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유입되었으며, 다섯 신선이 양을 타고 내려와 군왕의 만수(萬壽)와 풍요를 기원하는 당악정재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수입된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송나라의 길상(吉祥) 고사에서 비롯한다. 양이 끄는 수레를 탄 다섯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한줄기에 여섯 개의 이삭이 달린 육수거(六穗秬)를 전해주며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풍년 및 무병장수를 축원한 뒤 돌아간다는 서사를 담는다. 신선을 상징하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사우대형(四隅隊形; 북서·남서·북동·남동의 방향으로 서는 것)의 형상을 이루며 춤을 춘다.
오양선은 송나라에서 고려로 수입되었으며,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는 “당나라 이군옥(李羣玉)의 「창포간(菖蒲澗)」 시에 ‘다섯 신선이 염소 타고 어느 시대에 이 고을에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고고가 초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다섯 신선이 다섯 색깔의 염소를 타고 와서 곡식 이삭을 고을 사람들에게 주었으므로, 그 고을을 오양성(五羊城)이라 했다.’고 한다.”는 내용이 전한다. 또한 『(기축)진찬의궤(1829)』에도 ‘이군옥의 시로 인하여 춤 이름으로 삼았다’고 연원을 밝히고 있다.
〇 개요
오양선은 ‘오색 양(羊)을 타고 내려온 다섯 신선’이라는 뜻의 정재로, 송대 고사를 바탕으로 고려에 유입되어 전승되었다. 다섯 신선과 오색 양을 형상화하여 궁중에 상서(祥瑞)를 상징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길상·풍년·수복과 군왕의 성덕과 치평(治平)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5명의 무용수가 일렬·사우·회무(回舞) 등의 대형으로 춤을 춘다.
〇 절차와 구성
무용수는 죽간자(竹竿子) 2인, 왕모(王母) 1인, 협무(挾舞) 4인으로 이루어진다. 무용수 좌·우에 인인장·정절·용선·봉선·작선·미선 등 위의(威儀: 호위하는 의물로 왕모나 협무를 호위하여 선계로부터 내려왔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도구) 든 의장차비 여령 18인이 정렬하고, 뒤에는 개(蓋)를 든 여령 5인이 서서 모두 23점의 의물을 배열한다. 왕모를 중심으로 일렬대형(一列隊形), 사우대형으로 구성되며, 대형이 변할 때마다 왕모와 협무가 노래 부른다.
춤의 구성은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후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도입부는 죽간자가 나아가 진구호(進口號)하고 좌·우로 선다. 왕모와 협무가 무진(舞進)하여 서고, 왕모만 치어(致語)를 한 뒤 모두 무퇴(舞退)한다. 전개부는 ① 일렬대형의 춤 ② 사우대형의 춤 ③ 일렬 제행(齊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고려시대에는 왕모 5인(중무와 협무)이 일렬로 나아가 인무(人舞:왕모는 동향, 협무는 서향으로 춤추고, 다음에는 반대로 선다) 후 이어 왕모는 중앙에, 협무는 사우대형을 이루어 왕모와 전좌(前左)-전우(前右)-후좌(後座)-후우(後右) 순으로 회선(回旋)하며 대무한다. 위의를 든 여령 18인이 <동운영채색사>를 노래하며 좌·우로 교차하며 무대를 세바퀴 돈다. 왕모 5인이 처음의 자리로 복귀한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일렬 인무를 두 번 반복한 후 사우대형을 구성하여 전좌-전우-후좌-후우 순서로 회선 대무(오양선무)로 춤춘다. 왕모와 좌·우협무가 제자리에서 각각 세 번 돌면서 춤추고 처음의 자리로 복귀한다. 조선 후기에는 일렬 인무를 생략하고, 곧바로 사우대형으로 왕모를 향해 선다. 왕무와 협무가 상대이무·회선이무·일불일전이무·수수무·상배이무·번수상대이무를 동시에 춤춘다. 왕모는 중앙에서 돌고, 협무는 크게 회선하며 손춤을 추고 일렬제행으로 연결한다. 이어 전후대형(前後隊形; 앞뒤로 대형을 이루는 것)을 추가해 좌·우 협무 제1인이 무진·대무·무퇴하면, 다음의 좌·우 협무도 이를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왕모가 무진하여 협무와 전·후 대형을 이루어 대무한다. 종결부는 고려시대에는 죽간자의 퇴구호(退口號)가 끝나면 좌·우 위의 18인이 상대·소진·소퇴하고 이어 왕모가 치어 후 협무와 함께 무퇴하면 음악이 그친다. 조선초기·후기는 죽간자 퇴구호 후 왕모가 치어하고 협무와 함께 무퇴하면 음악이 그친다.
