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에 기녀(妓女) 2인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분담하여 애정을 표현하던 맞춤[對舞]의 이름. 2. 현대 한국춤을 추는 전문 남성 무용수를 이르는 축약어.
1. 남무는 도포를 착용한 남성 역할의 기녀 1인과 그의 맞상대인 여성 역할의 기녀[남무받이] 1인이 애정행각을 표현하는 대무 형식의 극무용(劇舞踊)이다. 기녀들에 의해 창작된 춤 양식인데,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다. 그 명칭은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가 지은 〈한양가(漢陽歌)〉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전국의 기녀들 간에 유행했으며, 일제강점기 권번에서도 추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 기녀가 남녀 역할을 분담했던 남무의 전승은 단절되었다.
2. 1970년대 말 남성 무용수를 줄여서 남무(男舞)라고 하였다. 이후 한국무용을 전공한 남성 무용수들로만 구성된 ‘정재만 남무단’이 1986년에 발족했고, 이로부터 남무는 남성 무용수를 가리키는 축약된 용어로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남무의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가 지은 〈한양가〉에서 남무의 연행 기록을 처음 볼 수 있다. 별감들의 승전(承傳)놀음에 참가한 기생들이 대무[맞춤]로 남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웃영산(靈山) 늦은 춤에 중영산(中靈山) 춤을 몰아 잔영상 입춤 추니 무산선녀(巫山仙女) 내려온다. 배떠나기 북춤이며 대무(對舞) 남무(男舞) 다 춘 후에…<이하 생략>…”라고 묘사되어 있다. 승전놀음에서 기생들은 〈입춤〉, 〈배떠나기[선유락]〉, 〈북춤[무고]〉, 남무, 〈항장무〉를 차례로 연행했다.
○ 역사 변천 과정
남무는 조선 후기 한산거사의 〈한양가〉(1844)에 기녀가 ‘대무 남무’를 추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이후 『매일신문』(1898.08.29.)에는 일본 후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초대하여 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절묘한 기생들에게 전립을 착용하게 하고 ‘검남무(劒男舞)’를 한참 하고 갖은 음식으로 대접했다”고 하였다. 즉 대한제국의 궁중연회에서도 기녀들에 의해 〈검무〉와 남무가 연행되었다. 『매일신보』(1914.01.28.~06.11.)의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연재된 92명의 예인 중 6명의 기생과 1명의 음악인 이병문(李秉文)은 남무가 특기라고 했다.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1918)의 605명 기생 중 27명이 남무가 특기였는데, 그중 단 한 명 한성권번의 김춘운(金春雲)은 남무바지(일명 남무받이: 남무를 받는 상대 여성 역할의 기녀)였다.
한편, 『조선일보』(1938.01.07.)에 의하면,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한성준은 여러 가지 춤 레퍼토리를 갖추었는데, 그중에 남무도 있었다. 또 정읍 신태인에 거주하던 김소란(金笑蘭, 1917~?)은 자신의 특기인 남무를 1944년 정경태(鄭坰兌, 1916~2003)에게 전수하였다. 정경태 남무의 남무받이는 박향란(朴香蘭, 1924~?)이 담당하였다. 정경태는 자신이 학습한 남무를 무보로 작성하여 자신의 저서 『국악보(國樂譜)』의 부록에 삽입하여 오늘에 전한다. 판소리 명창 김소희(金素姬, 1917~1995)도 전주 정자선(다른이름: 정선린, 정갑선)에게서 ‘남무바지’를 배웠다고 하였다.
이처럼 조선 말과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창작‧연행되던 남무는 전국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도 전국의 기녀들을 중심으로 남무가 전승되었는데, 음악인 이병문과 한성준, 정자선, 정경태는 남성이면서 이 춤을 학습하고 전승하였다. 남무의 주 연행자는 기생인데, 남성 역할의 춤은 남성 춤지도자에 의해 기녀에게 지도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기생의 사회적 환경 쇠퇴로 기생 2인이 대무로 연행하는 남무의 전승은 단절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무용가 국수호(鞠守鎬, 1948~)는 전주농업고등학교 시절에 당시 특별활동 농촌예술반의 무용 교사로 초빙된 정형인(鄭炯仁)에게서 도령복을 입고 혼자 추는 남무를 배웠다고 한다. 2인 대무 중 남성 역활의 남무만 배운 것으로 보인다. 1965년 11월 4일 학교 품평회 때 남무를 공연하였고, 도령복식인 쾌자를 착용하고, 이마에 흰 띠를 둘러 오른쪽으로 묶은 기념 사진이 『국수호 구술채록문』에 있다.
한편 춤의 제목이 아닌, 일반명사화 된 남무는 1970년대 말 남성 무용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동아일보』(1977.05.14.)에 국악평론가 유기룡(劉起龍, 1911~1990)이 5월 19일에 진행될 「명창명인대회(名唱名人大會)」를 홍보 소개하면서 “男舞(남무)로서의 僧舞(승무)”라는 말을 사용했다. 당시 남성 무용수가 승무를 춤출 예정임을 소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용어는 당시 주로 여성들이 무용 공연 및 예술 활동 인구를 독차지하던 환경 속에서 남성 무용수의 출연을 특이한 일로 여기며 사용된 것이다.
이후, 『동아일보』(1990.04.01.)에는 동아무용콩쿠르 제7회 대상 수상자인 정재만(鄭在晩, 1948~2014) 당시 숙대 교수를 “한국춤에 있어서 남무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재만은 1986년 세종대학교 남성 졸업생 15명으로 ‘정재만 남무단’을 창단하여, 1987년 6월 1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창단공연을 가졌다. 근래는 남성 무용수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 춤의 특징
남무의 무보를 남긴 정경태는 남무는 곧 법무(法舞)이며, 모든 춤가락(검무, 승무, 한량무, 입춤, 굿거리, 살풀이) 등이 남무에서 파생한다고 했다. 남무는 남자로 분장한 기녀와 여장 차림의 기녀 두 사람이 상대하여 맞춤을 추는 형식이다. 오늘날의 〈사랑가〉와 같은 모습으로서 일제강점기 예술무용의 무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정경태가 작성한 남무 무보의 음악은 염불 15장단, 굿거리 27장단, 느린타령 21장단, 자진타령 32장단을 사용하였다. 각 장단마다 춤의 출처가 제시되어 있는데, 남무에는 〈승무〉ㆍ〈입무〉ㆍ〈검무〉ㆍ〈가인전목단〉ㆍ〈포구락〉ㆍ〈무고〉와 남무의 특징적인 춤사위가 조합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남무는 조선 후기 발달한 극무용 형식의 춤이다. 남녀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데, 여성인 기녀 2인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일제강점기 창극 〈춘향전〉 등에서 이도령과 춘향이의 2인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현대 무대공연에서의 안무작 〈사랑가〉와 같은 신전통춤의 양식에 영향을 끼친 점에 의의가 있다.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4): 승무ㆍ살풀이춤(서울ㆍ경기ㆍ충청편)』 문화재연구소, 1991. 정경태, 『國樂譜』, 전주고등학교, 1955. 한산거사ㆍ강명관 역주,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 이종숙, 「소란 김옥진의 남무와 정경태 무보 연구」, 『한국예술연구』 22, 한국예술연구소, 2018. 차명희, 「장월중선 춤의 특징과 의의」, 『장월중선의 춤 세계』 민속원, 2017.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스(손선숙 채록연구, 「1회차 국수호_2010 생애사」, 『국수호 구술채록문』,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https://www.daarts.or.kr/viewer/document/543365#)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