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헌가요(敎坊獻歌謠)
조선 시대에 궁궐 밖으로 행차했던 임금이 환궁할 때 임금을 칭송하는 한문 가요(가요축)를 올리고 여러 정재(呈才)를 연행하며 영접하는 대규모 의식
교방가요는 환궁하는 임금을 영접하기 위해 행해진 의식의 절차 중 하나로, 임금을 칭송하는 한문 가요의 축(軸)을 바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의식은 침향산(沈香山), 지당판(池塘), 화전벽(花氈壁) 탁자 등의 설치물과 백 명이 넘는 여기(女妓), 쉰 명이 넘는 악공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였으며 , 학무(鶴舞)와 연화대(蓮花臺) 등의 정재가 연행되거나 춤 없이 가요축만 올리기도 하였다. 이 행사는 1744년(영조 20)에 영구 혁파되었다.
교방가요는 임금이 타는 수레인 대가(大駕)의 환궁 영접 행사 중 하나로, 고려 시대부터 이미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후기에는 결채(結綵)와 백희(百戲) 같은 대규모 공연이 교방의 가요로 축소되기도 하였다.
○ 내용
교방가요는 독립된 정재(呈才)가 아니며, 임금이 환궁할 때 행해지는 의식의 일부 절차이다. 이 절차는 크게 설치물 배치, 가요축 봉헌, 정재 연행의 세 단계로 나뉜다.
- 설치물 및 참여 인원 환궁하는 길인 연도(輦道)에 침향산(沈香山) , 지당판(池塘), 화전벽(花氈壁) 탁자 등을 설치한다. 이 행사에 악공 50명 (전부고취 50명, 후부고취 인원 별도 포함)과 100명이 넘는 기녀들이 참여하였다. 침향산은 산 모양을 만들어 사탑, 승불, 고라니, 사슴 등으로 꾸미고 앞부분에 연화통을 설치한 화려한 구조물이었다. 참여 여기는 가요함을 받드는 연소기, 도기, 박, 백학, 청학 등을 제외한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 절차 (가요축 봉헌) 대가가 탁자에 이르면, 전부고취 악공 50명이 연주를 시작하고 , 기녀들이 노래를 부르며 가요축을 임금에게 올리는 의식이 행해졌다. 도기(都妓)가 가요축을 받들어 나아가 앉으면 기녀 전체가 앉는다. 가요축은 승지(承旨)와 내시(內侍)를 거쳐 임금에게 올린다. 도기가 춤추고 물러난 후, 기녀 전체가 족도(足蹈)하면 음악이 그치며 가요축 봉헌 절차가 완료된다. - 연행 음악 및 춤 가요축 봉헌 후에는 각종 정재(呈才)가 선보였다. 악공이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연주하면 기녀들이 노래를 불렀으며 , 이때의 노래는 「용비어천가」의 일부 장(1~4장, 125장)에 해당되는 <여민락>이었다. 가가 행진하면 <생가요량(笙歌寥亮)> 등의 행악을 연주하고, 대가가 정지하면 <별곡>을 연주하여 번갈아 반복하였다. 가요축 봉헌 후에는 <학무(鶴舞)>, <연화대(蓮花臺)>, <금척무> 등의 정재가 연행되었다. <학무>는 환궁하는 길에 세속의 잡된 기운을 정화시키는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춤으로, 연행의 중요 요소였다.
○ 역사적 변천 교방가요는 부묘의(祔廟儀)와 함께 국가 전례 중 흉례 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나 , 인조(仁祖) 대에 왕명을 내려 부묘 후 환궁 시 가요를 올리는 행사를 중단시키면서 차츰 연행되지 않게 되었다. 결국 1744년(영조 20)에 이르러 영구 혁파되었다.
교방가요는 길 위에서 연출되는 공연 예술로서 화려한 구조물인 침향산과 백 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이 의식은 임금의 무사 귀환을 영접하는 절차를 통해 임금의 권위와 왕조의 존속을 상징하는 의미를 보여준다. 특히, 침향산은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인조 때 태워 없애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이는 교방가요가 가진 화려함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은영, 「고려․ 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공연문화연구』21, 2010.8. 이혜주 역주, 『신역 악학궤범』, 2000. 박창희 역주, 『용비어천가(한글 번역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송지원, 「조선시대 궁중학무의 연행 양상 연구」, 『공연문화연구』 제15집, 2007.
김경숙(金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