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舞儀), 성경린 무보(成慶麟 舞譜)
성경린(成慶麟, 1911~2008)이 10편 정재의 연행법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형식으로 정리한 자필 필사 무보.
성경린의 『이왕직아악부 무보』는 〈봉래의(鳳來儀)〉,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춘앵전(春鶯囀)〉, 〈처용무(處容舞)〉, 〈향령무(響鈴舞)〉, 〈보상무(寶相舞)〉, 〈무고(舞鼓)〉,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 〈만수무(萬壽舞)〉의 무의(舞儀), 즉 10편 정재의 연행 방법을 노트에 기록한 무보이다.
관제(寬齊) 성경린의 『이왕직아악부 무보』는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의 『창사와 정재철(唱詞及呈才綴)』을 텍스트로 노트에 작성한 자필 필사본이다. 그 작성 연도는 알 수 없다. 성경린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1926년 입소하여 1931년 3월에 졸업한 제3기생이다. 성경린은 1930년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 내외의 근친(覲親: 어버이를 뵘) 행사 준비를 계기로 무동(舞童)으로 선발되었고, 이때 〈처용무〉를 뺀 나머지 9편 정재들을 당시 학습했다고 하였다. 이은은 고종(高宗) 광무황제의 7째 아들로 1900년 영친왕(英親王)에 봉해졌다. 이후 자손이 없던 이복 형 순종(純宗) 융희황제의 황태자로 1907년 책봉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서 억류되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제에 의해 왕세제로 격하되었다가 순종 사후 이왕 또는 영친왕으로 불리며 일본에 계속 억류되어 있었다. 영친왕 부부는 매년 3월이나 9월에 방한하곤 하였는데, 1930년 7월에는 이왕직 당국에 의해 근친 환영연 행사가 특별히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심소 김천흥 무악 칠십년』(1995)에 의하면, 당시 성경린의 선배인 이병성은 아악부원 양성소에 1922년 입소하여 늦가을에 김천흥과 함께 무동으로 선발되어 1923년 3월 25일 순종 탄신 오순잔치에 정재 공연자로 참여하였다. 이병성은 1926년 3월 졸업 후 아악수보와 아악수 등을 역임하던 중, 1930년 영친왕 내외의 근친 행사를 계기로 후배들을 위한 10편 정재의 정리와 기록의 필요를 느껴 『창사와 정재철』을 1931년 3월에 작성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3월은 아악부원양성소 3기생의 졸업 시기였다. 이병성은 후배 아악부원 양성소 무동들을 위해 참고 및 학습 교재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을 성경린이 자신의 노트에 재편성하여 기록한 것이 현재 전하는 『이왕직아악부 무보』이다. 성경린은 이병성의 무보 기록에 누락된 것을 후록자로서 수정 보완하였다.
성경린의 『舞儀(무의)』, 즉 『이왕직아악부 무보』는 이흥구 소장자가 국립무용단 안무자로 있던 1990년도에 성경린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이흥구』(국립국악원 구술총서 8, 2013)에 따르면, 소장자 본인을 성경린이 호출하여 갔더니 직접 이 노트를 건네주며, 그 내용을 그대로 재연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흥구는 성경린의 노트를 건네받자 복사본을 제작하여 본인이 갖고, 원본은 주인 성경린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의 소장본은 당시의 복사본이며, 실제 원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 체재 및 규격
1책 56면(속지만: 앞표지 미포함, 뒷표지 없음). 15.5cm×21.3cm
○ 소장처(자)
이흥구(李興九, 1940~)[중요무형문화재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
○ 구성 및 내용
성경린의 무보 기록인 『무의』는 그 작성 연대에 관한 정보가 없다. 따라서 이 무보는 언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표지에는 ‘舞儀(무의)’라고 세로쓰기가 되어 있으며, 연두색 바탕에 검정색 무늬가 있다. 복사한 용지를 철하고 이를 검정테이프로 마무리하였다. 이 『이왕직아악부 무보』를 『무의』로 부르는 것은 이 표지 제목에 따른 것이다. 뒤표지는 없으며, 복사 용지가 매우 낡아 접은 면이 서로 떨어지려는 상태이다. 속지 56면에 기록된 정재 관련 구성 및 내용에 대해서는 표로써 정리ㆍ제시한다.
구분 | 구성 내용 | 56면 | 28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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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와 메모 |
呈才(정재) / 舞鼓(무고), 酒色財氣(수색재기)의 경계 7언절구(명심보감 성심편), 죽간자 儀仗(의장) 설명 | 1 | 1장 |
목차 | 1.鳳來儀(봉래의) ~ 10.萬壽舞(만수무) | 2 | |
무도 무의 |
봉래의 | 3-9 | 3½장 |
장생보연지무 | 10-18 | 4½장 | |
춘앵전 | 19-22 | 2장 | |
처용무 | 23-27 | 2½장 | |
향령무 | 28-29 | 1장 | |
무고 | 30-33 | 2장 | |
보상무 | 34-37 | 2장 | |
가인전목단 | 38-41 | 2장 | |
수연장 | 42-46 | 2½장 | |
만수무 | 47-50 | 2장 | |
술어약해 |
항장무 | 51-52 | 1¼장 |
선유락 | 52 | ||
항장무 | 52-53 | ||
기타 | 날짜별 연무(宴舞), 일무(佾舞)등 관련 메모 | 53-56 | 2장 |
이 노트의 기타 부분에는 1941년 4월 8일부터 11월 25일까지의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 관련 메모가 촘촘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1938년 4월부터 1941년까지 아악수장을 지낸 성경린이 특히 1941년의 아악수와 아악생을 관리한 기록을 무보 노트의 빈 뒷면에 남긴 것이라 하겠다.
[무보 차례] 1. 鳳來儀(봉래의) 2. 長生寶宴之舞(장생보연지무) 3. 春鶯囀(춘앵전) 4. 處容舞(처용무) 5. 響鈴舞(향령무) 6. 寶相舞(보상무) 7. 舞鼓(무고) 8. 佳人剪牧丹(가인전목단) 9. 壽延長之曲(수연장지곡) 10. 萬壽舞(만수무)
성경린의 『이왕직아악부 무보』는 일제강점기 아악부원양성소 아악생의 1930년대 무동정재 학습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무보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연향의 춤인 실제 정재의 반주음악은 〈상령산〉ㆍ〈중령산〉ㆍ〈세령산〉ㆍ〈가락덜이〉ㆍ〈삼현환입〉ㆍ〈염불환입〉ㆍ〈타령〉 등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개별 악곡을 3~4곡 조합,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각 곡에는 '만년장환지곡'ㆍ'함녕지곡'ㆍ'풍운경회지곡'ㆍ'장춘불로지곡'ㆍ'풍경지곡' 등 아명(雅名)을 붙였다.
강용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지식공작소, 2013. 국립국악원, 『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8 -이흥구-』, 국립국악원, 2013. 김천흥, 『心韶金千興舞樂七十年』, 민속원, 1995. 김천흥,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민속원, 2005. 성경린, 『나의 인생관: 노을에 띄운 가락』, 휘문출판사, 1979. 성경린, 『성경린 수상집 雅樂』 경원각, 1975. 김영희, 「이왕직 아악부의 궁중무 전승」, 『무용역사기록학』 42, 무용역사기록학회, 2016.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이종숙, 「이왕직아악부의 정재음악 연구: 이병성‧성경린 무보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34,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