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건(民字巾), 연라건(軟羅巾), 연두건(軟頭巾), 치포건(緇布巾)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儒生)이나 생원(生員)들이 착용한 쓰개
유건은 주로 벼슬이 없는 선비나 성균관의 유생(儒生)이 평상시에 착용하였으며, 향교, 서원 혹은 과거시험장에 나갈 때 쓰거나 제사에 참석할 때 쓰던 건이다. 조선 성종대에 윤효손(尹孝孫, 1431∼1503)이 유건 제도를 제안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생의 모자로 정착하였다. 유건이 일반화되면서 창의(氅衣)나 청금(靑衿, 청색 깃의 옷으로 유생복)과 함께 착용하였다. 현재는 향교나 서원의 향사나 사가(私家)의 제사 때 의례복과 함께 착용한다.
유건은 1433년 『세종실록』 10월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사역원의 학생들 중 전직 7품 이하로서 역과 출신이 아닌 자는 모두 유건을 착용하도록 하고 있어 조선 초기에는 낮은 계층 유생들의 쓰개였다. 1438년(세종 20) 2월, 진사(進仕)는 모두 유건을 쓰고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생원(生員)처럼 사흘 동안 유가(遊街)를 갈 수 있도록 하여 급제 시 유건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효손의 『추계선생실기(楸溪先生實記)』 「추계집곤(楸溪集坤)」에는 유건을 만들게 된 동기를 기록해 두었다. 국초에 유건 제도가 없어 관학과 과장에 폐단이 많았는데 사학식(士學式) 제도로 건을 만들어 편리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조선시대 유생의 유건 제도가 이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88년 『조선부』기록에 유생이 연라건(軟羅巾)을 착용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생의 관모를 유건으로 정하였지만 바로 시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윤효손의 유건도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졌다. 『상방정례(尙方定例』에는 연두건(軟頭巾)으로,『반중잡영(泮中雜詠)』에는 치건(緇巾)으로 기록되어 있다. 1485년 『경국대전』에 “유학은 청금을 착용한다[儒學用靑衿]”는 주(註)에 “제학생도는 치포건(緇布巾)을 쓰고 단령”을 입는다는 내용이 있다.치포건은 평정건 다음으로 제시된 유생의 제도적 관모이며, 단령 형태에 흑선을 두른 난삼(襴衫)은 명나라의 생원복에서 비롯된 옷이다. 1574년(선조 7) 11월에 국자감의 무학생(武學生)은 모두 유건과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하여 제도상으로도 착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유생이 노상(路上)에서는 갓을 착용하였지만 성균관과 향교 내에서는 물론, 과거시험장에서도 착용하였다. 또한 왕세자가 작헌례(酌獻禮)와 입학례(入學禮)에서도 착용하였고, 성종대 이후부터 1743년(영조 22)까지는 생원ㆍ진사 방방(放榜)에도 유건을 쓰고 검은색 단령을 착용하였다.
『추계선생실기』에 유건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실려 있다. 즉, “성균관 학생과 유생의 관[館學儒冠]은 본래부터 제정된 것이 없었는데, 선생이 전사후민(前士後民)의 뜻으로 건을 만들어 우리나라 제 유생의 본보기로 삼았다.”라는 설명과 〈유건도(儒巾圖)〉로 제시된 유건의 도상이 제시되어 있다. 전사후민이란 유건의 앞쪽은 선비처럼 꼿꼿하게 세운 형상이고, 뒷면은 민자 모양이라는 뜻이다.
조헌(趙憲, 1544∼1592)이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올린 8조의 상소문 중에 유건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유건의 이름은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모양이 민(民)자와 같기 때문이고 그 제도는 대[竹]를 얽어 치포(緇布)로 싸기도 하고 종이에 풀을 발라 만든 뒤에 옻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쓰고서 안개나 빗속에서도 그냥 다니는데 우리나라의 사건(士巾)처럼 이슬만 맞아도 처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모양도 단정하고 평평하여 그다지 뾰족하거나 경사지지 않으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할 팔도의 사건을 이 제도에 따라 고치게 한다면 외관상 보기에도 좋을 것입니다. 조헌은 중국의 유건은 민자건(民字巾)이며 대를 엮어 만든 것으로, 주로 검은 베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유건과는 차이가 있으니 중국의 제도로 바꾸면 좋을 것이라 하였다. 중국의 유건은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한데 우리의 유건은 뾰족하고 경사져서 여러모로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중국의 유건과 우리의 유건 형태를 비교하고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에도 유건이 민자건이라고 하면서 유건의 착용법에 대해 언급하였다. 생도의 치건이 민자건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이 뒷면은 마치 벽처럼 꼿꼿하게 서서 굽혀지지 않고, 위를 조금 굽혀 숙여서 앞면이 되도록 하면 남은 폭이 양 쪽 옆으로 벌어져 귀가 되는데, 이 양쪽 귀를 반쯤 접어서 판판하게 하면 민자(民字)의 모양처럼 되는 까닭에, 세속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앞면과 뒷면을 서로 바꿔 만들었으니 해괴한 일이다. 이익의 설명은 윤효손의 전사후민 방식과는 상반되어 어느 것이 원래의 모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유건의 착용법은 전사후민 방법이 일반적이다.
유생들이 실내에서 쓰는 민자건으로 홑겹이다. 검은색의 삼베를 접어 방형의 모부(帽部)를 만들고 윗변은 귀를 접어 뒤로 넘긴 형태이며, 밑단의 턱 부위에는 끈 한 쌍이 달려 있다.
김홍도 풍속화첩에 유건을 쓴 유생들이 그림을 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건의 소재는 모시, 삼베, 무명 등 제한이 없으며, 중국에서 대나무로 얽어서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쓰개의 일종이지만 고정하는 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전해진다. 유건의 색은 검은 색으로 대부분 통일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유건은 검은색 베를 가지고 자루모양으로 만들어 양 옆을 깊숙이 접어 넣은 후 위쪽 솔기부분을 뒤쪽으로 5㎝ 정도 눕히면서 양귀를 자연스럽게 잡아 뺀 형태로 사(士)자 모양이 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02년 촬영한 계룡산 산신제 사진에는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고 유가식 제례 행사를 하고 있으므로 현재까지 제례의식에 유건이 착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유건은 성균관 유생이 수업을 할 때 착용하는 쓰개이다. 또한 진사나 생원이 과거급제 후 유가를 할 때도 유건을 쓰고 흑단령을 입었다. 유건은 문관이나 유학자의 상징이었으며,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일상생활과 제례를 행할 때에도 의례복과 함께 착용하였으며, 유건의 앞쪽은 선비처럼 꼿꼿하게 세운 형상이고, 뒷면은 민자 모양으로 민자건이라고 한다.
『경국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99. 국립민속박물관, 『머리에서 발끝까지』, 2011. 서옥경, 「조선시대 과거복식에 관한 연구」, 『경원전문대학 논문집』 17/2, 1995. 홍나영, 「조선시대 유생복식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성균관 학생복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1/3, 1997. 진덕순, 「조선 유생의 문과 급제와 복식문화 연구」, 안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무형유산 디지털 아카이브(www. iha.go.kr/html). 조선왕조실록(www. sillok.history.go.kr/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www. encykorea.aks.ac.kr/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도서관(www. lib.aks.ac.kr/html).
김용문(金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