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중노리, 만석승희(万石僧戱), 망석승극(忘釋僧劇)
사월초파일에 연행되었던 불교의 그림자놀이로 1983년 민속학자 심우성이 복원하였다.
만석중놀이는 ‘만석’이라는 스님에 해당하는 나무 인형과 종이로 만든 용과 잉어, 사슴, 노루의 형상물 등이 등장하는 무언(無言)ㆍ무서사(無敍事) 그림자놀이이다. 서사가 없고, 사건도 없어 ‘극(劇)’이라 표현하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 이 놀이의 그 구체적 기록은 1933년 발간된 김재철의 『조선연극사』부터 나타난다. 이후 심우성이 1970년대 남사당패 출신의 남형우, 양도일, 그리고 통도사의 경봉 스님이 목격했던 만석중놀이를 종합하여 1983년 문예회관(현재의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복원공연을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석중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만석중놀이의 가장 앞선 기록인 1933년의 김재철 『조선연극사』에서는 그 유래를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진 사월팔일 연등놀이와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등장하는 이른바 괴뢰희(傀儡戱)를 만석중놀이로 보았다(“東國歲時記에 四月八日卽浴佛日, 東俗以是日燃燈, 謂之燈夕……或作傀儡, 被以衣裳 繫索而弄之……라 한 것은 「만석중노리」가 연출되엿음을 말하는 기사다.”). 이외에도 『조선연극사』에서는 만석중놀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민간의 전설 하나를 언급하였다. 만석중은 지족선사이며, 30년 면벽수행하던 지족선사가 송도 기생 황진이에 홀려 도를 작파하였는데, 재를 올릴 때 기원자들에게 너무 많은 쌀을 받아 만석(萬石)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재철은 이 전설에 대하여 만석중놀이가 조선조에 자주 연출되면서 꾸며낸 것이라 평가했다.
‘만석’이라는 명칭에만 집중해보면 그 기록은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 판소리 《무숙이타령》인 「게우사」 등에 존재한다. 《산대(山臺)》에도 ‘만석’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때에는 ‘〈만석춤[曼碩舞]〉’으로 나온다. 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서는 나례 연희자 탁반두가 소개되고 있는 가운데, 그가 ‘황진이의 춤과 만석중의 노래 및 우스개 몸짓을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때는 앞서 김재철이 소개한 설화에 입각한 춤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또 《개성탈놀이》 중에는 〈노장(노승)과장〉이 있는데, 이 노장의 이름이 ‘망석중 또는 지족선사)’이며 역시 당녀(황진이)가 등장하여 파계한 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산대》에서의 〈만석춤〉, 탈춤에서의 〈노장과장〉이 과연 만석중놀이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현재 연행되는 ‘만석중놀이’는 심우성이 1983년 문예회관(현재의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복원하여 공연한 것에서 비롯된다. 심우성은 1930년대의 김재철 기록과 그가 1970년대에 인터뷰했던 남사당패 남형우, 양도일, 그리고 통도사의 경봉 스님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만석중놀이를 복원하였으며, 1930년대 김재철 기록보다는 경봉 스님의 증언에 더 가까운 복원이었다.
한편 2018년 학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삼척 안정사에서는 땅설법 〈만석중득도기(曼碩衆得道記)〉가 사월초파일 전날밤 그림자극으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땅설법은 불교 속강(俗講) 또는 강창(講唱)으로 일반 민중들을 위한 법문이다. 그래서 소리와 말을 교차시키고, 다양한 민속연희들이 활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석중놀이’는 서사가 없는 데 반해, 땅설법 〈만석중득도기〉에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차이이다.
○ 역사적 변천 과정
‘만석’이라는 명칭은 산대 등의 기록에도 등장하나 춤으로서 나타나고 있어 그것과 ‘만석중놀이’가 같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만석중놀이의 역사 변천은 1930년대 김재철의 기록과 현재 연행의 시발이 되었던 1983년 심우성의 복원과의 비교를 통해 해명할 수 있다. 김재철의 기록을 보면 ‘만석중놀이’가 반드시 그림자극으로 놀았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 “‘만석중놀이’는 대개 담(垣) 구석에 붕(棚)을 설(設)하고 연출하는 것이지만, 어느 때에는 시장 중앙에서 꼭두각시극과 병연(並演)할 때도 있으며, 혹은 용ㆍ잉어ㆍ노루ㆍ사슴 등은 등(燈)을 사용하여 채화(彩畫)로 비추기도 한다.”
