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사위
고구려무의 핵심 춤사위는 ‘무작상대[舞作相對]’인데, 무도홀기에서는 이를 ‘엽무(葉舞)’와 같다고 했다. ‘엽무’는 『(을묘)진찬의궤』(1795)「악장」에서 춤추는 사람이 손에 아무것도 잡지 않고, 맨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면서 음악의 절차에 맞추어 추는 춤이라 했다. 따라서 엽무와 같다는 고구려무의 ‘무작상대’는 두 사람이 같은 동선으로 움직일 때 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며 넓은 소매를 펄럭이는 동작을 말한다.
반주 음악
『(무자)진작의궤』「의주」에는 고구려무의 기록이 누락되어 초연 때의 반주음악은 알 수 없으나, 고종대 3종의 『정재무도홀기』에서 반주음악은 〈향당교주〉였다. 현재 고구려무의 반주음악으로 〈상령산〉ㆍ〈도드리〉ㆍ〈타령〉이 쓰인다.
[복식ㆍ의물ㆍ무구]
고구려무의 복식이 유일하게 기록된 『(무자)진작의궤』「부편ㆍ공령」에 따르면, 고구려무를 추는 여섯 명의 무동은 꽃으로 장식한 금화첨립(金花添笠)을 머리에 쓰고, 회색 쾌자(灰色掛子)를 입고, 남철릭(藍天翼)과 홍색 넓은 띠[홍광대(紅廣帶)]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오혜(烏鞋)]을 신었다. 즉, 순조대 창작된 고구려무는 이백의 「고구려」 시처럼 ‘금화’로 장식한 관을 썼고, ‘광수’에 해당하는 넓은 소매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여령이 춤춘 고구려무는 복식은 이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이 전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역사적 변천 및 전승]
20세기 초반에는 기생조합에서 고구려무를 전승했다. 1915년 9월 18일에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의 연예관에서 다동조합의 기생들이 고구려무를 춤추었다. 현대에는 1981년 11월 9일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심소 김천흥 무용생활 60년기념 ‘궁중무용발표회’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재현 안무로 고구려무를 발표한 이후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백이 지은 「고구려」 시를 창사로 썼다는 특징이 있다. 창사에는 무용수가 금화로 장식한 모자와 넓은 소매를 입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무의 의상에 반영되었다. 고구려무는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소재로 순조대에 창작된 춤으로, 조선 후기에 고구려의 문화를 궁중 예술로 다시 소환했다는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