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抛毬), 구락(毬樂), 포락(抛樂), 포보원(抱寶夗)
당악정재의 하나로, 무용수들이 편을 갈라 포구문(抛毬門)의 구멍에 공을 던져 넣으며 즐기는 놀이 형식의 춤
고려 시대에 송나라로부터 유입된 당악정재이다. 포구문을 가운데 놓고 무용수들이 좌대와 우대로 편을 나누어 춤추며 차례대로 나아가 공[(포구(彩毬)]을 던져 구멍[풍류안(風流眼)]에 공이 들어가면 꽃을 상으로 받고, 넣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먹으로 점을 찍는[점묵(點墨)] 놀이 형태의 춤이다.
고려 1073년(문종 27) 11월에 열린 팔관회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이 새로 전습(傳習)한 포구악과 구장기별기를 왕에게 선보였다는 기록이 『고려사』권 71에 전한다. 또한 1828년(순조 28)의 순조 무자 『진작의궤』에 의하면 “송나라 때 여자대무 중 포구락대가 있었는데, 고려 시대 단오절에 포구락을 하였고, 우리 조정의 연례에도 이것을 모방하여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널리 알려져 공연되고 있는 포구락은 1920년대 이왕직아악부 시절 무동이었던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반복되는 진행절차와 춤사위를 생략하는 등 『정재무도홀기』에 기반을 두고 공연 상황에 맞게 무대에 올려져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또한 국립국악원에서는 시대별로 조선 초기 악학궤범』과 조선 후기『정재무도홀기』, 1920년대 이왕직아악부의 정재를 기록한 노트인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소장의『무의(舞儀)』를 근거로 포구락을 재현하여 전승을 이어가고 있다.
〇 내용 춤의 주요 내용은 포구희(抛毬戱)로서 시대의 흐름에도 변함없이 추어졌다. 조선 전기 『악학궤범』에 전하는 포구락 춤은 ①죽간자가 나아가 구호한 다음 ②기녀가 차례대로 나아가 노래와 포구희를 하고 구멍으로 공을 던져 들어가면 서방색(書房色)이 나와 상의 의미로 베(布)를 놓고 나가고, 넣지 못하면 악사가 붓을 들고 나와 오른쪽 볼에 점묵(點墨)을 그린다. ③모든 절차가 끝나면 죽간가자 나아가 구호를 부른 다음, 무용수를 이끌고 물러난다. 조선 후기에는 상으로 베와 함께 꽃을 받았다.
〇 구성 무용수의 구성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죽간자 두 명과 협무 열두 명이고, 조선 초기에는 협무 열여섯 명, 조선 후기에는 협무가 네 명에서 열두 명으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1795년(정조 19)과 1902년(광무 6)에 열린 진연에서는 <쌍포구락>으로 추어지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의궤의 도식(圖式)을 보면 봉화(奉花; 꽃을 주는 사람)‧봉필(奉筆; 붓을 잡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무용수가 있어 상‧벌의 의미로 꽃과 얼굴에 점묵을 그려 주었음을 알 수 있다.
〇 구조 도입부에는 무용수들과 죽간자가 입장하고, 죽간자가 나아가 구호하고 좌·우로 나누어 선다. 진행부에는 ①전대(全隊)가 나와 춤을 추는데, 시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화병 앞에서 꽃을 꺾는 형상의 춤을 추고 「동천경색사(洞天景色詞)」를 부르며 회무(回舞; 원으로 둥글게 돌며 춤추는 대형)한다. 이런 구조는 조선 시대에는 생략되고 전대가 나와 대무(對舞)하는 구성으로 바뀌었다. ②무용수들이 포구희를 하기 위해 차례대로 나아가 노래를 부르고 무퇴‧무진하며 춤을 추고 공을 던지는데, 공을 던지는 기회가 세 번 주어진다. 공이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음에 따라 상‧벌이 주어지고 물러나면 다음 대가 나와 똑같은 절차로 춤춘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좌대(左隊)와 우대(右隊)가 차례대로 나와 각각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전대(前代) 두 사람이 함께 나와 노래와 춤추었다. 