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배놀이, 쇠놀이, 뒷치배놀이, 설장구놀이, 군물놀이, 금고놀이, 설장구놀이
농악놀이에서 집단적인 놀이와 개별적으로 벌이는 여러 악기를 두고 벌이는 놀이를 총괄적으로 지칭
농악대의 구성은 흔히 앞잽이와 뒷잽이 또는 앞치배와 뒷치배로 이루어진다. 악기인 군물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쇠,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앞치배가 있고, 이와 달리 뒷치배로 잡색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구성된다. 쇠잽이, 징잽이, 장구잽이, 북잽이, 소고잽이 또는 법고잽이 등으로 확인되듯이 농악놀이의 다양한 명칭을 이르는 것이다. 홑잽이로 노는 것보다 여러 잽이들이 함께 노는 겹잽이의 놀이도 아울러서 모두 이른다. 치배놀이는 농악이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사소한 이들이 집체적으로 움직이는 조화의 음악임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것이 바로 치배놀이로 구현되는 것을 알려준다. 농악의 지역적 편제에 의해서 다채로운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치배놀이는 우리 농악의 전형과 성격을 시현하는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치배놀이는 악기의 특성에 따른 놀이에 기초하여 음악적 독창성을 비롯하여 춤의 역동성을 드러내는데 핵심적 구실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치배놀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농악대의 구성원 전체를 이르는 것이지만, 이들의 놀이를 앞치배놀이와 뒷치배놀이로 구성하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 놀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말하는 것은 여러 고전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이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기록 같은 데서 보이는 춤 동작이나 악기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놀이 등에서 치배놀이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앞의 책 기록 가운데 마한(馬韓)조를 보면 이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항상 오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했다. 무리로 모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술 마시기를 밤낮을 쉬지 않았다. 수십 명이 함께 한 가지로 몸을 일으키면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낮추고 위로 솟구쳤는데 손과 발이 서로 어울리게 하였다. 마디를 갖추어 가락을 연주하는 것이 곧 탁무와 같음이 있었다. 시월 달에 농사를 마치고도 또한 이와 같이 했다’(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고 되어 있다. 농악의 시원적인 면모와 함께 치배놀이에 해당하는 원형을 이와 같은 데서 찾을 수 있겠다. 『문헌통고(文獻通考)』와 같은 글에서도 비록 발해국속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치배놀이의 원형에 대한 기록이 없지 않다. ‘발해국의 습속에 매번 세시절기가 되면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는 전통이 있는데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라 여럿을 앞서가게 하고 남녀 행렬이 뒤따르게 하였다. 다시금 서로 노래하고 화답하게 하면서 빙글 돌아 선회하면서 구부정하게 도는 것 있는데 이를 일러서 답추(踏錘)라고 한다’(渤海俗 每歲時聚會作樂 先命善歌舞者數輩前行 士女相隨 更相唱和 回旋宛轉 號曰 踏錘)고 되어 있으니 치배놀이의 전형적 면모를 유사하게 찾을 수가 있는 방증 자료이다. 