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라는 명칭은 정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상 여러 용례로 나타나며, 각각 다른 악기를 일컫는다. 먼저, 고대 한반도에서 현악기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서 처음 등장한다. 문헌에는 내해왕(奈解王, ?~230) 때 물계자(勿稽子)가 금을 타고 곡을 지었다고 전하며, 자비왕(458-479) 때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금 소리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기이」편의 사금갑(射琴匣) 설화(488년) 기록 속에서도 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그 시기 도상자료에 보이는 현악기로는 고구려의 거문고와 가야국의 가야금, 신라의 토우와 현악기, 그리고 백제 금동대향로의 현악기를 들 수 있다. 다만 신라의 내해왕과 자비왕의 실존 시기를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 초기로 보고, 한반도 북쪽지역의 거문고는 문헌의 내용과 시기적으로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제외된다고 하겠다. 또한 다른 현악기 유물로써 문헌의 금을 특정하기 어렵고, 현전하는 악기와 관계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금은 고대 한반도 현악기의 초기 형태를 지칭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 유래된 현악기의 명칭으로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는 진나라 칠현금이 고구려에 유입되었다는 첫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사악지의 아악기조에 1·3·5·7·9현의 금이 소개된 것을 통해서도 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7현금은 휘(指板)를 사용하여 음정을 내는데 휘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악학궤범』에는 제1현을 황종에 맞추어 조현하도록(황종균의 조현법) 기록되었다.1이후, 제2현부터 제5현까지 태주, 고선, 임종, 남려로 조율하며, 13개의 휘에 의한 전체 가용 음역은 약 2옥타브 이상이다. 다만, 제6현과 제7현은 『악학궤범』의 경우 청황종, 청태주로 되어있으며, 『시악화성』에는 응종 청태주 순으로 되어있어 서로 다르다.
또, 현마다 휘의 위치에 따라서 음을 만드는데, 제1현의 경우, 개방현인 산성(散聲)은 황종, 제7휘는 줄의 1/2에 위치하여 개방현일 때 황종의 옥타브 위의 음을 낸다. 제4휘는 1/2의 1/2 즉, 1/4에 위치하여 옥타브 위의 황종의 또 옥타브 위의 음을 낸다. 그리고 제1현 제9휘는 임종 음을 낸다.2
○ 구음과 표기법
현재 〈문묘제례악〉에 쓰이는 금의 악보 표기는 율자보(律字譜)를 사용한다. 그 외, 고종 때 윤용구가 고안한 〈가곡〉의 반주를 위한 표기법은 다음과 같다.
(좌. 『휘금가곡보』의 우조초대엽 또는 우. 『휘금가곡보』의 해제)
장구의 점수를 정간의 단위로 삼았으며, 작은 3칸이 모여 굵은 1칸으로 총 10칸의 한 행을 이루었다. 우측 행에는 현 순서인 1, 2, 3, 4, 5, ,6, 7의 숫자와 율명을 적었다. 가운데 행이 구음이며, 좌측 행의 1, 2, 3, 4는 왼손으로 줄을 짚는 손가락을 표시하였다.3
○ 연주방법과 기법
현재 연주방법과 기법 등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악학궤범』의 것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왼손 줄 짚는 법은 고선을 약지로 세워 누르고, 나머지 율은 모두 모지로 비스듬히 짚으며, 맨손과 골무를 겸하여 쓴다. 오른손 타는 법은 고선은 약지로 뜨고(勾), 이칙ㆍ남려ㆍ무역ㆍ응종ㆍ청대려ㆍ청태주ㆍ청협종은 검지로 내탄다(挑). 그 나머지는 모두 중지로 떠서 탄다. 줄을 짚지 않고 타는 것은 산성이라 하는데 그것은 허현(虛絃)의 소리이다.
또한, 『금학입문』에 따르면, 약지와 엄지의 두 손가락만 쓰는데, 그중에서 약지는 고선 줄에 고정되어 있어 엄지 하나만이 쓰인다. 이 수법은 다섯 손가락을 다 쓰는 중국의 경우와 다르고, 거문고에서 왼손의 검지와 모지 두 손가락을 쓰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고선이 제3현과 제7휘에서 나지 않고 제8휘에 있는 것은 제7휘를 약지로 세워 짚으면, 엄지로 다른 줄들의 제7휘를 짚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제3현 제8휘에서는 고선음이 날 수 없기 때문에 제8휘에서 그 줄을 밀어서 고선음을 낸다.4
○ 연주악곡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궁중의 제례 음악에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직(社稷), 풍운뇌우(風雲雷雨), 산천(山川), 성황(城隍), 선농(先農), 선잠(先蠶), 우사(雩祀), 문묘(文廟) 제향 등 아악(雅樂)의 등가에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거문고의 연주법을 참작하여 편찬한 악보를 통해 〈가곡〉 등의 향악을 연주하거나, 문집에는 생황과 함께 연주한 내용도 보인다. 현재는 〈문묘제례악〉의 등가에 진설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다.
○ 제작 및 관리 방법 순으로 서술
『악학궤범』의 금의 제작법으로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를 쓰고, 검은 칠을 한다고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13개의 휘는 소라 또는 조개로 만드는데, 제7휘가 가장 크고 제1휘와 제13휘로 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7현 중, 제1현이 굵고 제7현으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진다.
『시악화성』에는 정체지법(定體之法), 와현지법(絚絃之法), 안휘지법(安徽之法)의 세 가지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제작원리 및 과정을 다루었다. 각 구조 및 부속의 명칭과 치수 등이 기록되었는데, 목재와 현, 그리고 휘의 재료가 대표적이다.
목재와 현 재료의 특성상, 직사광선을 피해 습도에 유의하여 보관한다.
○ 역사적 변천과 전승
고대 한반도 현악기로서의 금을 원형으로 하여 현전하는 장방형 현악기로 발전하였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변천사에 대하여는 가야금과 거문고의 각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거문고로서의 금은 ‘금도’, ‘금가’, ‘금론’ 등, 선비들이 추구하는 삶과 음악의 정신을 나타낸 것으로서, 정악, 또는 풍류음악을 대표하여왔다.
한편,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대성아악이 들어와 제례 의식에 편성되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 중국 송나라로부터 들어와 주로 아악에 사용되던 금은, 명종 이후 슬과 함께 결손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향악교주’라는 새로운 연주형태가 등장한 바 있다. 조선 전기의 『악학궤범』에는 악기의 도해와 산형, 제작 방법이 수록되어 전하며, 조선 후기의 문헌인 『시악화성』에는 다른 조현법이 소개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서 금은 제례악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윤용구(尹用求, 1853∼1939)에 의해 향악식 조현법과 연주법을 개발한 일이 있으나,5 , 현재 전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 음악에 사용할 연주법이 전하지 않고 〈문묘제례악〉의 등가(登歌)에 진설만 한다.
중국의 금은 주나라 이후 시경에 1·3·5·7·9현으로 소개되어 지금도 사용되며, 우리의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문인(文人)의 악기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정창원에 소장되어 전한다.
1) 『악학궤범』에 수록된 금의 조현법은 『금학입문』의 것과 같이 황종균의 조현법에 해당한다. 이혜구, 『한국음악연구』, 1967, 380쪽. 참조.
2) 『현금오음통론』 참조.
3) 『휘금가곡보』 해제 참조, 7쪽.
4) 『금학입문』 권상6, 금부 603쪽.
5) 『휘금가곡보』(고종30년,1893) 칠현금의 대가인 윤용구와 거문고의 대가 고익상이 함께 거문고의 가곡 가락을 참고하여 만든 악보.
장희선(張希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