종결부에는 포구희가 모두 끝나면 죽간자가 나아가 구호하고 협무도 마무리 춤을 추고 물러난다. 〇 주요 춤사위 조선 전기 『악학궤범』의 포구락에는 춤 진행마다 절화무, 사수무, 농구무, 협수무 등의 춤사위를 구성하여 추었다. 농구무(弄毬舞)는 공 던지기 전에 추는 예비 동작으로 무퇴·무진·무퇴·무진하여 오른손은 공을 잡고, 왼손은 머리 뒤에 얹고 추는 춤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동작인지 알 수 없지만 놀이적 요소가 강한 춤사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포구락은 잡기이고 곡절이 너무 길다.”고 평하였을 만큼 창사가 많이 나온다. 창사의 내용은 주로 포구놀이가 이루어지는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고려의 창사가 주로 포구놀이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조선시대 창사에는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현재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재현하여 무대화된 포구락에서는 모든 창사가 생략되어 있다. [죽간자 구호] 雅樂鏗鏘於麗景, 妓童部列於香階. 아악갱장어려경, 기동부열어향계. 爭呈綽約之姿, 共獻蹁躚之舞. 쟁정작약지자, 공헌편선지무. 冀容入隊, 以樂以娛. 기용입대, 이락이오. [죽간자 구호] 청아한 음악 고운 경치 속에서 곱게 울리고 섬돌에 줄지어 선 어린 기생들 고운 자태 뽐내며 당실당실 춤을 추니 그네들 들라 하시어서 모쪼록 즐겁게 누리소서. [전대 창사](일대 창사) 翡翠簾前抛繡毬, 窄羅衫子緊裹頭. 비취염전포수과, 착나삼자긴과두. 玉纖高指紅絲網, 嬴取筵前第一籌. 옥섬고지홍사망, 영취연전제일주. [전대 창사](일대 창사) 비취 주렴 앞에서 채구(彩毬)을 던지는 이 좁은 소매 비단 적삼에 머리를 동였구나. 섬섬옥수 고운 손 붉은 그물 가리키고 연석(筵席)에서 첫 점수를 얻으려 하네. [이대 창사] 翠幕華筵拂霓裳, 綺羅六隊簇宮商. 취막화연불예상, 기라육대족궁상. 驀然高柳鶯梭擲, 髻上新花惹御香. 맥연고류앵사척, 계상신화야어향. [이대 창사] 비취빛 장막 화려한 연석에 무지개 옷 스치고 비단옷 여섯 대오 음률을 모으네. 문득 보니 버드나무에는 꾀꼬리가 왔다 갔다 묶은 머리에 꽂은 꽃은 향기를 날리누나. [삼대 창사] 粉面嬌嬈列兩行, 歌聲十二遏雲祥. 분면교요열양행, 가성십이알운상. 笑回星眼傾簪玳, 不覺花枝墜舞場 소회성안경잠대, 불각화지추무장. [삼대 창사] 분단장 아가씨들 두 줄로 늘어서서 열두 가락 노래 불러 가던 구름도 멈추었네. 웃으며 별 같은 눈 돌리니 대모(玳瑁) 비녀 흘러내려 어느 결에 꽃가지가 춤추는 자리에 떨어졌네. [사대 창사] 五花心裏角抛毬, 香腮紅嫩柳烟稠. 오화심리각포구, 향시홍눈류연조. 淸歌疊鼓連催促, 這回不讓第三籌 청가첩고연최촉, 저회불양제삼주. [사대 창사] 오색 꽃 속에다 공 던지기 겨루니 아가씨 볼 발그레하고 버들에는 연기 자욱하네. 맑은 노래, 잦은 장단 공 던지기 재촉하니 이번 세 번 째 공은 기필코 넣으리라. [오대 창사] 簫鼓聲聲苦莫崔, 彩毬高下且俳徊. 소고성성고막최, 채구고하차배회. 輕抛正透紅門過, 共獻君王萬壽杯 경포정투홍문과, 공헌군왕만수배. [오대 창사] 피리 소리, 북소리, 재촉을 그만 하소 비단 공 아래 위로 겨누고 망설이다 가볍게 던진 공이 붉은 문을 지나가니 다 같이 우리 임금 만수(萬壽) 비는 술을 올리노라. [육대 창사] 聞道抛毬喜更忙, 走臨鸞鑑畧勻粧. 문도포구희갱망, 주림난감약균장. 輕招羣隊伴紅袖, 只有微心管舊香. 경초군대반홍수, 지유미심관구향. [육대 창사] 포구락 한단 말에 좋고도 황망하여 거울로 달려가 얼추 단장 마치고 무희들 살짝 불러 미인과 짝이 되니, (?)미묘한 마음 있어 예전 향기를 알아보네. [죽간자 구호] 七般妙舞*, 已呈飛燕之奇. 칠반묘무, 이정비연지기. 數曲淸歌, 且冀貫珠之美. 수곡청가, 차희관주지미. 五音齊送, 六律上催 오음제송, 육률상최 再拜階前, 相將好去 재배계전, 상장호거 [죽간자 구호] 칠반무(七盤舞)[7개의 쟁반을 놓고 그것을 밟거나 주위를 돌며 추는 춤] 묘한 춤으로 비연(飛燕, 한나라 成帝의 후궁, 가무에 뛰어났다고 함)의 기이한 재주를 보였고 몇 곡 맑은 노래도 구슬을 꿴 듯한 아름다움을 바랐지요. 오음(五音)이 일제히 떠나라 하고 육률(六律)이 서로 재촉하매, 섬돌 앞에서 두 번 절하고 함께 어울려 떠나렵니다.
