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부터 전해지는 향악정재로, 보상반(寶相盤) 위에 놓인 항아리에 공[채구(彩毬)]을 던져 넣으며 추는 놀이 형식의 춤
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 전래하는 향악정재(鄕樂呈才) 중 하나로 연꽃이 그려진 항아리를 얹은 보상반을 중앙에 놓고, 항아리 안에 공을 던지며 추는 놀이 형식의 춤으로, 공이 들어가면 악사가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 들어가지 않으면 얼굴에 먹점을 찍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상무는 1828년(순조 28) 6월 1일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어머니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사순(四旬) 생신을 경축하기 위하여 올린 연경당 진작례(進爵禮)에서 무동(舞童)에 의해 처음 공연되었다.
이 연향을 기록한 순조 『(무자)진작의궤(進爵儀軌)』에 의하면 보상무는 “『법원주림(法苑珠林; 당나라 초기 승려 도세가 편찬한 불교 사전)』에 긴타라왕(緊陀羅王; 고대 인도신화와 불교 기록에 나오는 음악의 신) 둔륜마(屯崙摩)가 금(琴)을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우주의 모든 사물로 찬불하니 대가섭(大迦葉) 등이 모두 춤을 추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한 『고금도서집성』「당악지(唐樂志)」에 이르기를 “한(漢)나라에 반무(盤舞)가 있었고 진(晉)나라 때는 배반무(杯盤舞)라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보상무는 중국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과 무구인 보상반을 수용하였고, 당악정재인<포구락>의 진행 형식을 수용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창사는 효명세자가 직접 지었다. 이후 보상무는 조선 후기에 열린 11회의 진연(進宴)에서 빠짐없이 연행되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 의해 1923년 3월 25일 순종 탄신 50주년 축하연과 1930년 7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 1897-1970) 내외의 환국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공연되었다. 현대에는 1981년 김천흥(1909~2007)이 『정재무도홀기』와 이왕직아악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 안무하여 무대에 올린 후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〇 내용
보상무는 무용수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채구를 잡고 춤추며 보상반 위의 항아리로 공을 던져 넣어 승부를 가리는 내용의 춤이다. 무용수의 구성은 순조 무자년(1828) 초연 시에는 여섯 명의 무동이, 순조 기축년(1829) 진찬(進饌)에서는 여덟 명의 여령(女伶)와 열네 명의 무동이 춤추었다. 헌종 무신년(1848) 진찬에서는 꽃을 들고 있는 봉화(奉花)와 먹과 붓을 든 봉필(奉筆)이 등장하였고 무용수 구성은 여섯 명으로 고정되었다.
〇 구성 보상무는 『진찬시 여령각정재무도홀기』(1901), 『진연시 여령각정재무도홀기』(1901), 『무동각정재홀기』, 『여령각정재무도홀기』, 『(계사)정재무도홀기』 등 다섯 편의 『정재무도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거의 같다. 도입부는 ①악사가 기(妓) 두 명을 인솔하고 나와 보상반을 놓고 나가면 무용수 여섯 명이 좌·우 3대로 나누어 나와 창사를 부른다. ②악사가 채구를 좌·우에 놓고 나간다. 진행부에는 ①맨 앞대의 두 명이 나와 꿇어앉아 채구를 어르다 잡고 일어나 창사를 부른다. ②서로 마주 보고 무진·무퇴하며 춤추다 왼쪽의 좌대((左隊)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 채구를 던져 들어가면 그 대는 다 같이 엎드렸다 일어나서 춤을 추고, 악사가 나와 머리에 꽃을 꽂아준다. ③채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손을 모으고 서고, 악사가 볼에 먹점[묵점(墨點)]을 찍어준다. ④1대가 춤추며 물러나 3대의 뒤에 서고 2대와 3대가 차례대로 나와 앞의 절차와 같이한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종결부에서 각 대열의 여섯 무용수가 모두 춤추며 무진·무퇴하고 음악이 그친다. 『정재무도홀기』에는 채구가 들어가면 머리에 꽃을 꽂아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무용수에게 직접 꽃을 주는 것으로 1930년대 이왕직아악부의 보상무로 전승되고 있다. 1981년에 재현된 보상무는 『정재무도홀기』를 기반으로 하고, 1930년대 김천흥이 이왕직아악부(에 재직할 )당시 학습했던 내용을 혼합하여 재현하였다. 1대와 3대는 『정재무도홀기』의 기록대로 춤추었고, 2대는 공을 잡고 일어나 무퇴하여 보상반을 등지며 반(盤)을 끼고 돌아[回舞] 원래 자리로 돌아와 공을 던지는 내용으로 이왕직아악부의 보상무 구성을 추가하여 재현하였다.
