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에 기생조합소가 처음으로 결성된 이후 여러 기생 조합이 생겨났다. 1917년 이후 한남권번이 안착한 이후 서울에서는 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이 일본식으로 즉, 권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여전히 조합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대도시에서는 권번으로 변화되었던 것이 보통이었다. 기생조합의 결성 시 운영 및 이익의 분배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처음에는 기생들의 결사체로 시작되어 곧이어 합자회사 혹은 주식회사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후대로 일정한 규모의 도시에서는 주식회사로 전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에 작동하던 각종 제도가 사라지면서 기생 관련 제도도 빠르게 변화되었다. 대도시의 기생조직은 대체로 주식회사 방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1946년 이후 권번은 지역 별로 예성사, 예우회 같이 회사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이후 기생의 공연 관련 제도가 바뀌면서 사실상 기생들의 공적 조직체는 해체되었다.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기생들이 체계적으로 가무악을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권번에 배치된 가무악의 교사들은 당대의 최고의 명인들로서 엄격하게 기생들을 학습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기생들은 전문적이면서도 도전적으로 공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각 권번에는 가무능력이 성숙했던 성인 기생들도 소속되어 있었지만, 장차 가무로써 활동하고자 하는 소녀들, 즉 학습이 필요한 동기(童妓)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 학습을 통해 재교육 혹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 집단의 교육과정은 조합의 사정이나 시대 그리고 지역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평양의 경우처럼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기생 교육을 위해 일반 학교의 교육 과정과 가무악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가무악 전문 교육 프로그램만 운영했다. 가무는 기생의 정체 구성하고 전문가로서 당대 사회에 필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생에 대한 제도적 억압과 강제로부터 저항하거나 벗어나게 할 수 있게 했다. 한국 전쟁 이후 전문적인 가무를 갖췄던 과거의 기생들은 변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예를 들면 기생조직 해체 이후 가무 능력을 갖춘 여성들은 권번에서 벗어나 여성국악동호회(1948)를 조직하기도 했다. 여성국악동호회에서는 “여성국극”이라는 창조적 공연물을 만들어 냈고, 이것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1950년대 말까지 수많은 여성국극단들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전반기에 기생 집단과 기생 학습장에 집중되어 있었던 종목들, 예를 들면, 판소리와 산조 그리고 민요, 민속 무용 등등은 현재 전통음악 및 무용 부문에서 주요 갈래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기생들의 주요 가창 갈래였던 해방 전의 신민요는 미국 음악이 주류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대략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권도희(權度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