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변천
비가비에 관한 본격적인 사적 서술의 시도는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이 1940년에 발간한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판소리 창자가 대체로 무계 출신임을 언급하며, “과거 명창(名唱) 중(中)에 결성(結城) 최선달(崔先達), 권삼득(權三得), 정춘풍(鄭春風), 기타 수인(數人)의 비가비(한량(閑良)으로 가극(歌劇)에 능(能)하여 광대(廣大)로 행세(行世)하는 자(者)를 재인(才人) 계급(階級)의 광대(廣大)와 구별(區別)하기 위(爲)한 명칭(名稱)”이라고 정의하였다.
최선달(崔先達, 1726~1805)의 본명은 최예운(崔禮雲)으로, 〈결성농요〉에서 메김소리를 하는 최광순의 8대 조상이 최선달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무과 집안의 향반으로 18세에 악(樂)에 심취하여 누에산 칠성단에서 독공을 통해 판소리 명창의 경지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판소리 광대가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도 한다.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설렁제’ㆍ‘덜렁제’ㆍ‘권제’ㆍ‘권마성제’ㆍ‘드렁조’라고 불리는 특유의 창법 또는 악조를 개발하였으며, 〈제비가〉는 작곡자가 밝혀진 최초의 더늠으로 알려져 있다. 비가비의 출현은 충청의 양반 정춘풍(鄭春風, 1834?~1901?), 전북의 양반 서성관(徐成寬, ?~?)ㆍ전도성(全道成, 1864~?)ㆍ안익화(安益化, ?~?) 등으로 이어졌다. 정춘풍에 대해서는 ‘남에 고창 신재효요, 북에 정춘풍일 것’이라고 하면서, ‘신재효는 이론으로 승하고, 정춘풍은 실제로 승하였다.’라고 그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박식하면서도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에 관한 이론적 식견도 상당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창극사』에 언급된 비가비 이외에도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김석구도 비가비에 포함될 수 있다. 김석구 역시 집안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판소리 창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동백ㆍ송만갑ㆍ정정렬 등 당대 대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웠으며, 판소리에서 사설이 차지하는 의미를 간파하여 〈호남가〉ㆍ〈충청가〉ㆍ〈탐승가〉 등의 단가, 〈금강순례가〉와 같은 창작판소리를 직접 지어 불렀다.
현재 '비가비'는 비음악전공 소리꾼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이들은 판소리를 성음의 예술성보다는 시대비판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