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 풍장, 풍쟁(豊錚), 두레굿, 두레풍장굿
두레패가 논에서 김매기를 할 때나 공동 행사를 할 때 치는 농악
두레는 농경 사회의 일조직이자 사회조직의 이중 기능을 띤 자율 조직으로써, 두레에 속한 마을의 성인 남성 무리를 두레패라 지칭하는데, 이들에 의해 농사 과정 중 김매기 일과 두레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 행사[예: 〈호미씻이〉, 〈두레먹이〉, 《백중굿》 등]와 사건[예: 〈기싸움〉과 〈호미걸이〉]에서 연행되는 농악까지를 포괄하여 두레풍장이라고 한다. 논농사를 짓는 농촌사회에서는 여름철 초벌[아시매기]ㆍ이벌[이듬매기]ㆍ세벌[만물]이라 부르는 총 3회의 김매기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이때 두레패는 행렬을 갖추어 농악을 울리며 일터로 이동하고, 논에서 김매기를 할 때는 들노래와 함께 농악을 연주하며 일의 효능을 올리고, 육체의 피로감을 덜어내었다. 김매기를 모두 마치고 나면 따로 날을 정하여 두레 결산(決算)을 하고 다 함께 농악을 치며 어울려 노는 문화 행사를 행하였는데, 이것을 지역에 따라서 ‘〈호미씻이〉’, ‘〈두레먹이〉’, ‘〈술멕이〉’ 등으로 부른다.
두레풍장은 17~18세기 이앙법의 보급에 따른 두레의 확산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앙법은 16세기 초반 삼남(전라도ㆍ충청도ㆍ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 이후로는 단기에 집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이앙법에 적합한 일조직인 두레가 농경 사회 촌락 단위로 급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두레 조직은 강한 규율과 체계를 바탕으로 운영되며 농촌사회에 뿌리 깊은 문화 기단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기능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명칭에 있어서도 ‘농사(農社)’ㆍ‘농계(農契)’ㆍ‘농청(農廳)’ㆍ‘목청(牧廳)’ㆍ‘갹사(醵社)’ㆍ‘동네논매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또, 두레는 공동 일조직이면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공동 문화 형성 및 지속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현전하는 민속놀이 중에 상당수가 두레 조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농악을 비롯하여 줄다리기ㆍ〈기싸움〉ㆍ〈홰싸움〉ㆍ편싸움 등의 형성 및 지속에 큰 몫을 하였다. 두레패는 상징적인 기(旗)를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이동했으며, 농악과 들노래를 학습하고 실연하는 조직이었기에 조선 후기 이후로 전국적으로 두레풍장[두레굿]이 발달하게 된 배경이다.
두레는 논농사가 집중되어 있는 평야지대에서 활발하였으며, 너른 평야가 없는 산간의 작은 촌락에서도 규모가 작은 두레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두레가 활성화 된 배경에는 자체적으로 정한 상벌제를 운용하고 공동체의 계율과 미풍양속을 위해하는 요소에 조직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조직의 기능을 넘어선 사회적 기능체로 작동하게 되면서 생활 전반에 거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기록 두 편은 두레와 두레풍장에 관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기사(記寫)는 1737년 9월에, 호남별유어사(湖南別遺御使)로 임명된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 광경을 목도하고 농기와 농악기가 민중 반란에 군기(軍器)로 쓰여질 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려 몰수하도록 한 사실(『英祖實錄』권47, 英祖 13年 9月 丁亥條)이 주요 내용이다. 두 번째 기사는 1784년 11월 암행어사(暗行御史) 남태량(南泰良, 1695~1752)이 두레에 대해 보고하자 영조가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 1689~1746)에게 농민들이 왜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사기를 올려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답했으며, 임금이 암행어사 남태량에게는 농기(農期)가 군기(軍旗)와 같냐고 질문하고 이에 대해 남태량은 농기와 농악기(農樂器)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百年民俗)으로 금지하기 어렵다고 답하였음을 적고 있다.(『英祖實錄』권47, 英祖 14年 11月 乙丑條) 이 두 편의 문헌 기록을 통해 두레와 두레풍장의 전통은 18세기 이전 사회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편, 1915년 충청도 홍성군의 두레 분포에 대한 기록은 20세기 들어서도 농촌사회에서 매우 활성화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홍성군 관내에만 무려 197개의 두레 조직이 있고, 이 중에 164개의 두레는 두레풍장을 쳤으며, 두레풍장을 치지 않는 두레는 서른세 개에 불과했다는 기록이다.