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태평(保太平), 문무(文舞), 일무(佾舞)
종묘제례 때, 조선 건국의 업적을 찬양하고 태평이 길이 보전되기를 기원하는 춤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종묘에서 큰 제례[대제(大祭)]를 거행할 때에 추는 춤이다. 보태평지무는 그 하위에 열한 개의 악곡이 있으며, 일무 형식으로 춤춘다. 약(籥)과 적(翟)을 들고 추는 보태평지무는 검(劒)과 창(槍)을 들고 추는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와 짝을 이룬다. 보태평지무는 문무, 《정대업지무》는 무무에 해당되는데, 문무는 조선 역대 왕의 문덕이 크게 빛남을 찬양하고, 나라에 풍년과 평화가 오래 보전되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태평지무는 《정대업지무》와 함께 1447년(세종 29)에 처음 발표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종묘 제향 때에 중국식 제사 음악인 아악(雅樂)을 연주했고, 춤도 아무(雅舞)로 추었다. 세종은 종묘제례에 쓰기 위해 1447년에 향악(鄕樂)과 고취악(鼓吹樂)에 기초하여 새로운 악가무인 《보태평지악》과 《정대업지악》을 지었으나, 세종이 왕위에 있었던 동안 종묘의 제례악으로 연주되지 못했고 기존의 아악을 사용했다.
문무인 보태평지무가 종묘제례악에 처음 쓰인 것은 1464년(세조 10) 음력 1월 춘향대제(春享大祭)이다. 이후 4월‧7월‧10월‧12월에 올리는 종묘대향(宗廟大享) 때도 육일무(六佾舞)로 보태평지무를 춤추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10월 이후에는 황제의 격식에따라 팔일무(八佾舞)로 추었고,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다시 육일무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종묘대제가 중단되었다가 1969년에 재개되었고, 1971년부터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의례를 행하는데, 이 때 보태평지무를 팔일무로 추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의 음악과 춤을 관장하는 장악원에서 종묘제례악과 일무를 담당했고, 20세기 초반에는 장악원의 뒤를 이은 이왕직아악부에서 이를 전승하였다. 현재는 이왕직아악부 출신 악사들의 전승 활동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종묘제례악을 계승하였고, 사단법인 일무보존회에서 종묘대제의 일무를 담당하고 있다.
보태평지무는 노랫말인 악장(樂章)이 제일 먼저 지어졌고, 이후 그에 맞는 음악과 춤이 완성되었다. 종묘제례 중 문무인 보태평지무는 영신(迎神), 전폐(奠幣), 초헌(初獻)이 진행될 때에 춘다. 처음 신을 맞이할 때의 영신 <희문(熙文)>과 폐백을 올릴 때의 전폐 <희문>이 따로 지어졌다.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의 보태평지무는 헌관(獻官)을 ‘안으로 인도한다’ 는 의미의 인입(引入)곡 <희문> 한 곡과 본 의식에서 쓰이는 아홉 곡, 그리고 ‘이끌어 나간다’는 의미의 인출(引出)곡 <역성> 한 곡으로, 총 열한 개의 악곡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625년(인조 3)에 중국 명나라의 법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되어있는 조선왕실의 족보를 수정한 것(宗系辨誣)과 국난을 극복한 선조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중광(重光)>을 삽입하고, 본래의 <용광(龍光)>과 <정명(貞明)>을 합하여 <용광정명> 한 곡을 만들었다.
보태평지무는 왼손에 약(籥),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종묘의 전각을 바라보며 춤춘다. 시용무보(時用舞譜)의 <희문>‧<귀인(歸仁)>‧<집령(輯寜)>‧<현미(顯美)>‧<대유(大猷)>‧<역성(繹成)>의 춤동작 지시어(指示語)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표기되어 8‧8‧6‧9로 조합‧구성된 서른한 개 동작을 실행한다.
처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합흉(合胸)] 후, 약을 잡은 왼손은 가슴 앞에 그대로 두고, 오른손만으로 하수(下垂: 아래로 내림)‧외거(外擧: 밖으로 듦)‧거견(擧肩: 어깨로 듦)‧수복(垂腹: 배로 내림)‧환거(還擧: 다시 듦)‧외휘(外揮: 밖으로 돌림)‧하수(下垂: 아래로 내림)까지 합흉을 포함하여 여덟 개의 동작을 한다. 두 번째는 적을 잡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두고[점유(點乳)], 왼손으로만 하수로부터 마지막 하수까지 점유 포함 여덟 개 동작을 실행한다. 즉 오른손과 왼손이 각각 여덟 개씩 동작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좌우 두 팔을 나란하게 양수거견좌(兩手據肩左: 두 손을 좌측 어깨에 의탁함)‧인흉(引胸: 가슴 앞으로 끌어들임)‧하수우(下垂右 우측 아래로 내림), 그리고 환거우(還擧右: 다시 우측으로 듦)‧인흉‧하수좌의 여섯 개 동작을 실시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좌우의 양손이 신체를 중심에 두고 대칭을 이루는 동작 아홉 개, 복파(腹把), 거견‧절견(折肩)‧하견(荷肩)‧추전(推前)‧추후(推後)‧추전‧합흉까지 연행한다.