*‘七般妙舞’의 ‘般’은 ‘盤’의 오자 보인다. ‘七盤舞란 춤이 있기 때문이다.
- 원문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포구락의 시대별 창사 비교>
고려사악지
악학궤범
정재무도홀기
죽간자
구호
구호
협무
전대(全隊)
삼대사(三臺詞)동천경색사 (洞天景色詞) 양행화규사(兩行花竅詞)
절화삼대사(折花三臺詞)소포구락사(小抛毬樂詞)
X
전대(全隊)의 창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략되거나 간소화됨.
매대(每隊)
좌ㆍ우대 각각 창사(12회)
좌ㆍ우대 각각 창사(16회)
좌ㆍ우대 차례대로 나와 동일한 창사(6회)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매 대 좌ㆍ우대가 각각의 창사를 불렀는데 조선후기에는 매대 동일한 창사를 불러 창사의 수가 반으로 생략됨.
전대(全隊)
창사
X
X
죽간자
구호
구호
고려 시대에 연주되었던 반주음악은 〈절화령(折花令)〉·〈수룡음령(水龍吟令)〉·〈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청평악령(淸平樂令)〉이고, 이 음악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당교주(鄕唐交奏)〉만을 연주하였다. 현재 반주음악은 〈도드리〉·〈자진도드리〉·〈타령〉·〈자진타령〉등이 연주된다.
〇복식 고려의 복식은 검정색 삼(衫)을 입었다. 조선 전기에는 기본 여기 복식과 무동 복식을 착용하였다. 조선 전기 『악학궤범』 권2의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에 기록된 여기의 복식은 단장(丹粧)하고 수화‧칠보잠‧금차를 머리에 꽂고, 백말군(白襪裙)·보로(甫老)·홍대(紅帶)를 두르고 단혜아(段鞋兒)를 신었다. 무동은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흑색선을 두른 백주중단(白紬中單)을 입고 황‧녹‧자‧남‧도홍의 오색단의를 입었다. 흑색 선을 두른 홍색 치마를 입고 두석녹정대(豆錫綠鞓帶)와 화아흑단화(花兒黑短靴)를 착용하였다. 조선 후기 무동은 아광모(砑光帽)·홍라포(紅羅袍)‧백질남선중단의(白質藍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학정대(鶴頂帶)·흑화(黑靴)·한삼을 착용하였다. 여기는 화관(花冠)·초록단의(草綠丹衣)·황초단삼(黃綃單衫)과 안에는 남색치마와 겉은 홍색치마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와 오색한삼과 초록혜(草綠鞋)를 착용하였다. 현재 포구락 의상은 조선 후기 여기복식인 황초단삼을 입는다. 〇의물 조선 전기『악학궤범』에는 좌우에 인인장·용선‧봉선‧작선·미선과 의물 사이에 정절 등 열여덟 명의 의물과 네 명의 개를 무용수의 뒤쪽에 배치하고 있지만 고려사 「악지」나 조선 후기 홀기에는 의물의 기록이 없다. 〇무구 포구문은 공을 던져 넣는 틀로, 나무로 만들어 용‧봉‧구름‧선녀 등의 무늬를 새겨 넣고 초록과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두른다. 공[채구(彩毬)]는 나무를 깎아 만들어 붉은 칠을 하고 비단 술로 장식한다.
현존하는 정재 중 명확한 유입과정과 긴 역사성을 지닌 포구락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공연되는 대표 종목이다. 고려 시대에는 송악을 기본 틀로 하고, 조선 전기에 일부 재정비되고 조선 후기에는 향악화, 토착화되었다. 현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되어 경기적 요소와 함께 현장의 즉흥성에 따라 대중의 공감대를 받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후기 궁중 뿐 아니라 전국 교방에서 향유되었던 광범위한 분포를 지닌 역사성 깊은 춤이다.
궁중에서 추어진 포구락은 지방 관아 및 민간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 전국적으로 공연되었다. 평안도 성천에서는 <포구>, 황해도 해주에서는 <구락>, 황주에서는 <포락>, 전라도 남원에서는 <포보원>으로 불리었다. 또 한 조선 후기에 국연(國宴) 기록된 열일곱 종의 의궤 중에 두 종을 제외하고 모두 기록되고 공연되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이흥구 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보고사, 2009. 장사훈, 『한국전통무용연구』, 일지사, 1977. 이혜구 역주, 『신역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최경자(崔慶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