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량자(平凉子), 평량립(平凉笠), 폐양립(蔽陽笠), 차양자(遮陽子)
조선시대 때 신분이 낮은 양민이나 천민들이 쓰고 다녔던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은 모자
평량자(平凉子)·평량립(平凉笠)·폐양립(蔽陽笠)·차양자(遮陽子)라고도 한다. 가늘게 오린 댓개비로 성기게 얽어 만든 것으로, 모자집과 테의 구분이 분명하며 모정(帽頂)이 둥근 갓 모양의 모자이다. 조선 초기 때까지 한때 양반 및 선비나 양민들이 쓰고 다녔다는 초립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와는 달리 주로 양민 및 천민들이 주로 쓰고 다녔던 갓이며 보부상, 역졸 등이 쓰고 다녔다. 단, 역졸의 경우 겉면을 까맣게 칠해서 쓰고 다녔으며 보부상은 목화송이를 달고 다녔다.
갓의 발달과정에서 보면, 모정에서 테까지 민틋하게 내려간 방립(方笠)에서 완성된 형태의 갓, 즉 흑립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흑립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서인(士庶人)의 관모로 됨에 따라, 패랭이의 용도는 점차 국한되어 사인(士人)은 대상(大喪)이 지나고 담제(禫祭)만 남은 짧은 기간 동안에만 쓰거나, 상인(喪人)이 원행(遠行)할 때 방립 대신 쓰기도 하였다. 역졸·보부상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조선 말기까지 사용하였는데, 역졸은 흑칠(黑漆)한 것을 쓰며, 보부상은 목화송이를 큼직하게 얹어서 썼다. 또한, 천업인은 패랭이를 쓰기는 하되 노상에서 양반을 만나면 그것을 벗고 엎드리는 습속이 있었다. 평량자는 멸대모(篾大帽)를 일컫는 것으로 대나무를 성글게 엮어 만든 큰 모자이다. 역졸이나 보부상, 백정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쓰다가 조선말에는 상복에 썼다. 『선조실록』 26년에 예조에서 멸대모를 금할 것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멸대모를 아는 사람들이 없으니 팔도의 사람들이 알기 쉽게 ‘평량자’라고 써서 보내라”고 하였으며, 명을 어기는 자는 엄중히 다스리도록 했다. 『선조실록』 28년에 ‘무사로서 넓은 소매가 달린 품이 넓은 포를 입고 말을 타는 자와 서인으로서 입을 쓰거나 혹은 평량자를 쓴 자는 일체 호되게 금하여 중죄로 다스리라’고 했다. 『광해군일기』 1년에 평량자는 서인 이하가 쓰는 모자였으나 크기가 얼굴을 가릴 정도로 컸기 때문에 상주(喪主)가 썼으며, 『영조실록』 4년에는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청주목사박당(朴鏜)이 성을 버린 사람으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봐 단의(短衣)에 평량자를 쓰고 운유거사(雲遊居士)라고 칭하면서 승려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상중이거나 죄를 지어 얼굴을 가리고자 할 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랭이는 대를 잘게 쪼갠 것을 엮어서 모자집과 차양이 구분되도록 만든 갓의 하나로, 평량자·폐양립·폐양자(蔽陽子) 등을 가리키는 우리말 명칭이다. 형태상으로 대우(모자의 원통 모양 부분)와 양태(凉太, 모자 밑의 둥글넓적한 부분)의 구분이 있는 모자를 평량자형이라고 하는데, 평량자형의 기원이 되는 패랭이는 주로 햇볕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던 상민(常民)의 쓰개였다. 굵은 대오리를 성글게 엮어 만들며 모자집의 모정(帽頂)은 둥글고 차양 부분인 양태의 너비는 그리 넓지 않다. 패랭이를 기본으로 하는 평량자형 모자는 패랭이에서 초립(草笠), 흑립(黑笠) 등으로 발달하였는데, 패랭이는 양태가 아래로 약간 우긋한 데 비해 초립은 위로 버드러져 올라가 있다.
패랭이는 초립에서 흑립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 중에 생긴 것으로 대나무 껍질로 엮어 만들었다. 형태는 갓과 비슷하지만 모자의 정수리가 둥근 것이 특징이다. 평량자(平凉子)라고도 하는 패랭이는 역졸, 보부상, 백정 등 천민, 상주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보부상은 패랭이의 꼭지 밑에 줄을 둘러서 좌우에 목화송이를 꽂고 다녔다. 목화송이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전장에서 왼쪽 다리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보부상으로 종군한 백달원(白達元)의 부하 가운데 면화 장사를 하던 사람이 휴대한 면화로 응급 치료를 하였고, 태조가 그 일을 계기로 패랭이의 좌우에 목화를 달게 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에는 “임진왜란 때 적이 흑립을 쓴 양반을 만나면 잡아가고, 패랭이를 쓴 자는 극빈자라 하여 잡아가지 않았으므로 이때 양반들도 패랭이를 써서 한때 크게 유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흑립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서인(士庶人)의 관모였음에 비해 패랭이의 용도는 점차 국한되어 조선 말까지 신분이 낮은 역졸이나 보부상, 기타 천직(賤職)에 있는 사람들이 상용하였으며, 특히 보부상은 패랭이에 목화송이를 큼직하게 얹어서 착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위와 귀천의 차별 없이 흑립 사용이 허용되어 천인층에도 흑립을 쓰도록 하였음에도 천인들은 흑립을 감히 쓰지 못하고 계속 패랭이를 썼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패랭이는 노동모로 햇볕이나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오늘날 여름철에 흔히 보는 밀짚모자는 용도나 형태상으로 보면 패랭이의 한 유형이다.
입(笠)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관모 중 하나로 평량자나 삿갓의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처음에는 관모라기보다 더위와 비를 막는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점차 재료와 제작 방법이 발전하면서 종류와 용도가 확대되었다. 그중 패랭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남성용 쓰개인 흑립(갓)의 시원(始原)으로, 조선시대에 초립, 흑립으로 발전하였다. 흑립이 양반의 관모인 것에 비해 패랭이는 천민층의 관모였다.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영조실록』 『임하필기』 강순제, 『우리 관모의 시말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온양민속박물관, 『조선시대의 관모』, (재)계몽문화재단, 1989. 최남선,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동명사, 1946.
안명숙(安明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