오양선의 도입부와 종결부의 구성은 시대의 흐름에도 대체로 변함없이 전승되었다. 그러나 전개부의 춤은 고려는 의물 18인이 춤 구성에 직접 참여(회선·무진·무퇴 등). 조선 전기는 일렬 인무의 반복과 사우–회선·대무 강화하였으며, 조선 후기는 춤의 동시성을 높여 화려함을 더했고, 전후대형을 추가하여 전개를 다양화하였다.
〇 창사 오양선의 창사는 죽간자의 진구호-왕모의 치어-협무의 미전사·미후사-죽간자 퇴구호-왕모의 치어로 구성된다. 다른 정재에서는 죽간자의 퇴구호 이후에는 춤을 마치는데, 오양선은 죽간자 퇴구호 후에 왕모가 다시 나아가 노래하는 점이 특징이다. [죽간자 구호] 雲生鵠嶺, 日轉鰲山. 운생곡령, 일전오산. 悅逢羊駕之眞仙, 並結鸞驂之上侶. 열봉양가지진선, 병결란참지상려. 雅奏値於儀鳳, 華資妙於翩鴻. 아주치어의봉, 화자묘어편홍. 冀借優容, 許以入隊. 기차우용, 허이입대. 구름은 곡령(鵠嶺, 신선이 사는 산의 고개)에서 생겨나고 해는 오산(鰲山, 자라가 바치고 있는 三神山)으로 굴러가네. 양(羊)이 끄는 수레를 탄 진짜 신선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아울러 난새가 끄는 수레를 탄 하늘의 짝과 사귀게 되었도다. 청아한 음악은 봉황이 찾아와 춤을 추게 함 직하고, 무희의 화려한 자태는 너울너울 날아가는 기러기보다 묘하도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춤추는 대열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소서. [선모 치어] 式歌且舞, 聊申頌禱之情. 식가차무, 요신송도지정. 俾熾而昌, 用贊延洪之祚. 비치이창, 용찬연홍지조. 妾等無任, 激切屛營之至. 첩등무임, 격절병영지지. 노래하고 춤도 추며 부족하나마 기리고 비는 마음 펼칩니다. 불꽃이 타오르듯 번창토록 하시니, 이에 길이 이어질 큰 복을 돕고자 합니다. 첩들은 간절하고 황공한 이 마음을 걷잡을 수 없나이다. [병거외수 창사] 碧烟籠曉海波閑, 江上數峯寒. 벽연롱효해파한, 강상수봉한. 佩環聲裡異香飄落人間, 弭絳節五雲端 패환성리이향표락인간, 미강절오운단. 푸른 연기 새벽바다에 자욱한데 물결 한가롭고 강가의 두어 봉우리 차갑구나. 패옥(佩玉) 소리 울리며 기이한 향기 인간 세상에 흩날리더니 강절(絳節, 上帝나 신선이 사용하는 의장용 붉은 깃발)이 오색구름 끝에 멈추었네. [병거내수 창사] 宛然共指嘉禾瑞, 微一笑破朱顔. 완연공지가화서, 미일소파주안. 九重嶢闕望中三祝高天, 萬萬載對南山. 구중요궐망중삼축고천, 만만재대남산. 얌전히 가화(嘉禾, 기이한 벼, 태평시대의 징조)의 상서를 함께 가리키자 미소 띠시며 홍안(紅顔)을 펴시도다. 구중 높은 궁궐에서 멀리 높은 하늘 보며 세 가지[장수, 부(富), 다남(多男)]를 축원하노니, 만만년 남산을 마주하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병거외수 창사] 縹緲三山島, 十萬歲方分昏曉. 표묘삼산도, 십만세방분혼효. 春風開遍碧桃花, 爲東君一笑. 춘풍개편벽도화, 위동군일소. 祥颷暫引香塵到, 祝高齡後天難老. 상표잠인향진도, 고축요령후천난로. 瑞烟散碧雲歸, 弄暖一聲長嘯. 서연산벽운귀, 농난일성장소. 아득할사, 저 삼신산(三神山, 신선이 사는 세 섬), 십만 년 지나서야 밤과 낮이 바뀌었네. 봄바람 천지사방 벽도화(碧挑花) 피웠더니, 동군(東君, 봄을 맡은 동쪽의 신)을 보고서 활짝 웃어 주는구나. 상서로운 회오리바람 잠시 향기로운 먼지[여자들이 걸으면 일어나는 향기, 곧 여자, 여기서는 무희] 끌어오는데 비옵나니, 오래 수를 누리시어 하늘보다 더 오래 사시기를! 상서로운 연기 흩어지고 푸른 구름 돌아갈 때 따스한 날씨 즐기며 길게 휘파람을 불어보네. [죽간자 구호] 歌淸儀鳳, 舞妙回鸞. 가청의봉, 무묘회란. 整環佩而言歸, 指蓬瀛以却步. 정환패이언귀, 지봉영이각보. 百和沈烟紅日晩, 一聲遼鶴白雲深. 백화침연홍일만, 일성요학백운심. 再拜階前, 相將好去. 재배계전, 상장호거. 노래 맑으매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출 듯하고 춤을 추었더니 회란무(回鸞舞)[옛날의 춤 이름]보다 묘하도다. 패옥을 가다듬고 떠난다 고하고서 봉래(蓬萊))․영주(瀛洲)[모두 신선이 사는 곳]를 가리키며 뒷걸음으로 물러나네. 붉은 해가 저무는데 백화향(百和香)․침향(沈香) 피어나고 흰 구름 깊은 곳에 요동학(遼東鶴)[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술로 학(鶴)이 되되어 ‘요동학’이라 함] 울며 나니, 섬돌 앞에서 두 번 절하고 함께 어울려 떠나렵니다. [선모 치어] 寰海塵淸, 共感昇平之化. 환해진청, 공감승평지화. 瑤臺路隔, 遽回汗漫之遊. 요대로격, 거회한만지유. 未敢自專, 伏候進止. 미감자전, 복후진지 온 세상 먼지 말끔히 가라앉으니 태평 시절의 교화에 함께 감동하나이다. 요대(瑤臺, 선선이 사는 곳)는 길이 멀어 급히 ‘한만(汗漫)의 유람’[속세를 떠난 신선의 유람]을 그만두려 하나, 감히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엎드려 분부를 기다립니다.
