나 ‘재담광대’라는 말의 어의(語義)에서 짐작되듯 이는 아니리나 재담에는 능하나 소리 시력은 다소 부족하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조선창극사』에 언급된 비가비의 용례는 여기까지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김석구, 현대 판소리에 다양한 업적을 남긴 임진택 등을 비가비에 포함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공식적인 반상(班常)의 구분은 철폐되었으나, 그와 관련되는 차별 의식은 지속되었기에 김석구 역시 집안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판소리 창자로서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는 이동백ㆍ송만갑ㆍ정정렬 등 당대 대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웠으며, 판소리에서 사설이 차지하는 의미를 간파하여 〈호남가〉ㆍ〈충청가〉ㆍ〈탐승가〉 등의 단가, 〈금강순례가〉와 같은 창작판소리를 직접 지어 불렀다. 신분 제도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비가비’는 1980년대 이후 대학교 교육을 받은 지식인 출신의 엘리트 예술가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변화하였다. 임진택ㆍ김명곤ㆍ이규호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에 창작판소리를 일종의 민중예술 운동의 방편으로 인식하고 사회 저항적 작품을 발표하며 명창 중심의 판소리 예술가들과는 다른 독자적 구도를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오랜 시간 소리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음의 예술성보다는 시대비판 정신을 강조한 사설 측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전통판소리의 사설을 일반 대중의 수준에 부합하도록 풀어 쓰고 사설의 오자(誤字)나 낙서(落書)를 바로잡는 한편, 창작판소리를 지어 부르는 등의 작업에 매진하였다.
비가비는 근본적으로 무계 출신 재인 또는 광대의 구분 의식에 의해 형성된 말이지만, 이들 비가비 집단이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계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상당하다. 특히 사설의 작사 또는 정리와 윤색, 판소리 및 국악의 이론 정립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로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신분 의식이 엄존함에 따라 내외부적인 핍박과 고민이 존재했을 것임에도 판소리 또는 국악의 길을 택하여, 판소리 및 국악의 이론과 실기가 조화롭게 발전하고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탐색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 최동현, 『판소리명창과 고수연구』, 문예연구사, 1997. 김기형, 「비가비광대의 존재 양상과 판소리사적 의의」, 『한국민속학』 33, 2001. 배연형, 「비가비 광대 김석구와 〈금강순례가(金剛巡禮歌)〉」, 『판소리연구』 10, 1999. 최혜진, 「권삼득 명창의 등장과 판소리사적 의미」, 『판소리연구』 23, 2023.
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