(신용하, 『공동체이론』, 문학과지성사, 1985)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심화되면서 두레를 포함한 수많은 문화 전통이 단절되거나 쇠락해졌고, 특히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공출제(供出制)로 농악기를 약탈해 가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 국가적으로 민속예술의 복원과 진흥을 위해 기울인 노력으로 두레풍장의 표현 양식은 얼마간 복원할 수 있었으나, 이후로 이어진 경제와 사회적 변동 속에서 두레 조직의 해체는 가속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두레를 핵심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두레풍장 역시 생활문화와 긴밀하게 유착한 상태의 연행은 기억 속 전통으로만 남게 된 상황이다. 두레 조직의 작동은 모심기를 마치고 나서 김매기 철을 예비하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을 성인 남성으로 구성한 두레 성원이 모여 공동 김매기 순번을 정한다. 두레풍장은 모내기를 마치고 난 이후 본격적으로 벼의 생장이 진행되는 음력 6~7월에 논에 자라난 김(잡초)을 제거해주기 위한 목적의 김매기 노동에서 연행한다. 김매기는 대체로 3회에 거쳐 진행하는데, 이를 초벌, 두벌, 세벌이라고 부른다. 두레가 뜨는 날엔 마을 공동 마당이나 회관에서 나발을 불어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이동할 때는 깃발을 든 기수가 앞장을 서고 그 뒤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나머지 두레 성원들이 일렬로 행렬을 갖춰 정해진 곳으로 가서 두레풍장을 치며 일을 진행한다. 두레패가 이동할 때 간혹 다른 마을의 두레패와 마주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풍장을 치고 깃발을 맞대며 자웅을 겨루거나, 선을 긋고 호미를 걸어 밀고 당기며 힘을 겨루기도 한다. 이 전체를 일러서 〈풍장싸움〉ㆍ〈기싸움〉/〈깃쌈〉, 〈호미걸이〉 등이라 부른다. 두레패에 의해 연행되는 농사 시기의 연행 농악 전체를 아울러 두레풍장 또는 두레굿으로 통칭하기도 하고, 논에서 연행하는 농악만을 두레풍장이라고 하고 두레 풍장과 연장선에 있거나 더 확장된 형태의 다양한 농악 놀이를 별도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예컨대, 세벌 김매기를 마치고 호미를 씻어 걸고 마을에서 벌이는 농악을 《호미씻이굿》으로, 으뜸 일꾼을 뽑고 상을 내리는 내용이 핵심인 농악은 〈장원례〉 또는 〈상머슴놀이〉로, 내용 면에서는 같지만 《호미씻이굿》과 같지만 별도로 날을 정하여 《농신제(農神祭)》를 올리고 이웃 마을 두레와 〈기싸움〉과 《합굿》을 즐기는 행사를 〈호미걸이〉로 부르거나, 백중날로 정하여 치는 농악은 《백중굿》 또는 〈백중놀이〉로 부르는 방식이다. 지역 전승 현황 면에서 보면 논에서 김매기를 하며 부르는 들노래와 농악이 중심이 되는 형태는 좁은 의미의 두레풍장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서 볼 수 있다. 세도면 두레는 두레가 작동하는 첫 날부터 해산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 두레꾼들이 모여 마을 공청에 용기(龍旗)를 세워놓고 〈기고사〉/〈두레고사〉를 지낸 뒤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농악을 치며 일터로 향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영기를 앞세우고 농악을 치며 오며, 마을 공청에 도착하면 다시 용기를 향해 예를 올려고(告)하고 난 뒤 각자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밀양에서는 백중날을 전후로 날을 정하여 《농신제(農神祭)》를 지내고, 〈북놀음〉과 〈정자놀이〉(농사풀이) 등을 연행하며 축원 고사(告祀)와 농악 놀이를 즐기는 형태의 〈호미걸이〉를 행한다. 경기도 고양 지역에서도 김매기를 모두 마치고 별도 날을 정하여 농신제를 지내며 〈호미걸이〉를 행하는데, 인근 지역의 두레패들이 모여 〈기세배〉를 하고 《합굿》으로 농악을 즐기는 형태이다. 세벌 김매기를 마치고 나서는 크게 판을 벌려 고된 노동의 끝에 대동적인 오락 시간을 갖는 문화 전통이 있다. 이때의 두레풍장은 별도로 《호미씻이굿》, 〈장원례〉, 머슴날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기도 하며, 세 벌까지의 김매기가 마감되는 때가 대체로 백중 절기와 일치하여 백중날을 택해 〈호미씻이〉를 하고 이를 가리켜 《백중굿》이라고 지칭하는 지역이 있다. 이날은 특별히 ‘일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는데 으뜸으로 꼽힌 일꾼 ‘상머슴’을 소 등이나 가마에 태워 마을을 순례하는 퍼레이드를 하고 준비한 술과 음식을 나눠 먹고 늦도록 농악을 치며 놀았다. 지역에 따라 농기를 드는 곳과 영기를 드는 곳으로 차이가 있으며, 근래에는 두레풍장 형태의 농악이지만 용기를 들고 연행하는 경우도 있다. 공연 양식으로 정형화 되면서 시간과 장소, 목적에 따라 다르게 연행하던 두레풍장과 그 파생문화가 하나의 집체(集體) 형식으로 재구성되는 문화 변천에 따른 현상이다.