- 원문 출처: 『정재무도홀기』 국립국악원(1981) 번역: 강명관
〇 춤사위 오양선은 일렬 대행에서 왕모와 협무가 동·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춤추는 인무(人舞)가 등장하고, 사우대형에서 왕모와 협무가 순차적으로 돌면서 맞춤을 춰 다섯 신선의 상징을 극대화하었다. 고려시대에 18인의 위의가 춤 진행 중 회무·무진·무퇴 하는데 이는 위엄과 격식을 갖춘 의물로서만이 아니라 춤 구성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에는 사수무·인무·팔수무·오양선무·파자무·주선·회선 등이, 조선 후기에는 좌우선전이무·일불일전이무·수수이무·상배이무·번수상대이무 등 새로운 동작이 추가되었다. 오양선무는 오양선 고유의 동작으로 추정되나, 구체적 형상은 전하지 않는다. 〇 반주음악 오양선의 반주음악은 시대별로 변화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오운개서조인자〉·〈만엽치요도령〉·〈최자령〉·〈중강령〉·〈보허자령〉·〈파자령〉, 조선 전기에는 〈오운개서조인자〉·〈최자〉, 〈만엽치요도만〉·〈보허자령〉, 조선 후기에는 〈보허자령〉·〈향당교주〉이며, 현재는 〈보허자〉·〈도드리〉·〈자진도드리〉·〈타령〉이다. 〇 복식ㆍ의물ㆍ무구 고려시대에는 검정색 삼(衫) 착용하였다. 조선 전기에 여령은 『악학궤범』 권2의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에 따라 수화‧칠보잠‧금차를 머리에 꽂고, 백말군(흰색 바지)·보로(앞치마 모양의 치마)에 홍대(가슴띠)를 두르고 단혜아를 신었다. 무동은 부용관을 쓰고 흑색 선을 두른 백주중단을 입고 오색(황‧녹‧자‧남‧도홍)의 단의(丹衣)를 입고 흑색 선을 두른 홍색 치마[裳]를 입고 두석녹정대(가슴띠)를 띠고 화아흑단화(검정가죽신)를 신었다. 조선 후기에는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황초단삼·남치마(안)·홍치마(겉)·홍단금루수대(가슴띠)·오색한삼·초록혜를 착용하였다. 하지만 1980년 재현에서 이왕직아악부 전승 영향으로 오방색(청‧홍‧황‧흑‧백) 몽두리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공연의 시대 배경에 따라 조선 전·후기 여령·무동 복식을 선택적으로 착용한다.
〇 역사적 변천 및 전승 〈오양선〉은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되었으나, 1980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정재무도홀기』를 근거로 재현하였고, 1995년과 1997년에 이흥구(李興九, 1940~ )가 『고려사』 「악지」와 『악학궤범』을 토대로 다시 재현하였다. 문헌 고증을 충실히 따른 복원의 모범 사례로 평가되며, 현재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꾸준히 무대화되며 전승되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오양선>의 전승은 궁중정재의 계보와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 등지의 동아시아적 길상 설화와도 맥을 같이하여 비교문화적 의의를 지니며, 정재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재해석을 위한 핵심적인 기준점으로 평가된다.
국립국악원 편, 『시용무보·정재무도홀기』, 전통음악연구회, 198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송방송 외, 『국역순조기축진찬의궤:권1』, 민속원, 2007 이혜구 역주, 『신역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이흥구 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보고사, 2009. 최경자, 「오양선 정재 재현의 실제와 변천양상」, 『국립국악원 논문집』, 34, 2016. 가소단, 「중국 당송악무와 고려 당악무의 비교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2.
최경자(崔慶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