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연(鴻門宴), 항장춤
항장이 검무를 추다가 패공을 치려고 했던 중국 홍문연 고사를 배역을 나누어 무용극화한 궁중무
조선 후기에 평안북도 선천 지방에서 검무와 극을 결합시켜 무극(舞劇) 항장무가 만들어졌다. 중국 진나라 말에 홍문의 잔치에서 항우의 부하 항장이 검무를 추다가 패공을 죽이려는 계략을 패공의 부하인 항백이 대무하여 막아내고 잔치를 파한다는 내용이다. 1873년(고종 10)에 평안남도 선천의 항장무를 궁중 연향에서 추게하면서 궁중의 향악정재로 이어졌다.
18세기 전후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지방 관아의 검무가 항우와 패공의 홍문연(鴻門宴) 고사와 결합하면서 지방관아 특유의 무용극 항장무를 창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진나라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초나라 항우(項羽)와 한나라 패공(沛公; 한 고조 유방(劉邦))이 서로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게 되었다. 패공이 먼저 관중에 들어가자 항우가 노하여 군사를 홍문(鴻門)에 머무르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패공을 치려 하였다. 항우의 계부 항백(項伯)은 패공의 부하 장량(張良)과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장량에게 이 계략을 말해주었고, 패공은 그 다음날 홍문에 나가 항우에게 사과하였다. 이때 항우의 모신(謀臣) 범증(范增)은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하여 패공을 찔러 죽이려 하였으나, 패공의 부하 번쾌(樊噲)의 변설(辯舌; 입담이 좋아 말을 잘하는 재주)로 무사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항장무는 조선 후기 평안남도 선천지방에서 형성되어 선천과 의주, 안주 등의 평안도 일대를 비롯하여 해주교방, 진주와 울산교방 등에서 공연되었다. 1848년 이우준(李遇駿, 1801~1867)은 연행 노정 중 안주ㆍ선천ㆍ의주에서 세 차례나 항장무를 구경하였는데, 그의 저서인 『몽유연행록』에 “선천의 항장무는 본디 정평이 나 있어서 의모와 절차가 더욱 잘 갖추어져 있다” 고 기록하였다. 1866년(고종 3)에 가례청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홍순학(洪淳學, 1842~1892)은 선천에서 항장무를 보고, “항장무라 하는 것은 이고을서 처음 본다 / 팔년풍진 초한시에 홍문연을 의방하여 / 초패왕 한패공은 동서로 마주앉아 / 범증의 세번옥결 눈위에 번듯들어 / 항장의 처음검무 패공에게 뜻이 있어 / 긴소매 번득이며 검광이 섬섬터니 / 항백이 대무하여 계교를 잃었구나 / 장자방의 획책으로 번쾌가 뛰어들어 / 장검을 두르면서 항우를 보는모양 / 그 아니 장관이냐 우습고 볼만하다”라고 <연행가>에 남겼다. 이 항장무가 1873년 계유년 진작을 위해 궁중에서 처음 추어진 것이다.
○ 개요
항장무는 진나라 말에 항우와 패공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중에 홍문연에서 패공을 치기 위해 벌어졌던 과정을 표현한 무극(舞劇)이다. 그 구성을 1893년(고종 30) 『정재무도홀기』를 비롯한 여러 홀기에서 볼 수 있다. 항장무의 배역은 10~12명으로, 항우와 패공의 세력이 각각 동서로 마주 본다. 항우ㆍ우미인ㆍ진평ㆍ범증은 동쪽에, 패공과 장량은 서쪽에 자리하고, 남쪽에는 항백ㆍ항장ㆍ번쾌ㆍ중군ㆍ내집사ㆍ외집사가 자리한다. 항백은 동쪽의 진평 옆에 자리하기도 했으며, 무원이 10명으로 구성될 때는 중군ㆍ내집사ㆍ외집사가 항백ㆍ항장ㆍ번쾌를 겸하기도 하였다. 배역을 맡지 않은 여기들은 순령수를 맡는다. 순령수를 맡은 여기들이 북쪽에 자리하고, 배역을 맡은 무원들은 ⊔자 형태로 대열을 이룬다.