김재철과 동시대의 송석하(宋錫夏, 1904~1948)의 글에서도 또한 그림자극이라는 내용은 없다.
나) 이것은 보통 음력 4월 8일 석가탄신일(조선에서는 파일 놀이라고 한다. 놀이는 놀음과 거의 같은 뜻이다.) 축하의 여흥(餘興)으로 연행(演行)된다. 그러나 때로는 마을 장이 설 때 연행되기도 한다.
아울러 김재철과 송석하가 보았던 1930년대 만석중놀이의 등장물은 나무로 만든 만석중과 용과 잉어, 노루와 사슴이었다.
1983년 심우성이 복원한 만석중놀이는 1970년대 인터뷰한 남사당패 출신 남형우와 양도일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 증언은 그림자극, 십장생의 등장으로 요약되는 것으로 앞서 김재철과 송석하의 만석중놀이와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개성 출신으로 만석중놀이를 보았다는 윤상근으로부터 포장 앞에 〈중춤〉을 추었다는 대목이 있었다는 증언이 전해지나, 실제 어떤 음악 배경 속에서 놀이를 했는지는 밝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정적 내용은 양산 통도사 경봉 스님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다) 종소리로 시작하여 십장생이 뛰놀고, 회심곡(和請)이 은은히 퍼지며 십장생이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하면, 용과 잉어가 여의주를 제 것으로 하려고 다툰다. 그러나 끝내 누구도 여의주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그를 배경으로 한 중이 앞에 나서 〈큰 물고기 어항 속에 노니는 자태〉인 운심게작법運心偈作法을 춘다.
이를 통해 심우성은 1983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제1차 발굴 발표를 하였는데 여기서 공연된 만석중놀이는 5막 구성이었다. “1) 등의 행렬(장면의 시작과 끝에 만석중의 몸짓), 2) 십장생 등장 → 퇴장(화청 시작), 3) 다시 등의 행렬, 4) 용과 여의주의 겨룸(운심게작법), 5) 등의 행렬(범종소리)”이 그 구성이다.
○ 연행 시기 및 장소
1930년대부터 모든 연구자는 한결같이 만석중놀이는 사월초파일에 노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것이 저녁에 그림자극으로 놀던 것인지, 시간과 관계없이 낮에도 놀던 것인지와 관련해서는 진술이 엇갈린다. 또한 이것이 절에서 벌어진 것인지 시장과 같은 공개적인 공간인지 그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김재철의 기록에 따라 “대개 담(垣) 구석에 붕(棚)을 설(設)하고 연출하는 것이지만, 어느 때에는 시장 중앙에서 꼭두각시극과 병연”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3년 심우성에 의해 복원되고, 그가 이끄는 한국민속극연구소 부설 극단 ‘서낭당’의 주최로 만석중놀이의 1차 발표회가 열린다. 공연은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1일 1회 연행된 공연이었으며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했다. 2차 발표회는 1984년 5월 8일 해인사 대강당에서, 3차 발표회는 1985년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했다. 1986년에는 오사카 국제인형극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오사카 국립분라쿠극장[國立文樂劇場]에서 공연을 하였다. 현재 만석중놀이는 (사)만석승희보존회가 맡고 있는데 대표는 1995년부터 서낭당에서 활동한 한대수이며, 경남 거창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대수는 만석중놀이에서 〈운심게작법〉을 담당하기도 한다.
○ 연행 도구
1983년 심우성이 복원한 만석중놀이의 무대는 가로 6m, 세로 3m 50cm였다. 이중 영화의 스크린처럼 그림자가 비추는 곳은 가로가 4m, 세로는 1m 80cm이다. 지면으로부터 1m 50cm 정도에 그 스크린의 하단이 위치하도록 하여 그림자를 조정하는 사람이 서서 공연할 수 있게 했다. 전통시대에 광원으로는 횃불을 이용했지만, 이 당시에는 무대공연이었기에 후면과 양 측면에 조명기구를 배치하였다.
