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환 대금산조
한주환이 박종기에게 배운 선율을 기초로 자신의 가락을 덧붙여 만든 대금산조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한주환이 스승인 박종기에게 전수받은 대금 가락에 악장과 선율을 추가하여 정립되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네 악장으로 구성되었고, 변청과 변조를 활용하여 다채로운 선율 변화를 추구하였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이생강과 서용석에게 전해져 3세대 대금산조의 뿌리가 되었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박종기-한주환으로 이어지는 대금산조이다. 박종기는 판소리를 기반으로 1920~30년대에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의 세 악장으로 구성된 대금산조를 창시하였다. 한주환은 박종기에게 배운 가락에 중중모리를 추가하여 네틀 형식의 대금산조를 정립하였다.
○ 역사적 변천 과정 한주환(韓周煥, 1904~1963)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화순 유지 오판기(吳判基)가 풍류를 즐겨 그의 사랑방에서 음악인들이 자주 모이면서 한주환도 이곳을 드나들며 국악에 입문하였다. 그는 추산 전용선에게 대금으로 〈삼현〉을 배웠고,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종기에게 산조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서울로 활동 무대를 넓히면서 국악계 명인 명창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개성에 따라 박종기의 산조를 확대 변화시켜 대금산조의 중시조로 일컬어진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오늘날의 대금산조가 성행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었다. ○ 음악적 특징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종기 대금산조에서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중중모리악장을 완성하였다. 1950~60년대 산조 명인들이 악장을 추가하고 선율을 확장시키는 경향이 보편적이었는데, 한주환 역시 박종기 대금산조의 국거리를 기초로 선율을 확대하거나 새롭게 구성하여 중중모리악장을 완성하였다. 대금산조에 중중모리악장이 추가되면서 이전의 세 틀 형식이었던 대금산조가 현재와 같이 네 틀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중심음, 즉 청(淸, key)을 바꾸는 변청과 조를 바꾸는 변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 점 역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박종기 대금산조는 청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우조, 계면조, 호걸제 등 여러 조를 활용하고 같은 계면조라도 본청(c) 계면조에서 변청(f) 계면조로 청을 변화시켜 생동감 있고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보여주었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우조로 시작하여 우조로 마쳐야 한다.’는 산조에 대한 당대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진양조를 우조로 시작하고 자진모리 마지막 3장단 역시 우조로 마무리하여 산조의 시작과 끝을 우조로 대응시켜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만들었다. 이밖에도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헤미올라 및 엇붙임 선율이 자주 나타나며, 꺾는청을 활용하거나 굴리는 기법으로 시김새를 다양하게 구성하였다. ○ 악기편성 대금 독주이며 장구 반주가 따른다.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박종기의 뒤를 이어 대금산조의 중시조로 칭할 만큼 음악내용과 형식을 온전히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중중모리악장을 삽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네 악장의 산조로 형식미를 완성시켰으며, 변청과 변조를 다양하게 구사하여 선율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박종기가 임종 시에 “나는 죽어도 주환의 마음속에 다시 살으리”라고 했던 유언이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통해 구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여러 대금산조 유파의 가락 속에 한주환류 산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산조가 바로 한주환류 산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준다.
이보형,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7 : 산조 (無形文化財 調査報告書 7 : 散調)』,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7. 임재원, 『(한주환류)대금산조 ((韓周煥流) 大笒散調)』, 어울림, 1994. 이진원․김가람 글, 『대금산조(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임재원, 「대금산조의 생성 및 전승과 확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임재원(林宰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