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유가(三日遊街)의 전통을 춤과 노래 및 극을 통해 한 판의 놀이로 풀어내어 재현한 한성준의 1938년 5월 2일 부민관 초연 작품.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 종목 중 하나로, 삼일유가의 전통을 무대에서 재현하여 한 판의 극과 놀이로 풀어낸 작품으로, 삼현육각과 〈성주풀이〉의 노래, 창우와 기생의 춤, 급제의 축하 잔치 펼쳐지는 작품으로 1938년 5월 2일 부민관에서 초연되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들이 왕에게 받은 어사화를 꽂고 악사와 광대, 재인을 앞세워 3일 동안 친척ㆍ선배ㆍ친구들을 방문하며 시가(市街)를 행진하던 삼일유가(三日遊街)는 시가행진인 동시에 마을의 큰 잔치와도 같았다.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온 유가(遊街)의 풍습은 『고려사』에 기록되었는데, 지역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초청해 관아에서 잔치를 베풀던 영친의(榮親儀)에 대한 기록이나, 충목왕 3년(1347)에 왕명으로 신급제자(新及第者)가 4일간 유가하도록 하였다가 다시 6일간 유가하도록 하였다는 등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의 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1167)에도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유래된 풍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을 탄 과거급제자는 삼현육각에 춤과 재주를 부리는 세악수(細樂手), 광대, 재인 등을 대동하여 거리를 돌아, 선배 급제자ㆍ스승ㆍ친척 등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삼일유가 후에는 홍패고사(紅牌告祀), 조상의 묘에 참배하는 소분(掃墳), 부모님께 알리는 문희연(聞喜宴) 등을 연행했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이 있었던 1894년 4월에 홍성(洪城)에 있었던 한성준은, 김학근(金學根)의 손(孫)인 김성규(金聖奎)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에 급제하여 귀가할 때 환영하는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한성준이 삼일유가의 잔치를 접하게 되면서 급제무의 제재를 얻어 창작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보고 있다. 1937년 4월 『조광』에 실린 한성준의 글에서도 당시의 상황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1938년 4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소개된 「전조선향토연예대회(全朝鮮鄕土演芸大会)」 중 5월 2일 오후 7시 부민관(府民館) 대강당에서 올려지는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의 기사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2개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급제무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의 과거(科擧)는 “한번 남자로서 출세하는 바로큰길”이고 “과거에 급제하고나서 경하스러운 잔치가 베푸러지지안을수 업고 또한 흥을 못니기는 춤이 벌러지지안을수 업다”고 하면서 “가장 호화로운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연자 또한 화려한데, 선배관원(先輩官員) 한성준, 신급제(新及第) 이정업(李正業), 창우(唱優) 김봉업(金奉業), 김세준(金世俊), 김광채(金光彩), 육각세적(六角細笛) 김만삼(金萬三), 이충선(李忠善), 대령(大笭) 방용현(方龍鉉), 해금(奚琴) 김덕진(金德鎭), 장고(長鼓) 한희종(韓喜宗), 기생(妓生) 홍경숙(洪敬淑), 박진홍(朴珍紅) 총 12명이었다. 춤과 음악의 대가인 한성준과 줄타기와 해금의 명수인 이정업, 팀을 이뤄 오랜 기간 활동했던 방용현(대금)과 김덕진(해금), 한성준의 자제이자 한영숙의 부친인 한희종, 줄타기 재주꾼인 김봉업과 소리꾼이자 고수인 김세준 그리고 시나위 연주도 하며 재담꾼인 김광채 등, 출연진의 예술적 행로와 깊이만으로도 매우 기대되는 무대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창우 3인이 만들어내는 흥과 기생 2인의 무대가 펼쳐지는 화려한 가무극이 연상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급제무를 연극적, 음악적 요소가 가미된 고전무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당대의 일간지에 사진으로 기록되었을 뿐,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38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조광회 주최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의 급제무 소개에는 “급제를 제재로 하야 성주푸리를 노래하면서 새로 급제한 사람의 축하연이 벌려집니다”라고 되어 있다. 삼현육각과 남도잡가를 토대로 한 한성준의 창작적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는데, 1940년 2월 27일 부민관의 「도동기념공연(渡東記念公演)」 기사에 전원 출연으로 게재된 것으로 보아, 규모 있는 가무극 형태의 작품으로 공연되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8년도 활동부터 일간지에는 ‘고전무용’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당시는 아직 ‘전통’에 대한 언급이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로, 한성준의 작품은 신무용 또는 권번의 예기 춤과 다른 양식의 민족적 정서를 지닌 춤으로써 ‘고전무용’이었다. 일제강점기 흩어졌던 우리의 문화 자원을 집대성하여, 전통적 방법론으로 재해석, 창작한 한성준의 다양한 공연 레퍼토리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의 재창출로서 의미가 깊다고 여겨진다. 급제무는 한성준의 ‘고전무용’으로서 새로운 전통의 재창출을 화려하게 선보인 작품이었다. 창작의 제재, 예술가의 식견과 규모, 음악과 춤과 극이 결합된 공연으로 관객과 즐거운 판을 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놀이로 엮어낸 춤(戱)으로 급제무를 바라본 학자의 견해는 한성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적절한 구분이라고 여겨진다.
김영희,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지』 32, 2002 김영희, 「고전무용 용어의 등장과 전개」, 『한국무용연구』 39/4, 2021. 성기숙,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배경과 공연활동 연구」, 『한국무용연구』 32/3, 2014. 이정노, 「한성준의 조선춤 작품에 나타난 탈지역성과 탈맥락화 양상 연구」,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37/1, 2018. 윤중강,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경기춤포럼과 한성준춤 바로알기」, 『서울문화투데이』, 2023.11.29. 윤중강, 「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문화+서울』, 2022.9. 한성준, 「고수 오십년」, 『조광』, 1937.4.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会)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朝鮮特産品展覽會記念) 전조선향토연예대회(全朝鮮鄕土演芸大会)」, 『조선일보』, 1938.4.23. 「현황(眩恍)ㆍ 찬란(燦爛)한 무아경(無我境)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 수재현(遂再現)」, 『조선일보』, 1938.6.19. 「조선음악무용연구회(朝鮮音樂舞踊硏究會) 二十七日 밤 부민관(府民館)에서 도동기념공연(渡東記念公演)」, 『조선일보』, 1940.2.25.
박선욱(朴羨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