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이후 악인이 허리에 두른, 남색 견사(繭絲)를 엮어서 만든 허리띠[帶]
조선 말기 이후 궁중 의례에서 음악 연주를 담당한 악인이 홍색 겉옷 안에 남색 창의를 입고, 그 남색과 짝하는 색의 실을 엮어서 허리에 두른 띠이다.
조선 시대에 실로 엮은 허리띠는 평상시 간편함을 위해 둘렀다. 악인복의 남사대는 국가에 재난 등 특별한 상황이 있어 본래 정해진 허리띠를 갖출 수 없을 때, 평상시 착용하던 실띠[술띠]인 조대(絛帶; 縧帶)를 대신하여 임시로 둘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 전기의 악인은 가죽을 기초 재료로 한 혁대(革帶)와 직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했는데, 이를 대신해 19세기 후반에 남사대를 착용하였다.
○ 유래
전통 시대 허리띠는 가죽을 기초 재료로 한 혁대, 직물을 재료로 한 띠, 실을 엮어서 만든 실띠[술띠]로 대별할 수 있다. 실띠는 ‘조대[도대](絛帶)’라고도 쓴다. 조선 건국 후 악인들은 평상시 두르던 허리띠를 음악 연주 때 착용하기도 했는데, 세종 때 악무복이 정비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국가적 재이(災異)를 겪으면서 국가 재정이 피폐해졌고, 이에 18세기 초반 『종묘의궤』에 평상시 쓰던 ‘색조대(色縧帶: 색이 있는 조대)’를 두른다는 내용이 보인다. 정조 때는 악인 복식 논의 중 “태묘 제향 악공들이 평상시 착용하는 사대(絲帶)와 피혜(皮鞋)를 입어 천박하다”는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고종 29년(1892) 『(임진)진찬의궤』 이후 악인복에서 남사대가 공식 확인되는데, 도식을 보며 세조대(細絛帶)의 형태이다.
세조대는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포(袍) 형태의 큰 겉옷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던 실띠이다. 국가에 예속된 악인들도 왕이 신하에게 연회를 내릴 때[賜宴] 등에는 일반 사대부와 같이 포에 세조대를 둘렀고, 이 세조대가 국가례의 악인복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이다.
○ 쓰임 및 용도
조선 전기 『악학궤범』 ‘시용(時用)’ 복식에서 악인의 허리띠는 혁대의 일종으로 금동혁대(金銅革帶)와 오정대(烏鞓帶) 등이 규정되고, 직물로 만든 허리띠로 비백대대(緋白大帶)ㆍ백주대(白紬帶)ㆍ백초대(白綃帶)ㆍ백말대(白抹帶) 등이 규정되었다. 아악의 악사는 복두(幞頭)ㆍ강공복(絳公服: 붉은색 공복)ㆍ백주중단(白紬中單: 백색 주(紬)로 만든 중단)ㆍ백포말(白布襪: 백색 베로 만든 버선)ㆍ오피리(烏皮履: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신울만 있는 신)에 비백대대(붉은색과 백색 직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른 차림이고, 악생은 개책(介幘)ㆍ비난삼(緋鸞衫: 붉은색의 난봉무늬가 있는 단령)ㆍ흑색 가선을 두른 백주중단ㆍ백주고(白紬袴: 백색 주로 만든 바지)ㆍ백포말ㆍ오피리에 백주대(백색 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른 차림이다. 속악의 악사는 복두ㆍ녹초삼(綠綃衫: 녹색 초(綃)로 만든 단령)ㆍ흑피화에 오정대를 두른 차림이고, 악공은 종묘와 영녕전 제례에서는 아악의 악생과 같은 차림에 허리띠만 백초대(백색 초(綃)로 만든 허리띠)를 둘렀고, 나머지 전정헌가ㆍ고취ㆍ연향 등 여러 상황에는 화화복두(畵花㡤頭), 소화(小花) 흉배를 부착한 홍주삼(紅紬衫)에 오정대를 둘렀다.
