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무(鄕樂舞)
삼국 시대 이후 전래되는 한국 고유의 궁중춤
향악정재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당악정재(唐樂呈才)와 대비되는 개념의 우리나라 고유의 궁중춤이다. 삼국 시대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약 40여 종의 향악정재가 전승되고 만들어졌으며, 궁중의 각종 연향과 행사에서 여기와 무동(舞童)에 의해 연행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궁중뿐 아니라 지방 교방(敎坊)에서도 추어졌다.
향악정재라는 용어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처음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향악이 아닌 속악으로 분류하였다. 현전하는 향악정재 중에 유래가 가장 오래된 〈처용무〉와 <검기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각각 기원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에는 〈무고〉·〈동동〉·〈무애〉의 유래와 절차가 간략하게 전한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보태평〉ㆍ〈정대업〉ㆍ〈봉래의〉ㆍ〈향발〉ㆍ〈학무〉ㆍ〈학연화대처용무합설〉ㆍ〈교방가요〉ㆍ〈문덕곡〉도 향악정재 작품들이다. 조선 후기 순조대에도 약 20여 종의 향악정재가 창제되었으며, 지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사례도 있다. 대개 궁중 연향의 목적인 건국의 당위성, 왕조의 번성, 왕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며 창제되었다.
향악정재는 죽간자(竹竿子)와 의물(儀物)이 등장하는 당악정재와 달리 대체로 ①춤의 시작과 마지막에 구부려 절하고 일어나서 뒤로 물러나는[俛伏興退] 구성을 갖고 있다. ②향악기가 중심이 되는 향악을 반주음악으로 연주한다. ③한글 가사로 된 창사를 부른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오언 또는 칠언절구의 한문 가사를 노래하였고, 구부려 절하고 일어나서 뒤로 물러나는 형식도 흐려졌다. 당악정재 또한 죽간자 등장으로만 구분될 뿐이어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구분은 다소 약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 역사적 변천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들은 관련 기록이 약소하여 변화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춤의 구성이나 요소에 변화가 있었다. 신라시대에 기원을 두는 〈무애무〉는 세종대에 불가(佛家)의 말을 쓴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새롭게 재현되어 연행되었다. 조선 초 세종 때 창제된 〈보태평〉ㆍ〈정대업〉과 〈봉래의〉는 조선 왕조를 건국한 조종(祖宗)의 문덕과 무공을 칭송하는 악무이다. 당시 회례악무(會禮樂舞)로 만들어진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조 10년(1464)에 재정비하여 제례악(祭禮樂)으로 채택된 유교의식무로써 종묘제례악에서 일무(佾舞)로 전승되고 있다. 또한 매년 연말, 궁중 나례 의식에서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로 추어진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학무ㆍ연화대무ㆍ처용무가 함께 추어지는 대형악무이다. 신라 처용설화에 기원을 두는 〈처용무〉는 본래 한 사람이 추었으나 세조 때부터 다섯 명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어 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숙종대부터 정조대까지 〈첨수무〉ㆍ 〈광수무〉ㆍ〈초무〉가 향악정재로 추어졌고, 순조 대는 궁중무용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현재 전하는 총 50여 종의 정재 작품 중 23종이 이 시기에 창제되었다. 1828년(무자, 순조 28)에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신 경축 진작(進爵)이 창덕궁에서 열렸고, 이듬해인 1829년(기축, 순조 29)에는 순조의 탄신 40주년 및 즉위 30년 경축 진찬(進饌)이 창경궁에서 베풀어졌던 것이다. 이때 창작된 향악정재는 〈가인전목단〉ㆍ〈경풍도〉ㆍ〈고구려무〉ㆍ〈공막무〉ㆍ〈만수무〉ㆍ〈망선문〉ㆍ〈무산향〉ㆍ〈박접무〉ㆍ〈보상무〉ㆍ〈연화무〉ㆍ〈영지무〉ㆍ〈첩승무〉ㆍ〈헌천화〉ㆍ〈춘광호〉ㆍ〈춘대옥촉〉ㆍ〈춘앵전〉ㆍ〈침향춘〉ㆍ〈향령무〉ㆍ〈사선무〉 등 19종이고, 당악정재는 〈최화무〉ㆍ〈제수창〉ㆍ〈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 등 4종이다.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이중에서 17종의 정재 창사를 직접 지었다. 헌종(憲宗)대에는 1848년(무신, 헌종 14) 진찬 때에 지방 관아에서 연행되던 〈관동무〉가 궁중에 유입되어 새롭게 선보였다.
