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부터 추어진 향악정재의 한 종류로, 〈학무〉ㆍ〈연화대〉ㆍ〈처용무〉 정재를 연이어 추는 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섣달 그믐날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대나(大儺) 후 궁중에서 추어진 춤이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한 궁중의 대작(大作)으로, 〈학무〉ㆍ〈연화대〉ㆍ〈처용무〉 등 개별 작품들을 하나로 엮어 만들고 전도(前度)와 후도(後度)로 구성하여 연행된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규모의 궁중공연물이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 ~ 886, 재위 875~886) 대 처용설화(處容說話)로부터 유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충혜왕조 및 신우(辛禑)조에 처용희(處容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역신을[사악함을] 쫓는 주술적 ‧ 벽사적인 의미를 담은 노래인 「처용가(處容歌)」가 민간에서 널리 불렸고, 이것이 무용으로 확대되어 궁중악(宮中樂)으로 채택되면서, 고려의 〈처용가무〉는 왕실 벽사의례의 의례적 측면과 오락적인 면이 더해져 고려 말 궁중 나례의식에서 연행되었다. 조선 전기 세종 25년(1443)에는 남자가 추던 〈처용무〉를 여기(女妓)가 대신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1525)에는 원래 한 명이 흑포사모(黑布紗帽)를 착용하고 추었던 〈처용무〉가 오방처용(五方處容)으로 변화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 세조(世祖) 대에 〈학무(鶴舞)〉ㆍ〈연화대(蓮花臺)〉ㆍ〈처용무(處容舞)〉를 합설로 구성하고 전도(前度)와 후도(後度)로 구분하여 연행하면서, 벽사의 의미를 담은 전통은 계속 유지하되 오락적 요소를 대폭 강화하여 궁중축제의 하나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 연향에서 ‘합설’의 형태로 추어지기보다는 〈학무〉ㆍ〈연화대〉ㆍ〈처용무〉를 독자적으로 추었고, 이러한 양상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다. 한국전쟁 후 국립국악원은 정재 재현 사업 일환으로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을 참고하여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무대예술로 재탄생시켰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김천흥(金千興,1909~2007)과 이흥구(李興九, 1940~ )에 의해 원래 모습을 되찾기 전까지 〈학무〉는 민속무용에 궁중무용이 융합된 내용으로, 〈처용무〉는 1931년에 이왕직아악부에서 추어진 내용으로, 〈연화대〉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의 내용에 따라 추어졌다. 김천흥과 이흥구가 재현해 무대에 올린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국립국악원이 정리한 『궁중무용무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궁중무용무보』 제2집에 〈학무〉가,『궁중무용무보』 제8집에 〈연화대〉가 , 『궁중무용무보』 제1집에 〈처용무〉가 기록되어있다.학연화대처용무합설 무용수는 처용(處容) 다섯 명[청처용ㆍ홍처용ㆍ황처용ㆍ흑처용ㆍ백처용], 학(鶴) 두 명, 동녀(童女) 두 명, 인인장(引人仗) 무동(舞童) 두 명, 정절(旌節) 무동 두 명, 개(蓋) 무동 두 명, 봉화(奉花) 무동 네 명, 기(妓) 열여섯 명으로 구성된 것이 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와 시종회무도(始終回舞圖)에 전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크게 전도와 후도로 구성하여, 위치를 바꿀 때는 둥글게 돌아[회무(回舞)]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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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화대처용무합설 시종회무도 :『악학궤범』에 기록된 학연화대합설무에서 전도와 후도의 춤 전환을 회무로 하는 무용수들의 이동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다.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초입배열도: 『악학궤범』에 기록된 학연화대합설무에 출연하는 무용수 및 음악연주자, 그리고 이들이 배열된 위치를 보여주는 자료다. |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서는 무용수 전체가 등장할 때 「처용가」를 부르고, 전도에서 〈처용무〉를 출 때에는 「처용가」ㆍ「봉황음(鳳凰吟)」ㆍ「삼진작(三眞勺)」을 부르고, 전도의 춤을 마치고 퇴장할 때 「정읍(井邑)」ㆍ「북전(北殿)」을 불렀다. 후도를 위해 다시 등장할 때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을 부르고, 〈학무〉를 출 때 「벽연롱효사(碧烟籠曉詞)」를 부르고, 〈연화대〉를 출 때 동녀가 「미신사(微臣詞)」를 불렀다. 〈처용무〉를 출 때 다시 「처용가」를 부르고, 후도의 춤을 마치고 퇴장할 때 「미타찬(彌陀讚)」ㆍ「본사찬(本師讚)」ㆍ「관음찬(觀音讚)」을 불렀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학무〉의 반주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 〈연화대〉는 〈중선회인자(衆仙會引子)〉ㆍ〈헌천수만(獻天壽慢)〉ㆍ〈반하무(班賀舞)〉, 불교음악인 〈미타찬〉ㆍ〈본사찬〉ㆍ〈관음찬〉으로 구성되었고, 〈처용무〉의 반주 음악은 처용 만기(慢機)인 〈봉황음 일기(一機)〉ㆍ〈봉황음〉 중기(中機)ㆍ〈봉황음〉 급기(急機)ㆍ〈삼진작〉ㆍ〈정읍〉 급기(急機)ㆍ〈북전〉 급기ㆍ〈영산회상(靈山會相)〉 만기ㆍ〈영산회상 영(令)〉으로 구성되었다. 현재에는 공연의 성격에 따라 〈학무〉는 〈세령산〉ㆍ〈도드리〉ㆍ〈타령〉으로, 〈연화대〉는 〈보허자〉ㆍ〈도드리〉ㆍ〈빠른 도드리〉ㆍ〈타령〉ㆍ〈빠른 타령〉 혹은 〈보허자〉ㆍ〈도드리〉ㆍ〈타령〉으로 연주하고, 〈처용무〉는 〈향당교주〉ㆍ〈도드리〉ㆍ〈빠른 도드리〉로 연주한다.
〈학무〉ㆍ〈연화대〉ㆍ〈처용무〉 의상과 무구는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전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조선을 개국한 후 나라의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과정에서 치러졌던 국가적인 공연물로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공연물들이 하나로 가지런히 합설되어 궁중 공연문화의 다양성 및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춤을 통해 사상적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처용탈을 쓰고 추는 〈오방 처용무〉에서는 용신숭배ㆍ음양오행ㆍ벽사진경 사상이 들어있고, 연꽃 속에서 출현한 동녀가 추는 〈연화대〉에는 불교 사상이 들어있고, 지당[연못]의 전후 공간을 날아다니며 추는 〈학무〉에는 도교 사상 및 군왕송축 사상이 들어 있다.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윤아영, 『궁정나례의 변천양상과 공연사적 의의』, 민속원, 2012. 김수진,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1994. 문숙희, 「16세기 이전 보허자의 리듬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43, 2008. 조규익, 「악장으로서의 〈보허사〉, 그 전변에 따른 시대적 의미」, 『한국문학과 예술』 33, 2020.
손선숙(孫善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