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문〉은 『시경(詩經)』 「주송(周頌)」편에서 유래한 악장(樂章)의 제목이다. 조선(朝鮮) 세종
6년(1424)에 처음으로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의 신주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할 때에 열문지무를 춤추도록 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오례의(五禮儀)』에 사직대제(社稷大祭;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종묘‧풍운뇌우(風雲雷雨: 자연 공간 관련 수호신)‧산천(山川: 국토 관련 수호신)‧성황(城隍: 국가 및 성역 수호신)의 제사와 선농(先農;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바치는 제사)‧선잠(先蠶: 최초로 누에치는 법을 알려준 신에게 바치는 제사), 우사(雩祀: 비를 관장하는 신)‧문선왕(文宣王: 공자) 등을 위한 제향 때에 아악 연주에 맞추어서 열문지무를 추도록 규정하였다. 세조 10년(1464) 봄 제사부터 종묘와 영녕전 제향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례에는 모두 아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열문지무를 육일무로 추었다.
아악이 수입된 시기는 고려 예종(睿宗) 11년(1116)이다. 조선은 고려 아악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기에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할 때와 사직단 대제 때 팔일무를 추었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국토 수호와 관련된 원구단 이하 사직 등의 제사가 모두 폐지되었다. 반면 석전제는 1928년 9월부터 육일무인 열문지무를 팔일무(八佾舞)로 오히려 확장시켰다. 8.15광복 이후 《문묘제례악》 등 음악 연주는 이왕직아악부의 뒤를 이은 구왕궁아악부에서 전승하였고, 이는 국립국악원으로 계승되었다. 석전대제를 위한 열문지무는 1976년 이왕직아악부 출신 원로 사범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어 1980년에 재현이 완료되었다.
1981년 봄 석전제부터 팔일무로 연행되었다. 사직대제의 열문지무는 석전대제를 위해 재현된 팔일무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근래 원구제(圜丘祭) 의례도 재현되어 열문지무를 추고 있다.
석전대제의 영신에서는 사람 신[인신(人神)]에게 올리는 제사 격에 맞게 열문지무를 아홉 번 반복하여 춤춘다. 반면 사직대제는 토지와 곡식 관련된 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덟 번 반복하여 춤추었다. 원구단에서 천신을 맞이할 때는 여섯 번 반복하여 춤추었다. 그 외 전폐와 초헌 때에는 사언팔구 악장의 음악연주에 맞추어서 한 번만 춤추었다.
사언팔구 악장이란, 시어(詩語) 네 글자를 한 구로 전체 팔구 서른두 글자가 한 개 악장을 이룬 것을 뜻한다. 악장 서른두 자에 춤도 각 글자 한 자마다 한 개 동작이 배정되었는데, 연결이 필요한 경우는 둘~네 개 동작을 이어서 한 개의 지시어를 완료한다. 석전대제 전폐례의 악장 첫 구절인 사언일구는 자생민래(自生民來: 사람이 생겨난 이래)이다.
아악인 열문지무의 조선 시대 복식은 진현관(進賢冠)을 머리에 쓰고, 안에는 백주중단(白紬中單)을 입고 겉에는 조주의(皂紬衣)를 입는다. 아래는 백주군(白紬裙)을 입고, 금동혁대(金銅革帶)를 허리에 두르며, 흰색 베 버선[백포말(白布襪)]에 오피리(烏皮履)를 신는다. 무용수는 왼손에 약을 쥐고, 오른손에는 적을 잡고 춤춘다. 두 명의 문무 인도자는 둑(纛)을 잡고 무용수 앞쪽에 선다.
현재 무용수는 머리에 진현관을 쓰고, 홍주의(紅紬衣)를 착용하며, 남사대(藍紗帶)로 가슴 부위를 묶는다. 신발은 목화(木靴)를 신는다. 둑 잡이가 빠진 무용수 예순네 명이 춤을 춘다.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