또 <기명(基命)>‧<형가(亨嘉)>‧<용광>은 8‧8‧9로 구성되었고, <융화(隆化)>는 중앙에 위치하여 홀로 8‧8‧(6‧6)‧9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1930년대 이왕직아악부의 김영제(金寧濟, 1883~1954) 아악사장에 의해 세 방향으로 절하는 삼방배 일무를 『시용무보』를 근거로 재현한 춤을 추고 있다. 다만 춤 술어의 한자 해석의 차이로 시용무보의 동작과 일부 다르게 연행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시용무보에 ‘거견’은 춤 도구(무구)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모습인데, 현재는 “외거에서 팔을 들어 뒤로 짓되, 어깨와 수평이 되도록”이라고 풀이된 동작을 행하고 있다. ‘양수거견’은 “양 팔[兩手]을 접어 어깨 부위로 올리는 동시에 우측다리를 들었다가 허리를 굽히며 팔과 다리를 일시에 내린다”고 하는 동작이 행해지고 있다.
종묘대제에서는 노래를 ‘악장’이라고 한다. 보태평지무에서 노래하는 악장은 총 열세 곡이다.
☞보태평지무의 소제목과 노랫말 내용은 보태평 각 항목 참조
보태평지무의 반주 음악은 《보태평지악》이다. <희문>으로부터 <역성>까지의 열한 곡은 각 악장의 자구(字句)에 따라서 각기 선율과 리듬을 붙여 작곡되었다. 선율은 황종(黃鍾)‧태주(太蔟)‧중려(仲呂)‧임종(林鍾)‧남려(南呂) 다섯 음을 2옥타브에 걸쳐 사용했다. 악조(樂調)는 청황종을 궁음(宮音: 중심음)으로 삼았기 때문에 ‘청황종궁조’라고 표기되어 있다. 각 곡은 악장의 자구 수에 따라서 리듬을 달리하는 것이 아악(雅樂)과 다른 특징이다.
조선 시대 종묘제사에서 착용한 보태평지무 복식은 진현관(進賢冠)을 머리에 쓰고, 남주의(藍紬衣), 적상조연(赤裳皂緣)을 입고, 허리는 적말대(赤抹帶)로 묶는다. 흰색 버선[백포말(白布襪)]에 오피리(烏皮履)를 신는다. 육일무(六佾舞) 앞에는 둑[纛]을 잡고 춤을 인도하는 의물잡이가 있었다.
무용수는 문무의 도구인 약(籥)을 왼손에, 적(翟)을 오른손에 쥐고 춤춘다. 20세기 초반부터 보태평지무 복식은 복두(幞頭)를 머리에 쓰고, 홍주의(紅紬衣)를 착용하며, 남사대(藍紗帶)로 가슴 부위를 묶고 신발은 목화(木靴)를 신었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는 보태평지무의 조선시대 복식인 남주의와 적말대, 진현관, 오피리 등을 되살려 착용하고 있다.
둑 의물잡이는 생략되었고, 약과 적으로 문무를 추는 전승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는 종묘제례에 평소 조상들이 듣던 향악을 쓰고자 한 세종에 의해 탄생하였고, 세조에 의해 정식으로 종묘제례에 쓰이게 되었다. 제례에 중국식 아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관습을 버리고 우리 고유의 향악을 제례음악으로 사용했다는 데서 세종의 자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종묘제례악 : 국가무형문화재(1964) 종묘제례악 :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2001) (2008년부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변경)
세종 29년(1447)에 보태평지무가 처음 제작된 후, 조선 전기까지는 임금과 신하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회례연(會禮宴)이나, 사신을 접대하고 위로하는 사신연(使臣宴), 제사 후에 조상의 음덕을 바라는 음복연(飮福宴) 등 연향 때에 연행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종묘제례에만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세조실록』, 『대악후보』, 『속악원보』, 『시용무보』 국립국악원 편, 『시용무보ㆍ정재무도홀기』 한국학음악학자료총서 4, 국립국악원, 1981. 송지원ㆍ이숙희ㆍ김영숙,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이종숙, 『종묘제례악 일무의 왜곡과 실제』, 민속원, 2012.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