만석중놀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구는 만석중인형이다. 1933년 김재철은 만석중 인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삽화 또한 남겨서 그 이해를 도왔다. 얼굴은 호류(瓠類)로 만들고 몸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무릎, 허벅지, 몸통, 팔이 분리된 것을 끈 장치로 연결하여, 그 끈을 잡아당기면 다리가 말리며 머리를 치고, 팔은 몸통을 쳐서 ‘딱딱’하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린다는 점이다. 현재도 이와 원리는 똑같이 구현되고 있다. 다만 옛날과 달리 얼굴 부분도 나무로 만든다.
라) “1도의 점선은 끈나풀이다. 인형 뒤에서 그것을 잡어 단기면 B구멍을 통하야 끈나풀이 캥겨지기 때문에 A는 우로 올나가게 되며 따라서 두 발은 머리를 치게 되고 이와 똑같이하야 두 팔은 가슴을 치게 된다. 이와같이 조종자가 끈나풀을 잡아단겻다 놓앗다 하는 동안에 만석중인형은 쉴새없이 얼굴과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인형은 얼굴은 호류(瓠類)로 맨들고 동체는 나무로 박아지같이 맨들고 수족은 딱딱한 목편으로 제작된 거대한 인형이며 따라서 요란한 소리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것은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없이 뚝닥거린다.”
1983년 심우성이 복원한 만석중놀이는 5막 구성으로 현재까지도 그 구성이 이어지고 있다. 이때 막마다 등장하는 모형물들이 있는데, 1, 3, 5막에는 탑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원등, 각등, 연등의 모형물이 등장한다. 각 모형물의 모양은 검은색 두꺼운 종이를 이용하여 만들고, 빛이 투과될 곳은 오려내어 색지를 바른다. 그리고 각 상단에는 장대를 연결하여 이를 통해 움직임을 만든다. 2막에서는 십장생이 등장한다. 해ㆍ달ㆍ구름ㆍ소나무ㆍ불로초ㆍ노루ㆍ학ㆍ물ㆍ거북이ㆍ바위가 그것이다. 큰노루의 경우에는 뒷다리를 분리제작 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부착한 뒤 장대를 하나 더 연결하여 뛰노는 형상을 연출하기도 한다. 4막에서는 용과 잉어가 등장한다. 용의 경우는 가로 길이가 매우 길기 때문에 4개의 장대로 연결하여 두 명의 사람이 조종한다.
○ 음악적 특징
만석중놀이에 등장하는 음악은 불교음악으로 두 가지가 쓰인다. 2막에서 십장생 등장했다 퇴장할 때 부르는 《화청》(회심곡)과 4막에서 용과 잉어의 여의주 다툼에 〈운심게(運心偈)〉가 그것이다. 사실 1930년대 기록들에서는 실제 어떤 음악이 존재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심우성이 복원한 음악은 바로 양산 통도사 경봉 스님의 증언에 의한 것이며 실제 1983년 복원공연에서는 《화청》과 〈운심게〉를 일응 이재호 스님이 맡았다. 일응스님은 1920년 전주 태생으로, 11세에 출가한다. 그래서 먼저 《완제범패》를 시작하였고, 16~18세 때 서울 봉원사 월하스님과 개운사 전우운스님으로부터 《경제 범패》를 배웠다. 그리고 범란 때는 시조창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의 작법 부문 보유자가 되었다.
만석중놀이에서 부르는 《화청》은 회심곡류 《화청》으로 “걸청걸청 지심 걸청”으로 시작하는데, 1983년 일응 스님이 부른 가사를 심우성이 채록해놓은 바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주로 ‘왕생극락’을 비는 내용이다. 현재는 스님들이 연주하지 않고 녹음테이프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연된다.
