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倡夫), 광대(廣大), 무부(巫夫), 화랭이
고려 시대 이후 가무(歌舞)를 중심의 각종 연희를 직업적으로 연행했던 전문 예인
창우(倡優)는 무악(巫樂)을 비롯해 각종 곡예나 음악 등을 직업적ㆍ전문적으로 수행했던 예인을 일컫는 말로, 본래는 중국에서 가무를 위주로 하였던 전문 예인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판소리도 창우의 연희 종목 가운데 하나였는데, 관련하여 호남 지역의 창우 집단이 연행했던 광대소리를 판소리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창우(倡優)’라는 용어의 기원은 중국 선진(先秦)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예인(藝人)을 우(優)와 령(伶)으로 구분했고, 우는 다시 창우(倡優)와 배우(俳優)로 나누었다. 창우는 가무를 위주로 하는 전문 예인을, 배우는 골계와 조소(調笑)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 예인을 각각 일컫는 호칭이었다. 한편 령(伶)은 악곡을 연주하는 사람을 의미했는데, 한대(漢代) 이후 송대(宋代) 이전까지 우(優)와 령(伶)을 우령(優伶)으로 합쳐 가무ㆍ음악ㆍ백희ㆍ골계를 직업적으로 연행하는 예인의 총칭으로 사용했다.
○역사적 변천 ‘창우(倡優)’의 용례는 고려 시대 연희를 기록한 문헌에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고려사』 권64 「예지(禮志)」 6의 “예종 11년(1116) 12월 기축날에 대나(大儺)를 행했다. 이에 앞서 환관들이 나희(儺戲)하는 자들을 좌우로 가르고 서로 겨루게 했다. (중략) 무릇 창우(倡優)의 잡기(雜技)로부터 지방 유기(遊技)에 이르기까지 징집당하지 않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창우들이 몰려들어 깃발이 길에 널리고 궁중에 가득 찼다.”, 『고려사』 권136 「열전(列傳)」 권49 「신우(辛禑)」 4의 “우왕이 중추절을 맞이해 6도의 창우(倡優)를 징발해 동강(東江)에서 백희(百戲)를 연행하게 했다.”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 고려 시대 창우의 존재와 이들이 담당했던 기예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조선 시대에 각종 연희를 담당했던 전문 연희자는 세습무계 무부(巫夫), 북방 민족 계통의 수척과 반인, 재승 계통의 승려ㆍ사장ㆍ사당ㆍ남사당과 조선 후기 유랑예인 집단 등의 부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세습무계 무부를 부르는 호칭이 창우 또는 창부(倡夫), 화랭이 등이었다. 무부란 무당(巫)의 남편(夫)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무당을 도와 무가(巫歌)나 무무(巫舞)의 반주 등을 수행했다. 조선 시대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은 『경도잡지(京都雜誌)』 「유가(遊街)」 조에서 “광대(廣大)란 창우(倡優)를 말하는데, 비단옷에 누런 초립을 쓰고, 머리에는 비단으로 만든 가화(假花)를 꽂고, 공작선(孔雀扇)을 들고 어지럽게 춤추며 익살을 부린다. 재인(才人)은 줄타기와 땅재주 등 여러 연희를 한다.”라고 하여, 광대(廣大)와 창우(倡優)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재인(才人)과 다소간의 구분을 두었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1888~1954)의 『조선무속의 현지연구』(1950)에서도 재인청 또는 신청 조직 계원을 무악(巫樂)을 연주하는 화랑, 줄타기ㆍ물구나무서기 등 곡예를 하면서도 무악을 연주하는 재인, 가무 예능인이며 무악을 연주하는 광대로 나누었다. 물론, 재인ㆍ창우ㆍ광대 등에 특별한 의미 차이를 두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창우의 용례는 1900년대 초반, 근대 극장의 설립 및 공연 준비 과정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서도 발견된다. ■ 작년(昨年)부터 협률회사(協律會社)에서 기녀(妓女)와 창우(倡優)를 회집(會集)하야 희대(戱臺)를 설(設)하고 …(『황성신문』 1903.2.17.) ■ 예기(藝妓)를 초선(招選)하며 창우(倡優)를 모집(募集)하야 소위(所謂) 춘향가(春香歌) 화용도타령(華容道打令)을 백희(百般) 연극(演劇)으로 완희(玩戱)를 정(呈)하여 …(『대한매일신보』 1906.3.8.) 당시 공연을 앞두고 가장 먼저 이루어진 일은 기생과 창우의 모집이었다. 이로부터 ‘기녀’나 ‘예기’로 지칭된 기생 집단과 ‘광대’로도 지칭된 창우 집단이 공연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전문 예인 집단으로 널리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창우 집단은 이후 조선구파배우조합, 조선성악연구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재인청 또는 신청은 그 전신(前身)이 된다. 한편 창우 집단의 경우, 판소리의 기원을 설명하는 학설 중 하나인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 기원설’을 통해 그 존재가 부각되기도 했다.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 기원설이란 판소리 서사나 음악 자체보다 판소리를 생성한 집단이나 그들의 공연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판소리 기원에 접근하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육자배기토리 무악권(巫樂圈) 창우 집단이 연행했던 〈고사소리(告祀--)〉ㆍ〈줄소리〉ㆍ〈선증애소리(선굿소리)〉 등 광대소리의 공연자 편성, 공연 방식, 사설 형태, 장단, 조 등이 판소리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판소리가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광대소리의 주요 장단은 중모리장단ㆍ중중모리장단ㆍ자진모리장단으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형성기 판소리의 장단 구성과 일치한다. 또 계면조와 평조 중심의 조 구성이나 창자 한 사람이 고수 한 사람의 북장단 반주에 맞춰 소리하는 공연자 편성, 소리ㆍ아니리ㆍ발림 중심의 공연 방식, 4․4조의 사설 율격 및 사물이나 사건을 나열하거나 정경이나 심정을 그리는 사설 형태 면에서도 통한다. 다만 분석 대상이 된 광대소리가 20세기 말의 자료라는 점에서 정확한 비교가 어렵고, 둘 사이의 유사성을 오히려 광대소리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창우는 ‘광대(廣大)’와 함의나 범주가 유사하지만, 보다 이른 시기부터 널리 사용된 용어이다. 화랭이패ㆍ산이패라고도 불린 창우 집단은 일종의 기능 집단이자 이익 집단ㆍ혈연 집단이었으며, 주로 연행하는 레퍼토리의 종류에 따라 그 구성원을 소리광대ㆍ줄광대ㆍ어릿광대ㆍ고사광대ㆍ선증애꾼 등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특히 육자배기토리권 즉 호남 지역의 창우 집단에 대해서는, 이들이 패기성음으로 구사했던 광대소리가 판소리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손태도, 『광대 집단의 문화 연구 1: 광대의 가창 문화』, 집문당, 2004.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지음, 최길성 옮김, 『조선무속의 현지연구』, 계명대 출판부, 1987. 이두현, 『한국 연극사(신수판)』, 학연사, 2000.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김인숙, 「만당의 판소리 담론」, 『한국음악사학보』 55, 2015. 송미경, 「‘창우(倡優)’의 레퍼토리 창극(倡劇)에서 ‘판소리’ 중심 창극(唱劇)으로의 전환」, 『어문논집』 97, 2023. 이보형, 「창우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전통음악논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정우여기(停優餘妓)」, 『황성신문』 1903.2.17. 「논협률사(論協律社)」, 『대한매일신보』, 1906.3.8.
송미경(宋美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