그 후에 외집사와 내집사가 번갈아 호령하는 소리에 맞춰 군대의 의식절차가 행해진다. 절차는 전배→훤화 금지→소개문 취타→명금이하→명금삼하 취타 중지→중군 군례→기패관 군례→삼반 고두→방포삼성→대개문 취타→대취타→명금이하→명금삼하 취타 중지→승기 호령→방포일성→뇌고 명라 각 삼통→명금일하 나고지→교자 대령→항왕 착석→제장관 군례→장량 입장→패공 입장 순으로 이루어진다.
패공과 항우가 서로 한 마디씩을 주고받은 후 술상이 베풀어지고 음악이 연주된다. 우미인이 항왕에게 잔을 세 번 올리고, 진평이 뒤에 술을 따라 패공에게 잔을 세 번 올린다. 범증이 옥결을 세 번 들어 보이고 항장에게 검무를 청하여 패공을 격살하라고 말한다. 항장이 항우의 허락을 받고 검무를 춘다. 장량이 항백에게 대무(對舞)하여 패공을 지키도록 하고, 번쾌에게 상황을 알린다. 번쾌가 군중에 입장하여 항우의 술을 마시고 패공에게 상황을 알려 패공이 나간다. 번쾌 역시 춤추다가 퇴장한다. 패공이 자리를 떴다고 전하면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음악을 연주하고 검무를 춘 후 낙기를 호령하고 전배를 물려 잔치를 파한다. 항장무는 항장의 검무→항백의 대무→번쾌의 춤→기녀의 검무로 이어져 검무가 중심이 되는 무용극이다. 항장무의 검무는 별도의 춤 형태라기보다는 18세기 전후로 전국에서 성행한 검무를 극에 맞게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검무 자체의 춤사위나 동작은 기록된 바가 없으나 유일한 무도(舞圖)인 『교방가요』의 ‘항장무’ 그림에 긴 쌍검을 들고 추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긴 쌍검을 들고 추는 동작은 검무의 동작과 유사하다. 항장과 항백이 서로 검무를 추며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쌍검대무의 그림을 연상할 수 있다. 기녀 또한 검무를 추었기 때문에 항장무는 검무가 극과 만나 검무를 극 속에서 여러 차례 즐길 수 있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 반주 음악 『(계사) 여령각정재무도홀기』에 반주음악은 〈대취타(大吹打)〉를 쓴다고 하였다. 군대의식을 행할 때는 〈대취타〉를 쓰고, 검무를 출 때는 검기무 반주음악으로 편성하였다.
○ 복식ㆍ의물ㆍ무구 항우는 주립에 청색 철릭을 입고 도편(刀鞭)을 갖추며, 우미인은 녹의홍상에 화관 몽두리를 쓴다. 패공은 사모관대에 홍색 철릭을 입고 도편을 갖춘다. 범증은 금관(金冠)에 학의(鶴衣)를, 진평은 갑주(甲冑)를, 장량은 앵삼(鶯衫)에 폭건(幅巾)을 입는다. 중군ㆍ번쾌ㆍ항백ㆍ항장도 갑주를 입고, 외집사ㆍ내집사ㆍ수문장은 군복을 입는다. 항장무의 무구로는 상(床) 네 개, 병(甁) 두 개, 돼지[豕] 두 개, 합기(合旗) 청색과 홍색 두 개를 준비한다.
○ 역사적 변천 및 전승 항장무는 대한제국 시기에 1901년의 신축진찬과 신축진연, 1902년 임인진연에서 추어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1913년 고종 탄신 축하연에는 민간에서 활동하는 다동조합과 광교조합 기생들을 불어들여 공연했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는 신창조합 기생들이 항장무를 추었다. 하지만 더 이상 궁중에서 항장무는 추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후 1962년 제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평안북도 팀이 항장무를 선보인 적이 있었으며, 현재 국립국악원에 항장무의 무복과 투구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항장무는 조선후기 검무가 공연문화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누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춤이다. 평안도 선천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항장무가 궁중으로 유입되어 추어졌다는 점에서 공연사적 의의가 있다.
『각정재무도홀기』 『교방가요』 『사자무항장무무도홀기』 『여령각정재무도홀기』
성무경 외, 『완역집성 정재무도홀기』, 보고사, 2005. 배인교, 「朝鮮後期 地方 官屬 音樂人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성무경, 「정재 〈항장무〉의 연희전승과 극 연출 방식」, 『민족문화연구』 36, 2002.
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