1983년 복원한 만석중놀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1) 등의 행렬(장면의 시작과 끝에 만석중의 몸짓), 2) 십장생 등장 → 퇴장(화청 시작), 3) 다시 등의 행렬, 4) 용과 여의주의 겨룸(운심게작법), 5) 등의 행렬(범종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공연시간에 따라 이 구성에 가감이 있을 수 있다. 1, 2, 5번만으로 구성할 수도 있고, 1, 2, 4, 5로 구성할 수 있다. 1990년대의 영상을 보면 1, 2, 4, 5의 구성으로 연행되는데,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연등(범종소리)
〈범종소리〉가 들리면 우측 편에 만석중 인형이 뚝딱거리며 손을 낸다. 이 소리를 시작으로 탑등이 무대의 가운데에서 떠오르고, 그 양옆으로 연등, 원등, 각등이 등장한다. 이내 《화청》이 들리면서 각각의 등들이 퇴장한다.
2) 십장생(화청)
계속해서 《화청》이 불리면서 모든 연등이 퇴장하면, 우측 가장자리에 서 있던 만석중의 ‘딱딱’ 거리는 소리를 신호로 십장생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먼저 해가 등장한다. 다음으로 달ㆍ물ㆍ바위ㆍ구름ㆍ소나무ㆍ불로초ㆍ거북ㆍ학ㆍ노루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잠시간 《화청》만 들리며 정지했다가 만석중의 ‘딱’ 소리를 신호로 하나씩 사라진다.
3) 잉어와 용의 여의주 다툼 (〈운심게〉와 〈운심게작법〉)
《화청》이 끝나면 범종이 울리고, 만석이 ‘딱’ 소리를 낸다. 이후 〈범종소리〉에 목어가 등장하고, 이내 〈목어소리〉가 들린다. 목어의 형상물 2개가 좌, 우에 각각 등장하여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이내 독창으로 ‘〈운심게〉’의 첫구절인 “운심공양진언(運心供養眞言)”을 부르면 곧 큰 잉어가 헤엄치듯 돌아다닌다. 〈운심게〉의 첫 구절이 끝날 무렵 용이 등장하며, 2구 “원차향공편법계(願此香供遍法界)”는 계속해서 독창으로 길게 빼서 부른다. 그러나 3~5구 “보공무진삼보해(普供無盡三寶海) 자비수공증선근(慈悲受供證善根) 영법왕세보불은(令法往世報佛恩)”은 제창으로 길게 빼지 않고 일음일자식으로 읽듯이 부른다. 소리가 끝나면 태징과 태평소 연주가 이어지고, 1인이 나와서 〈작법무〉를 춘다. 〈운심게〉의 〈작법무〉이므로 ‘〈운심게작법(運心偈作法)〉’이라 부른다. 흰장삼, 가사, 고깔을 쓰고 양손에는 연꽃을 한 송이씩 들어 소위 〈나비춤〉을 춘다. 〈나비춤〉이 끝나면 〈바라춤〉이 이어진다.
4) 연등과 탑돌이 (범종소리)
놀이의 처음처럼 법종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만석중 인형이 내는 ‘딱’ 소리에 맞추어 탑등, 연등, 원등, 각등이 등장하며, 모든 등이 등장하면 탑등을 중심으로 다른 등들이 탑돌이를 하듯 원형으로 돈다.
만석중놀이는 흔히 ‘국내 유일의 그림자극’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1930년대 기록을 보면 반드시 그림자 형태로만 연행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3년 심우성이 복원하면서 그림자극으로 고정되었다. 한국 연희 중에 그림자 연행의 예가 없어 만석중놀이가 유일한 그림자극이 된다. 만석중놀이는 무언으로 진행되며, 만석중 인형과 종이형상물이 결합한 독특한 형태로 연행한다. 다만 서사가 없어 이를 ‘극(劇)’으로 봐야 할지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1930년대 기록에서는 만석중놀이의 음악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1983년 심우성이 복원할 때는 양산 통도사 경봉스님의 증언에 따라 《화청》과 〈운심게〉가 사용되었다. 만석중놀이가 흔히 사월초파일에 연행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교와 관계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더욱이 《화청》과 〈운심게〉가 결합되면서 더욱더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해졌다. 이 놀이가 형성되었을 시기에는 동적인 그림자 연출을 통한 시각화가 마치 활동사진을 보는 듯한 경험을 주었기에 대중들의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불꽃놀이처럼 딱히 서사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환희로운 시각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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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金亨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