조선 후기에 지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향악정재로 〈검기무〉ㆍ〈선유락〉ㆍ〈관동무〉ㆍ〈항장무〉ㆍ〈사자무〉를 꼽을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 추어지던 〈검무〉와 해서지방에서 전승되던 〈선유락〉은 정조 때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이후 검무 계열의 정재로 <검기무>와 함께 <첨수무>와 <공막무>가 궁중에서 연행되었다. 평남 선천의 교방에서 연희되던 〈항장무〉는 1873년(계유, 고종 10)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선천 교방의 향기(鄕妓)들을 궁중으로 불러올려 연행하였다. 〈항장무〉는 중국 초한 시대 항우와 유방의 ‘홍문연 이야기’를 무극화(舞劇化)한 것이다. 또 평남 성천의 잡극인 〈사자무〉는 1887년(정해년, 고종 24)에 유입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지방 관아에 소속된 교방 여기들을 뽑아 궁중 연향에 참여시킨 뒤 돌려보내는 선상기(選上妓) 제도가 성행하였다. 귀향한 선상기들은 궁중 악무를 전파하는 매개 역할을 하였다.
1908년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되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해 궁중의 악무기관인 장악원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축소되었다. 민간으로 흩어진 여기와 악사들이 기생조합과 권번을 조직하여 궁중악무의 맥을 잇게 되었다. 그리고 이왕직아악부는 1923년 순종황제 탄신 50주년 경축연에서 향악정재 〈가인전목단〉ㆍ〈무고〉ㆍ〈보상무〉ㆍ〈춘앵전〉ㆍ〈처용무〉와 당악정재 〈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ㆍ〈포구락〉ㆍ〈수연장〉등 아홉 종의 무동정재를 추었고, 193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촬영된 《조선무악》에는 향악정재 〈봉래의〉ㆍ〈무고〉ㆍ〈보상무〉 외 당악정재가 전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향악정재는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재현ㆍ전승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홀기(笏記)가 발견되고 1994년 『정재무도홀기』로 출간되면서 〈공막무〉ㆍ〈망선문〉ㆍ〈영지무〉ㆍ〈춘광호〉ㆍ〈춘대옥촉〉ㆍ〈연화무〉ㆍ〈광수무〉가 비로소 재현되었다. 다만 〈관동무〉는 아직 무보(舞譜)가 발견되지 않아 재현되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향악정재인 〈무고〉의 정읍사(井邑詞), 〈동동〉의 동동사(動動詞), 〈처용무〉의 처용가(處容歌) 등 국문 창사는 『악학궤범』에 전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한문시로 지은 악장을 노래하기 시작하면서 창사가 오언 또는 칠언절구의 한문 가사로 바뀌었다. 〈무애무〉는 불교 포교를 위한 춤으로 불교의 말과 방언이 많아 당시에 싣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군왕을 송축하는 내용의 국한문 가사로 새롭게 재현되었다. 조선 초기에 창제된 〈보태평〉ㆍ〈정대업〉ㆍ〈봉래의〉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공을 기리고 태조의 4대조 및 태조, 태종의 문덕과 무공을 찬양하는 악장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는 영산회상불보살ㆍ 미타찬ㆍ 본사찬ㆍ 관음찬 등의 불교 가사가 섞어 있는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조선 왕실에서 이와 같은 창사를 부른 것은 이색적이다. 또 〈문덕곡〉은 태조의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노래가 중심이 되는 정재이다. 조선 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 대부분은 한문으로 된 시를 노래하여 향악정재의 특징이 사라지고 점차 향악ㆍ당악정재의 구분이 희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검무 계열의 〈검기무〉ㆍ〈공막무〉ㆍ〈첨수무〉 와 〈초무〉, 동물을 모방한 〈사자무〉, <학무>에는 창사가 없다.