조선후기의 자료 가운데 이옥(李鈺, 1760~1815)의 『봉성문여(鳳城文餘)』라는 기록을 보면 치배놀이의 면모가 오늘날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을 확인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북, 꽹과리, 징 등을 든 사람은 모두 머리에 한 발 가량 되는 흰 생피지를 달고 있는데 상양이 뛰듯이 걸으면서 징, 꽹과리, 북 등을 치면서 머리를 흔들면 머리 위에는 수레바퀴와 같은 흰 무리가 생기는데 이를 그들 말로 ‘중피’라고 한다. 모두 마당을 돌며 뛰놀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데 징, 꽹과리, 북 등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울린다. 얼마 있다가 백로 깃털의 갓을 쓴 자는 붉은 깃털 장식을 한 아이를 어깨 위에 얹고 달려가는데 이 아이는 어깨를 밟으면서 춤을 춘다. 이것을 ‘〈동래무(동리무)〉’라고 한다. 며칠 뒤에 또 다시 먼 데서 온 자가 있었는데 또한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 마당에 들어오기 전에 세 차례에 신포가 울리고 쌍각 피리를 불며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징과 북이 땅이 울리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皆頭垂一丈白 行作商羊步 鼓且搖其頭 則頭上暈白如車輪 曰‘衆皮’ 皆遶場而走 且歌且舞 鉦鼓鑼 不敢少間 須臾 冠鷺者 以肩紅毦童子而走 童子踏肩而舞 名曰‘東萊舞’ 其後數日 又有自遠來者 又甚衆 未入場 三響信砲 吹雙角 建大旗二 鉦鼓動地 邑人皆驚)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 이옥의 기록은 오늘날의 농악대 놀이와 전혀 다른 것 같지 않다. 농악대의 구성이나 악기 편성, 치배의 면모 등에 있어서 우리의 농악과 부합한다. 이들의 놀이를 이르는 말도 낯설지 않다. 가령 상모 뒤에 달린 생피지를 중피로 표기한 것이나, 농악대의 〈무동놀이〉에서 하는 어깨를 밟고 올라가서 놀이를 하는 것이 있는데, 동리3채에 의해서 연주되는 것을 〈동래무〉로 표기한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려운 유사함이 발견된다. 농악대의 구성 역시 단순하지 않다. 농악대의 구성이나 이들이 진행하는 일정한 연희의 순서 역시 오날날의 농악과도 일치하게 된다. 그러한 놀이 속에서 발견되는 모습은 전통의 지속적 면모이다. 따라서 농악놀이나 개인놀이의 기원이 현재와 같다는 기록은 이옥의 『봉성문여』에서 보이는 핵심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치배놀이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증의 기록이다.
비록 간결한 예증을 들었지만 치배놀이의 전통이 온전하였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 역사적 기원과 변천이 선명하게 집약된다. 고대시대에는 치배놀이가 의례적 기원에서 비롯하였으나, 점차로 역사적 진행 속에서 한층 세련미를 가지면서 차원이 다른 치배놀이로 발전한 것임이 드러난다. 세시절기의 전통 속에서 예능적인 면모가 가미되면서 변화된 것이 드러난다. 현재와 같은 농악의 치배놀이는 대체로 조선후기 무렵에 완결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치배놀이는 농악의 전체 놀이와 분리할 수 없다. 농악의 놀이가 치배놀이의 모음이 아니라고 하는 뜻이다. 굿의 순서와 가락의 배열 및 연행의 진행 순서에 따라서 여러 가지 놀이가 연희된다. 집단적인 놀이에서는 각각의 악기 특성을 고르게 하나의 가락에 집약하면서 통일되어 일사분란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형태는 상쇠의 집전 아래 일정하게 가락의 변화와 관련되는 것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
집단적인 치배놀이에서는 충실하게 각 악기의 구성원들이 전체를 위하여 봉사한다. 가락은 느진가락에서 자진가락으로 이행된다. 이에 따라서 각각의 장단 변화에 세심하게 화합하면서 여러 악기의 구실이나 제몫을 하게 된다. 전체적 조화를 중시하면서 각각의 악기 부분별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 것이 확실하게 확인된다. 느린가락에서는 전체를 조화롭게 하지만, 자진가락에서는 전체를 흐트러뜨리면서 부분으로 확실하게 분화시켜 혼돈을 일으키는 모습을 갖게 된다. 우도농악의 오채칠굿과 같은 굿에서 일정하게 풍류가락이나 굿거리 가락과 같은 데서 전체적 조화를 멈추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가락을 제각각 연주하면서 치배와 관객, 앞치배와 뒷치배가 하나로 어울리면서 안팎이 열려 저마다의 놀이를 벌이는 특성이 있다. 이를 흔히 ‘각뜯어먹기’라는 말로 휘갑한다.