〇 구조 보상무는 좌·우 3대로 나누어 1대가 먼저 나가 창사를 부르고 물러나 좌·우대가 각각 채구를 던져 결과에 따라 상벌을 받고 물러나면 다음 대가 나와 같은 절차로 춤추는 구조로 매 대의 춤 진행은 모두 같다. 〇 주요 춤사위 주요 춤사위는 채구를 잡기 전에 꿇어앉아 ‘채구를 어른다’는 의미의 농구(弄毬)이다. 그 외 보상무 구성은 상세한 춤사위보다는 무진·무퇴 등 공간이동이나 동작을 지시하는 용어들로 왼손은 등에 대고 오른손은 공을 잡는다[좌우배우수집구(左手背右手執毬)], 즐겁게 어르다 공을 반의 중앙에 던진다[환농반중(歡弄盤中)] 등의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1828년(순조 28) 초연 당시 효명세자가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가사를 노래했고 다음 해인 1829년(순조 29) 진찬에서 또 새로운 창사를 지어 불렀다. 창사의 내용은 모두 잔치가 열리는 현장의 모습과 채구 놀이가 이루어지는 즐겁고 성대한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1828년 초연 시에는 각대가 나와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1829년에는 좌·우대가 각각 다른 노래를 부르고 전원이 부르는 창사도 추가되어 창사의 횟수가 두 배로 증가 했다. 1829년의 창사는 그 해만 불렀고 다음 연향부터는 1828년의 가사로 불려 고종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제기 창사](전원) 翠幕華筵耀瑞日, 綺羅三隊好新粧. 취막화연요서일, 기라삼대호신장. [제기 창사](전원) 비취 장막 화려한 자리에 상서로운 해 비치고, 비단옷 입은 3대(隊)가 곱게 새 단장했네. [일대 창사] 五雲樓閣聞仙樂, 百寶欄干拂霓裳. 오운누각문선악, 백보난간불예상. [일대 창사] 오색구름 속 누각에 신선의 음악 들리는데, 온갖 보화 꾸민 난간에 무지개 옷 스치네. [이대 창사] 錦帳初開彩袖色, 玉簾且犈繡毬香. 금장초개채수색, 옥렴차권수구향. [이대 창사] 비단 장막 열리니 채색 소매 선명하고, 옥 주렴 걷자 비단 채구((彩毬, 오색 비단으로 묶은 공) 향기롭네. [삼대 창사] 花間簫鼓莫催曲, 只恐花身落舞場. 화간소고막최곡, 지공화신낙무장. [삼대 창사] 꽃밭에서 퉁소와 북으로 음악을 재촉 마오, 꽃봉오리 춤추는 자리에 떨어질까 저어하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정재무도홀기』에 전하는 보상무의 반주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이다. 현재는 〈도드리〉, 〈자진도드리〉, 〈타령〉, 〈자진타령〉으로 반주한다.
1828년 초연시 무동의 복식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벽라포(碧羅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線中單衣)·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학정대(鶴頂帶)·무우리(無憂履)를 착용하였다.
1829년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 백질흑선중단의·홍야대(紅也帶)·흑화(黑靴)로 변화되었다. 여령의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초록단의(草綠丹衣)·황초단삼(黃綃單衫)·남색속치마와 홍색겉치마[異藍色裳表紅綃裳]·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오색한삼(五色汗衫)·초록혜(草綠鞋)를 착용한 조선 후기 여령(女伶) 복식을 따랐다.
보상무의 무구는 보상반과 채구(공), 꽃가지와 묵필(墨筆)이다. 보상반은 육각이나 팔각으로 만들어진 상(床)으로, 가운데에 연꽃이 그려진 항아리를 얹는다.
보상무는 중국의 고사를 근원으로 고려 때부터 전승되던 <포구락>의 움직임과 내용을 차용한 유희적인 춤이다. 현재 <포구락>이 더 많이 알려져 연행되고 있지만 보상무도 현장의 즉흥성에 따라 대중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역사성과 예술성을 간직한 의미있는 작품이다.
송방송 외, 『국역순조기축진찬의궤: 권1』, 민속원, 2007. 이의강 책임번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궁중악무』, 2014.
최경자(崔慶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