조선 전기에 정해진 이 차림은 후기에 변화를 보이고, 그 와중에 19세기 말 허리띠가 남사대로 대체된다. 조선 후기 전악은 모라복두(冒羅幞頭)ㆍ녹초삼ㆍ오정대ㆍ흑피화를 입고, 악공이 화화복두ㆍ홍주의(紅紬衣)ㆍ오정대ㆍ흑피화를 입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전악의 허리띠는 1848년에 은야대(銀也帶)로 바뀌었다가 국말까지 유지되었다. 이에 비해 악공의 허리띠는 오정대를 계속 쓰다가 고종 29년(1892) 임진 진찬부터 남사대로 바뀌어 광무 6년(1902) 임인 진연까지 유지되었다. 일습은 화화복두ㆍ홍주의ㆍ남창의(藍氅衣)ㆍ흑화에 남사대 차림이다. 백색 중단 대신 남색 창의를 받침옷으로 입게 되면서 허리띠로 그에 짝하는 남사대를 두른 것이다. 이로써 전악의 허리띠는 은야대[야자대], 악공의 허리띠는 남사대가 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 궁내부와 의정부간 오간 공문서인 「경효전악기조성비요청」(1898.07.15)에는 예산 외에 지출된 악기 관련 경비 지급을 요청하는 상황이 나타나는데, 악사ㆍ전악ㆍ악공의 복식 관련 비용도 포함되었다. 그 품목에 전악의 야자대와 악공의 남사대가 나타난다(전악은 제복 차림). 즉, 경효전 악기 조성비의 <관복질(冠服秩>에 전악의 복식은 모라복두ㆍ녹초삼ㆍ야자대 차림이고, 등가와 헌가 악공의 복식은 개책(价幘; 介幘)ㆍ홍주의ㆍ남사대 차림이다. 또 동남북 무안왕묘(武安王廟; 관왕묘) 제향 때의 전악은 경효전 때와 같고, 악공복은 화화복두ㆍ홍주단령(紅紬團領)ㆍ남사대 차림이다. 이 중 개책에 홍색 단령은 『악학궤범』 ‘시용(時用)’ 복식 중의 아악 악생과 속악 중 종묘와 영녕전 제례 때 악공의 차림인데, 그때는 백주대나 백초대를 둘렀지만 말기에 남사대로 대체된 것이다. 즉 경효전 제례 때의 악공복은 종묘와 영녕전 제례의 격식에 맞게 입었지만, 허리띠만 국말의 변화를 반영해서 남사대를 썼다. 결국, 남사대는 말기에 착용범위가 넓어, 전기 아악 악생과 속악 악공이 종묘와 영녕전 제례에 개책, 비난삼과 함께 착용했던 백초대를 대체했고, 또 전정헌가ㆍ고취ㆍ예연 등에 화화복두ㆍ홍주삼과 함께 착용했던 오정대를 대체했다. 1927~1930년 출판된 『조선아악기사진첩(건)』에는 악무복 일습과 착장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수록되었고, 일습 옆에는 복식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그중 ‘아악수장(雅樂手長)’ 복식에는 야자대가 들어있고 ‘아악수(雅樂手)’ 복식에는 남사대가 들어있어, 신분에 따른 허리띠의 차별화 및 구체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착장한 아악수장과 아악수의 모습도 확인된다. 또 남사대는 일무복(문무, 무무) 일습에도 들어 있다.
○ 형태와 재료
1892년 『(임진)진찬의궤』부터 1902년 『(임인)진연의궤』까지 수록된 도식을 보면, 세조대의 형태이다. 세조대는 실을 엮어서 만든 가느다란[細] 끈목[絛: 다회(多會)]의 끝에 장식 술을 달아서 만든 허리띠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가 평상시 큰 옷 위에 두르던 허리띠이다. 남사대는 남색 실로 만든 세조대이다.
『악학궤범』 『(임진)진찬의궤』 『(임인)진연의궤』
고유정, 「조선시대 궁중악인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경효전악기조성비요청(各部請議書存案 06. 奎177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최연우(崔然宇)