치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분할 가운데 하나는 윗놀음과 아랫놀음의 분간이 이루어지는 점이다. 가령 윗놀음과 같은 것은 〈쇠잽이놀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이른바 〈부포놀이〉와 같은 것이거나 소고잽이의 〈채상놀이〉 등을 이른다. 이와 달리 아랫놀음에서는 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일정한 손놀이나 발놀이 심지어는 〈자반뒤집기〉, 〈두루걸이〉 등의 동작을 이른다. 전신 운동으로 하는 놀이의 전통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일정한 놀이를 구분하는 것은 관행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놀이의 전통이 확실하게 존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놀이를 마치게 되면 《뒷굿》을 치게 되는 전통이 있다. 전체놀이의 전통과 긴장을 이어받아서 이를 확대하고 해체하여 바람직하게 구현되는 악기 부분별 중심으로 놀이를 하게 된다. 이를 개인놀이라고도 하고 달리 구정놀이라고 하는 용어가 있다. 구정놀이의 전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상쇠놀이, 소고놀이, 북놀이, 장구놀이, 열두 발 상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놀이는 전체적인 행위나 연주를 멈추고 개인별 악기별 장기를 발휘하는 것이 특징이다. 〈상모놀이〉는 〈부포놀이〉, 〈상모놀이〉, 부들상모 등을 핵심으로 하는 일정한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상모놀이〉의 전통을 비롯하여 악기별로 독자적인 놀이의 전통을 발휘한다. 가락은 대체로 악기의 특성을 고양시키는 쪽으로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예증으로 《호남좌도농악》 〈영산굿〉 연주 같은 경우에는 쇳가락의 아름다운 연주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쇠만 연주하고, 나머지 악기는 멈추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서 주목된다. 오로지 소고잽이만이 쇳가락의 변주에 힘입어서 채상을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 긴밀하게 작동한다. 가락의 아름다음과 행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점에서 긴밀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점이 드러난다. 이것이 가락과 동작, 악기의 선택적 배려가 이루어지는 특징을 구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특정한 놀이가 확대되어 전국적인 형편을 보여주는 것도 적지 않다. 그러한 놀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설장구놀이〉이다. 이 놀이는 치배놀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놀이를 두고 〈구정놀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장구를 뒤집은 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구 가락이 다양하게 발달하고, 장구의 특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호남우도농악에서 이 놀이가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도삼(金道三, 1876~1942), 김화집, 신기남 김병섭, 이봉문 등이 이와 같은 명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들이다. 설장구놀이의 창시자는 김도삼이다.
농악의 유형에 따라서 이러한 치배놀이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예능성이 높은 농악에서는 세련되고 전문적인 농악 가락에 입각하여 산뜻한 놀이를 벌이는 것이 특징이고, 전체놀이와 개인놀이가 균등하게 발달한 것을 보게 된다. 이와 다르게 시원적인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는 《농사풀이 농악》에서는 소고잽이를 중심으로 하는 농사 단계를 모방하는 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농사풀이의 면모는 단순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이와 다르게 강릉농악과 같은 데서는 퍽상모에 입각한 〈소고춤〉, 상모에 입각한 〈법고춤〉, 무동에 의한 〈무동춤〉이 분화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농사풀이 농악》에서는 이들의 전통이 분화 발전되지 않고 무동들이 농사의 단계에 따른 놀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치배놀이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특정 농악에서만 발달한 것으로 《뒷굿놀이》에 등장하는 뒷치배놀이를 들 수 있다. 뒷치배가 중심이 되는 《뒷굿》은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연희적 성격이 농후하고, 이러한 놀이는 다른 전통 속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호남농악》의 〈좌도굿〉에서 크게 확대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노래굿〉과 같은 간결한 놀이에서 〈도둑잽이굿〉과 같은 경우에는 치배놀이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노래굿〉은 농사 노래의 속성을 가진 평이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와 달리 〈도둑잽이굿〉과 같은 것은 연희적 성격이 매우 강한 집약적인 연희놀이의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배놀이에 대한 평가는 상쇠의 〈부포놀이〉와 같은 것을 평가하는 데서 처음 부각되었다. 상쇠가 모두 주도하고 놀이를 하는데 있어서 농악의 전형을 그러한 것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로 농악에서 모든 치배들이 주인공임이 알려지고 농악놀이 구성원인 치배의 대등성 평가에 따르면서 치배놀이의 모습이 재인식되었다. 아울러서 전국의 농악에 대한 형태와 지역유형이 파악되면서 치배놀이는 더 이상 뒤에 머물 수 없는 오롯한 농악놀이의 전형이 되는 점이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치배놀이의 전통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농악의 미학을 대변하는 실질적인 놀이로 전승된 것임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평가된다. 하나와 여럿, 앞과 뒤, 전굿과 후굿 등이 서로 밀접하게 발달하고, 상호 긴장을 하면서 놀이를 총체적으로 개별적으로 구현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되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박헌봉 외, 『호남농악』, 문화재관리국, 1966. 시지은, 「소고잽이로 보는 농악의 성격과 위상 소고잽이로 보는 농악의 성격과 위상」, 『민속학연구』 51, 2022.
김헌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