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헌종 때 강원도 원주교방에서 유입된 향악정재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노래하며 추는 춤.
관동무는 1820년대 원주감영에서 정철의 「관동별곡」을 노래하며 추던 춤이 궁중으로 유입된 것이다. 1848년(헌종 14) 순원왕후의 환갑 잔치에서 8인의 무용수가 좌우로 나뉘어 「관동곡(關東曲)」(관동별곡의 악곡)을 부르며 춤추는 향악정재로 처음 선보였다. 지방 교방의 춤이 궁중으로 유입된 사례를 보여준다. 이후 궁중에서의 연행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 무보도 전하지 않는다. 1915년 가을에 열린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의 연예관 공연의 다동기생조합 기생 공연 목록에 포함된 이후로 전승이 단절되었다.
<관동무>는 『관동지(關東誌)』 및 1829년 박사호(朴思浩)의 사행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에 원주 및 황주 등지의 관청 연회에서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48년(헌종 14) 순원왕후의 환갑 잔치(무신진찬) 때 궁중 정재로 채택되었는데, 『(무신)진찬의궤(進饌儀軌)』 「악장(樂章)」 서문에는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무기(舞妓)가 향악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게 하고, 구절에 맞춰 형상을 표현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단, 노랫말이 국한문 혼용이어서 싣지않는다고 하여, 무기의 가창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옛 상신(相臣) 정철은 호가 송강인데, 관동 지방을 다스릴 때 관동별곡을 지었다. 무기(舞妓)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했는데, 구부렸다 폈다하고 돌면서 구절에 맞춰 형상을 표현하였고 관동무라 이름 하였다. 향악에 사용한다.
〇 구성과 창사 의궤에 따르면 8명의 여령(女妓)이 좌대(左隊)와 우대(右隊) 2대로 나뉘어, 「관동곡(關東曲)」을 함께 부르며(병창 竝唱) 나아가고 물러나며(진퇴 進退) 회전하는(선전 旋轉) 춤을 춘다. 1848년 초연 시 좌무는 학선(鶴仙) 등 4인, 우무는 월향(月香) 등 4인이 맡았다. 현재 「정재무도홀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춤 동작은 알 수 없다. 창사(唱詞)인 「관동곡」은 「관동별곡」의 악곡이나, '가사가 한문과 한글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의궤에 전문이 실리지 않아, 원곡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〇 반주 음악 1848년 연행 시 반주 음악은 세취(細吹) 편성으로 〈원무곡(圓舞曲)〉을 연주했다고 되어 있다. ‘세취’라는 용어는 의궤에서의 맥락에 따르면, 가곡 반주 형태의 단잽이 편성의 관현악편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곡은 3월 17일 주간 잔치(내진찬)에서는 〈전전환지곡(殿前歡之曲)〉이라는 아명(雅名)으로, 3월 19일 야간 잔치(대전야연)에서는 〈가연지곡(嘉讌之曲)〉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〇 복식 및 의물 복식은 다른 정재 여령들과 유사하게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었으며, 홍단금루수대(紅緞金鏤繡帶)를 띠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손에 끼었다.
〇 역사적 변천 <관동무>는 1848년 헌종 때 궁중 연향에서 2회 연행된 이후, 고종·순종 대의 궁중 연향에서는 재여되지 않았다. 이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연예관 공연에서 기생들에 의해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무보와 창사가 전해지지 않아 현재는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관동무>는 19세기 원주 교방에서 연행되던 지방의 춤이 궁중 정재로 유입된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정철의 「관동별곡」은 18세기부터 이미 "관기들이 다투어 노래(關東曲)"(조명리, 1731)할 정도로 널리 애창되던 인기 악곡이었으며, 강원 문화권에서는 무기(舞妓)들이 이 노래를 직접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 자연스러운 연행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래 중심의 춤(가무 歌舞)'이 궁중으로 유입되어, 「관동곡」을 병창(竝唱)하는 독특한 향악정재로 정립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러나 1848년 단 1회의 연향에서만 사용된 뒤 궁중 레퍼토리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 권1,2,3. 민속원, 2004.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