고려시대 향악정재인 〈동동〉의 반주곡인 〈정읍〉은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재 반주음악으로 〈향당교주〉ㆍ〈보허자령〉ㆍ〈여민락령〉이 주로 연주되었고, 민간 음악인 가곡의 〈농(弄)〉ㆍ〈계락〉ㆍ〈편락〉도 사용되었다. 〈선유락〉ㆍ〈항장무〉에서는 〈대취타〉를 연주한다. 조선 후기에 장수와 복덕을 기리는 뜻을 추가한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ㆍ〈경풍년지곡(慶豐年之曲)〉과 같은 다양한 아명(雅名)이 사용된 것도 이 시기 반주음악 특징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속악(향악)정재인 <무고>, <동동>, <무애무> 복식은 모두 동일하게 검은 장삼〔皂衫〕을 입었는데, 여기는 단장(丹粧)하였으며 악관은 붉은 옷〔朱衣〕을 착용하였다. 『악학궤범』 권9에 여기 기본 복식으로, 앞면이 짧고 뒷면이 긴 붉은 단의(丹衣)와 상(裳), 금화문(金花紋)이 찍힌 대(帶)와 흑장삼ㆍ흰색 말군(襪裙)ㆍ남저고리(藍赤古里)에 혜아(鞋兒)가 있다. 머리장식에는 잠(箴)과 유소(流蘇)ㆍ 차(釵)ㆍ 대요(帶腰)ㆍ 수화(首花)가 있다.
조선 전기의 여기 복식은 연향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모든 예연(禮宴)에서 여기(염발기)는 단장(丹粧/단의)에 백말군(白襪裙)ㆍ보로(甫老/裳)를 입고 홍대(紅帶)를 두르며, 머리에 수화(首花)와 칠보잠(七寶簪)ㆍ금차(金釵)를 꽂고 단혜아(段鞋兒)를 신었다.
정전 예연(禮宴)이 아니더라도 모든 예연과 처용 구경〔觀處容〕, 궁중 예연은 모두 단장을 입고 잡식(雜飾)을 한다. 또 곡연(曲宴), 무과전시(武科殿試), 관사(觀射), 관나(觀儺), 사신동궁연 이하 각 연향, 주봉배(晝奉杯), 유관(遊觀), 사악(賜樂), 예조후대왜연(禮曹厚待倭宴)에서는 여기가 흑장삼(黑長衫)ㆍ남저고리(藍赤古里)ㆍ백말군ㆍ홍대를 착용하고 머리에 칠보잠ㆍ금차를 꽂고 단혜아를 신는다. 이외에 예조왜야인연(禮曺倭野人宴)에서는 여기가 상복(常服)을 착용한다. 상세 내용은 『악학궤범』권2와 권9에 전한다.
조선 후기 여기의 기본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 또는 녹초단삼에, 속은 남치마〔裏藍色裳〕 겉은 홍치마〔表紅綃裳〕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매고 오색한삼(五色汗衫)에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이외의 여기 및 무동 복식은 그 작품에 맞는 복식을 다양하게 착용하였음이 각 『의궤』에 전한다.
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향악정재는 우리 민족과 함께 다양성, 포용성을 가지고 계승되고 있는 대표적 궁중문화예술이다. 정읍사ㆍ처용가ㆍ동동사 등의 고대 가요 창사 및 조선왕조 예악정신의 대표작인 보태평과 정대업, 봉래의에 내포된 독자성과 자주 정신은 되짚어 계승할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에 나타난 춘앵전ㆍ무산향 등 독무(獨舞) 형태의 새로운 등장, 또 춘대옥촉의 윤대(輪臺), 영지무의 영지(影池), 무산향의 대모반(玳瑁盤) 등과 같은 대형 무구(舞具)의 등장은 향악정재의 독자적인 발전과 수용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보상무ㆍ헌천화ㆍ만수무에서 당악정재의 향악화 현상을 볼 수 있다.
종묘제례악: 국가무형유산(1964) 처용무: 국가무형유산(1971),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2009) 학연화대합설무: 국가무형유산(1971)
『고려사』 『교방가요』 『악학궤범』 『(무자)진작의궤』 『(기축)진찬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국립국악원, 1980. 정신문화연구원,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조경아, 「순조대 정재 창작양상」, 『한국음악사학보』 31, 한국음악사학회, 2003.
심숙경(沈淑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