두레풍장은 기수 1인, 풍물은 꽹과리, 징, 장구, 북을 각각 1기씩만 편성하여 최소화하는 것이 기본 구성이며 잡색은 없다. 두레의 공동작업이 있는 날은 농청(農廳)이나 집합 장소에서 나발을 불거나 북을 쳐서 집합을 알린다. 수총각이라고 부르는 청년이 기수가 농기(農期)를 앞세우고 그 뒤로 영기(令旗 *지역에 따라 농기없이 영기만 드는 경우도 있음)가 따르고, 이어서 두레굿패, 일반 두레꾼이 행렬을 지어서 농악을 연주하며 이동한다. 행렬이 일터를 오갈 때는 《길굿》[길군악] 가락을 친다. 또, 마을에서 일터 사이를 오가는 길에 당산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당산신(마을 최상위 신)에게 절굿 가락에 맞춰 예를 올리고 지나가는 관습 법례가 있다.
두레패가 일터에 도착하면 기는 논두둑에 꽂아 세워놓고 작업을 시작한다.(*어떤 지역은 전날 이나 두레패가 모이기 전에 김매기를 진행할 장소에 앞서서 기를 꽂아두기도 한다.) 두레풍장의 절차는 논에 들어가기 전에 농악을 치는 들풍장과 논에 들어서서 들노래를 부르며 일을 병행하는 논풍장, 김을 매고 논에서 나와 치는 〈날풍장〉, 이상 김매기라는 본사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호남평야 지대에서도 가장 수확량이 많고, 대농(大農) 지주가 다수 분포했던 김제 지역의 두레풍장은 〈돌풍장〉ㆍ〈도들이풍장〉ㆍ〈잦은풍장〉ㆍ〈날풍장〉 등의 명칭으로 과정을 구분한다. 과정을 일컫는 명칭은 주요 가락에 따른 명명이다. 〈돌풍장〉은 논에 들어가기 이전에 연주하는 농악 가락이며, 〈도들이풍장〉과 〈잦은풍장〉은 본격적으로 김매기를 진행할 때 병행하는 농악 가락이며, 〈날풍장〉은 김매기를 마치고 논에서 나와 치는 가락을 말한다. 김제는 이다. 따라서 마을굿인 《당산굿》/《당산제》에서만 걸립농악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굿》에서 전문적인 걸립농악을 대규모 농사를 짓는 지주들 사이에서 소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들풍장굿 | 이동굿 | 질굿들머리풍장 |
들머리풍장굿/돈닷돈굿 | 돈닷돈가락 | |
귀동(歸洞)굿 | 질굿 또는 삼채가락 | |
〈날풍장〉굿 | 〈날풍장〉굿 | 느린풍장-돈닷돈 풍장-삼채 또는 질굿 |
밀양백중놀이: 국가무형문화재(1980) 부평두레놀이: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2015) 고양송포호미걸이: 경기도 무형문화재(1998)
두레는 농경 민속문화의 기반이자 근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두레풍장은 두레가 낳은 문화적 산물의 상징체라고 할 수 있다. 두레가 생활조직인 농경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일조직을 넘어서서 사회적 기능체로 작동하는 성장과 확장을 보였듯이, 두레의 공동 노동이 두레풍장의 초기 맥락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면, 농악을 핵심 공연 요소로 삼는 두레풍장은 이후 《호미씻이굿》, 〈백중놀이〉, 〈기세배〉, 〈기싸움〉, 《합굿》 등 다양한 하위 문화양식을 파생시키며 농경을 배경으로 한 문화양식의 지평을 폭넓게 열어낸 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 비록 1960년 이후의 현대 사회에서 자연태(自然態) 그대로의 두레풍장은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문화재보호법(1962년 제정)에 의거한 보존 정책과 문화 진흥의 노력으로 여러 지역의 두레풍장 연행 양식이 계승될 수 있게 되었다.
이보형, 「마을굿과 두레굿의 의식구성」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1981. 신용하, 『공동체이론』, 문학과지성사, 1985. 주강현, 『두레, 농민의 역사』, 들녘, 2006. 과학사전종합출판사, 『조선의 민속전통5: 민속음악』, 과학백과사전출판사, 대산출판사, 2000. 이재곤, 『세시풍속과 전통예술』, 백산출판사, 2021.
양옥경(梁玉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